EP.159

   남궁채공은 크게 웃음을 한번 터트리고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 비록 입양되었다고는 하지만, 승아는 제대로 남궁가의 호적에 올라가 있어. 게다가, 내 딸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미색도 빼어나.”

   어쩌면 부담스러운 주제였다. 까닥하면 아비 앞에서 딸을 깎아내리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다만 남궁채공의 입가에는 계속 웃음기가 걸린 것이, 이러한 이야기에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가주의 배려로 보였다.

   그래서 청휘도 가감 없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첫째로, 혼사는 양쪽의 의견이 맞아야 불화가 없이 즐겁지 않겠소. 애정 없이 이득만을 쫒아 성사된 결혼에는, 끔찍함만이 남소.”

   자신이 꼭 그렇지 않던가.

   레드번 공작은 사랑 없이, 그저 암살자를 기르기 위해서 첩을 들여 기계적으로 아이를 낳게 했고. 엔버스 레드번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곳에 가족애는 없었다.

   “둘째로, 내가 정인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내심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소. 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여기서 혼인을 약속하는 것은, 서로에게 배신이 되리라 생각하오.”

   상대에게 진심을 다하지 않고, 남궁승아와 함께 있으며 루나를 떠올리고, 루나와 함께 있으며 남궁승아를 떠올린다면 어찌 떳떳할 수 있으랴?

   물론, 루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데다가. 그 약속이 장난인지, 진심이 섞여 있는지, 연애 감정인지, 아니면 친구 사이의 감정인지는 부딪혀보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혼자 김칫국을 한가득 들이키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리는 지켜야 함이라.

   남궁채공은 청휘의 풋풋한 순애보에 무릎을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합당하구나! 그러면 자네의 뜻을 존중하겠네. 게다가⋯⋯ 이 자리는 남궁가에 큰 은혜를 입힌 은인에게 보답하는 자리이니. 받기 싫다면 다른 것을 준비할 수밖에.”

   “⋯⋯⋯⋯.”

   “승아야, 그렇게 노려보다가는 청휘 도사가 죽겠구나.”

   “뻔뻔한 사람이니 이 정도로는 안 죽을 거예요⋯⋯!”

   남궁승아의 안광이 뜨겁다. 청휘는 그 불길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그머니 딴청을 부렸다. 무형의 광선이 쏘아지는 것 같다.

   “어디, 그렇다면⋯⋯.”

   남궁채공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하다가, 줄 것을 골라내었다.

   “값진 영약을 포기하고 명이의 단전을 살렸지. 잘못하면 원한만 살 수 있는 형국에도 두려움 없이 나섰다.”

   “내가 바라던 일이었소.”

   “그래. 네가 내 가족에게 이미, 가족보다도 더 지극정성이었으니. 받은 만큼 되갚는 은원의 이치를 따르자면 나 또한 너를 가족이라 여기마. 남궁씨를 받고, 명이와 승아의 형제가 되어주겠는가?”

   “⋯⋯⋯⋯.”

   쿵, 하고.

   청휘는 맞물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이 바라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을, 누군가로 인해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

   가족이라.

   입을 떼어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면, 그것은 쓴맛투성이였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면 반추할수록 배어 나오는 것은 쓰디쓴 진액이다.

   배다른 형제끼리는 서로 다투고, 경쟁하고, 배신하고. 아버지로부터는 도구로 여겨지고, 어머니에게는 사랑을 받았으나, 그 처지가 처량하였다.

   ‘천민, 내가 오른쪽으로 찌를 때에는, 네가 왼쪽을 막아줘야 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형, 형이 너무 빠르게 치고 나가는데 어떻게 따라가?’

   ‘⋯⋯하여튼, 어쩔 수 없다니까. 한 템포 늦출 테니까 똑바로 쫒아와야 돼!’

   한때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진정한 형제는.

   ‘⋯⋯천민, 마력을 쓰는 법을 알아냈어.’

   어느 달밤에 수십 조각으로 깨어져 혼탁하게 섞여버렸다.

   그러니 가족이라는 단어에 진작에 질릴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한구석에 맴돌고 있었나 보다. 그 따스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얻을 수만 있다면──

   청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받고 싶었다.

   “⋯⋯확실히, 정말로 값진 보상이오. 기꺼이 받겠소.”

   “그렇다면 이 순간부터는 남궁청휘로구나.”

   “남궁, 청휘라⋯⋯.”

