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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9

     

    회담이 끝난 다음 날, 왕국 사절단은 별다른 요청 없이 얌전히 궁을 떠나게 됐다.

     

    “공식 의견은 추후 송달로 보내드리겠소.”

     

    그리 말하는 장군은 처음 보인 패기에 비하면 힘이 쭉 빠져있었다.

    어제 사고도 있었으니 내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오는 길이다. 아셀라와 헤이케가 나올 것도 없어서, 내가 대신 배웅하게 됐다.

     

    “조심히 돌아가십쇼, 장군님. 특히 공작령을 지나칠 때요. 소문이 돌았을 테니 땅콩을 포대로 선물할 겁니다.”

     

    “슈바르츠슈바이크 공작. 지긋지긋한 악연이지.”

     

    장군이 혀를 차고는 중절모의 챙을 눌렀다. 제국과 왕국의 국경지대에서 자주 충돌한 경험이 있을 터였다.

     

    “본래 궁을, 아니. 제국을 떠날 때까지 사절단으로서 태도를 유지할 의무가 있소만.”

     

    장군이 말투를 누그러뜨리고는 내게 악수를 요청했다.

     

    “도움받은 은혜는 기억하겠소, 의사 고트베르크 선생.”

     

    “저야 반가운 이야기지요.”

     

    나는 거리낌 없이 그의 악수를 받았다. 투박한 전사의 손이었다.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마시오. 사절단이 아니라 내 개인적으로 청한 악수요.”

     

    “하하, 이해합니다.”

     

    장군도 처음 보인 모습처럼 진짜 무뢰한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국가적 입장에서 받아가야 할 게 있었으니 꺼내지 말았어야 할 말도 많았겠지.

     

    그 자리의 헤이케나 아셀라가 평소보다 성질을 죽였던 것처럼 말이다.

     

    “원, 황녀님들은 나와보시지도 않고. 이번 회담은 완전히 실패했군.”

     

    장군이 착잡해 하며 품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커터로 끝을 자르고 붙이려는 찰나 내가 궐련을 뺏었다.

     

    “금연구역입니다.”

     

    “세상에, 제국에는 그런 규칙도 있소?”

     

    “아뇨, 제 반경 20미터요. 흡연은 각종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입니다.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 자제하시죠.”

     

    “그럴 리가. 이게 얼마나 고급품인데.”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요.”

     

    장군이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궐련갑을 안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확실히 제국은 다르군.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오. 치유술도 이렇게나 많이 발전했을 줄이야. 천지차이로군.”

     

    장군이 팔짱을 꼈다.

     

    “사실 왕국 몇 개 주에서도 최근 제국과의 수교를 열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소. 지금은 슈프레 상단이 들여오는 수입품을 웃돈 주고 살 수밖에 없잖소이까. 그것도 소량이지. 그들이 세금을 두 번 지불하다 보니 가격이 세 배는 뛰는 실정이오.”

     

    “수요가 있나 보군요. 하긴 제국에서도 왕국의 제과는 평판이 좋습니다.”

     

    “여러 가지 있지. 사교계 의복이나 희귀한 화초의 씨앗, 주로 고가 희귀품이오.”

     

    양산품은 왕국산도 질이 꽤 좋지만 명품은 제국산을 못 따라온다. 가문에서 받은 내 회중시계도 비싼 물건이고.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물품이 더 유행을 타고 있소. 뭔지 아시오?”

     

    “글쎄요.”

     

    “고트베르크 제약공장의 상비약품이오.”

     

    “오.”

     

    그게 왕국까지 진출했어?

    지금 생산량으로는 주문이 들어온 제국 귀족령이나 제도 일부를 커버하는 게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선생의 이름은 알고는 있었소. 어제는 모른 척하긴 했소만.”

     

    “반가운 소식은 아니군요. 그거, 주의사항을 적어놓긴 했지만 일단 전문가의 관리하에 유통하는 약품들입니다.”

     

    “그렇다고 하더군. 하지만 실제 효과를 본 환자들이 소문을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왕국은 자유국가요. 그런 것까지 제재하진 않소.”

     

    “검토가 필요하겠군요. 제 약품이 밀수품처럼 취급되는 건 원치 않는데요.”

     

    장군이 내 생각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만간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대에게만 살짝 귀띔해주겠소.”

     

    장군이 주변 눈치를 보더니 내게 소곤거렸다.

     

    “이번 회담에서 연합군 편성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국왕 폐하께서 다른 국가들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높소. 이미 법국도 움직이고 있소.”

     

    “끌어들인다 하면?”

     

    “대륙 모든 국가가 경합하는 연무회가 열리지 않을까 싶소.”

     

    장군이 재미있는 단어를 꺼냈다.

    국력이나 물량으로 제국을 앞서기는 힘드니 소수 정예의 실력으로 이겨서 국제 정세의 주도권을 잡아보겠다는 의도다.

     

    “선생도 알겠지만 정복 전쟁 전까지만 해도 왕국과 제국은 국력이 비슷했소. 왕국은 중간계와 맞닿아있어 강한 마물을 항상 상대하는 실