   “썩 마음에 드는 눈치로군? 나를 아버지로 부르는 건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 승아도 아직 어색해하고 있으니. 그러면⋯⋯ 다음 보상을 받을 준비는 됐나?”

   남궁채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궁청휘는 얼떨결에 가주의 뒤를 따라 걷다가, 어색하게 물어보았다.

   “다음 보상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아니, 입니까?”

   “적응은 천천히 해도 좋네. 내가 아비 노릇을 안 했는데 아비 취급을 받아서야 안 될 일 아닌가. 그리고, 남궁이라는 성으로 대신하기에는 거스름돈이 남네. 그래서 하나 더 얹어주려는 것이지.”

   그는 회한인지, 후련함인지, 복잡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조의 마지막 비기 제왕검형(帝王劍形)의 검흔이 남아 있다고 알려진, 남궁세가의 비처를 보여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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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묘한 진법으로 숨겨진 오솔길, 사방에 안개가 진득하게 낀 하나의 죽 곧은 길을 함께 걸었다. 그러면서 남궁채공은 머나먼 과거를 입에 담았다.

   남궁세가의 시조는 하늘을 베려고 끊임없이 궁구하였다고 한다.

   “검치(劍痴)라는 별명에 꼭 들어맞는 사람이었다고 하더군. 그는 하루 종일 하늘에 대고 검을 휘둘렀고, 그 모습에 이끌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 끝에 남궁세가가 되었다고 전해지네.”

   어느 이름 없는 평지에서 검을 휘두르는 시조 옆에서, 그 검술을 따라 하는 이도 있었고. 밥을 지어 먹이는 이도 있었고. 사랑에 빠져서 엉겨 붙는 이도 있었고. 그렇게 사람이 모이다가 어쩌다 보니 가족이 되어서.

   마침 땅덩이가 남쪽에 있겠다, 남궁이라 하였다.

   그 후손들은 시조의 검술을 토대로 특유의 무학을 발전시켜 나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검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늘을 베었다는 위대한 선조의 발자취를 쫒으며, 다시금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천하제일의 검사를 뿌리로 둔 위대한 가문.

   그러나 그 본질은, 검에 미친 바보와 그에 홀려버린 바보들의 집단이었기에.

   “그러니, 남궁이라는 이름이 최고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원래의 뜻(意)이 아닌 셈이지. 가족의 이름은 떠받들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울타리야.”

   “⋯⋯⋯⋯.”

   “명이와 승아는 깨달은 듯하지만, 소는 아직 벗어나지를 못했어. 남궁이라는 형(形)에 사로잡혀서 본질을 흐려보고 있으니.”

   남궁소는 어려서부터 질투가 심하고 경쟁심이 왕성하였는데, 자신이 높은 곳에 있지 않으면 참을 수 없어 하는 오만한 성격이었다. 그만큼 남궁세가에 대한 아집도 강했다.

   대 남궁세가에 어찌 외인의 피를 들이려고 하시냐며, 위대한 선조의 피가 옅어질 거라면서 남궁승아의 입양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거나.

   한참이나 어린 자신의 동생, 남궁명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로.

   “나와 똑 닮았지.”

   “⋯⋯잘 이해가 안 가오. 그러니까, 가주님과 남궁소가⋯⋯.”

   “나도 젊을 적엔 그랬네. 누군가가 나를 깔보면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러니 개인적인 일로 눈이 돌아가, 가문 전체를 봉문시키지 않았겠나.”

   남궁채공의 눈빛에 애정과 걱정이 스쳤다. 열 손가락 중에는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라, 가주에게는 남궁소가 그러한 것 같았다.

   자신과 똑 닮아있어서, 자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터벅.

   남궁채공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앞에는 커다란 동굴의 입구가 있었다. 이곳이 하늘을 벤 흔적이 남아 있다는 비처인가.

   남궁청휘는 설레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을 벨 정도의 검사가 남긴 검흔이라면 얼마나 고절한 수법일 것인가. 남궁세가라는 커다란 집단의 뿌리라면, 얼마나 깊고 단단할 것인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쪽은 반구형으로 깎여 있었고, 천장에는 구멍이 나 있어 햇빛이 가운데로 들어왔다. 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고, 얕은 개울까지 가로지르며 흐른다.

   자연을 작게 오려내어 꾸며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고, 비처의 정경을 목격한 남궁청휘는 놀라움으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그래서 소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네.”

   검흔이 없었다.

   발자국도, 흔적도, 무엇 하나 없다. 혹여 잘못 보고 지나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도 고절한 수여서 흔적이 숨어 있나. 그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아무리 안력을 집중하여 샅샅이 훑어봐도, 남궁세가의 비처는 텅 비어 있었다.

   혹여나 꽃밭의 아래에 검흔이 있을까 하여, 식물들의 뿌리를 뽑고 파헤친 흔적이 군데군데 보일 뿐이었다. 

   남궁청휘는 고개를 들어 남궁채공의 표정을 살폈다. 진득한 회한이 눌어붙어 있었다. 그가 봉문까지 해 가면서 필사적으로 찾아낸 비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나처럼 깊이 실망하기를 바라지 않았거든.”

   “⋯⋯⋯⋯.”

   “남궁가의 선조가 하늘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가짜였던 것일세. 남궁세가의 비전, 제왕검형(帝王劍形)은 허구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베인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겠나.”

   남궁명과 남궁승아에게 비처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도 같았다. 가문의 뿌리가 실은 허상이었다고 전해 들으면 깊이 실망할 테니, 마음이 충분히 성숙해지고 나서야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네는⋯⋯ 영약을 포기할 정도로 생각이 뚜렷하고, 외지인이니 실망이 크지도 않을 터. 그래서 보여줬네. 다시 봐도⋯⋯ 마음이 아프군.”

   남궁채공은 입을 쩝쩝 다시며, 먼저 등을 돌려 비처를 빠져나갔다.

   남궁청휘는 묘한 느낌이 들어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비처에는 확실히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이⋯⋯ 다른 의미를 품고 있는 듯하여.

   “제왕검형⋯⋯ 이라.”

   머릿속 한구석에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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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색 무복을 입고 서 있던 사내, 남궁명에게 소 형님이라고 불리운 자.

   이제는 남궁의 성을 얻었으니, 그에게도 어쩌면 형님이 될 남자. 무심휘검(無心輝劍) 남궁소(南宮昭)는 청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도드라진 핏줄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끔찍하게도 신경질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남궁청휘는 개의치 않았다.

   “남궁청휘가 되셨다지요. 축하드립니다, 도사.”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소.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구려.”

   “⋯⋯⋯⋯.”

   남궁청휘는 남궁소가 불러세운들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남궁소는 청휘를 쫒아가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삐걱. 삐걱.

   이제는 청휘의 발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고, 심신이 흐트러진 남궁소의 발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그 사실에 지독히도 모욕감을 느꼈는지, 남궁소의 손이 슬그머니 칼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핏줄이 손등에 도드라질 정도로 꽉 힘을 주어 잡았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남궁청휘를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데, 색목인이 남궁씨를 자칭하고 다니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분명 다들 믿지 않을 것인데.”

   “외인의 시선이야 상관없소. 내게 심성이 곱고 무재가 뛰어난 동생이 둘이나 생겼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

   “⋯⋯가문 어르신들도 무척이나 반대할 겁니다. 어쩌면 도사를 쫒아내라며 가주님에게 읍소를 할지도 모르겠군요.”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나는 이미 마음으로 형제가 되었으니 상관없소.”

   침묵.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은 침묵.

   그 침묵을 깨며, 남궁청휘는 경고했다.

   “하지 마시오.”

   “⋯⋯갑자기 무슨 선문답입니까? 도사.”

   “무엇을 꾸미든, 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겠소. 그러나 착각은 하지 마시오. 당신이 두렵다거나 후환을 생각하여 이런 말을 담는 것이 아니라, 명이를 위한 것이니.”

   청휘는 수살대부의 시체에서 습득한 편지를 꺼내 남궁소에게 휙 던졌다. 

   “필체가 같다더군.”

   “이런 질 낮은 모함은⋯⋯”

   “다시 말하지만, 추궁하지 않겠다고 했소. 앞으로 미련을 버리고, 음험한 생각을 하지 말고,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우애 좋게 지내시오.”

   “⋯⋯⋯⋯.”

   남궁소의 발걸음이 멈췄다.

   남궁청휘가 열 발자국쯤 앞서 나가자, 뒤에서 스릉. 하고 칼이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청휘는 돌아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남궁소가 한가득 살의를 품고 으르렁거렸다.

   “내가 그러지 않겠다면? 내가⋯⋯ 꼭 비원을 이루어야겠다면. 그러면 어쩔 테냐.”

   “그러면 못 배워먹고 성질 더러운 천민 하나가 죽겠지.”

   “⋯⋯⋯⋯.”

   남궁청휘가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서 남궁소의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마룻바닥과 벽면이 부서지는 소리도.

   파란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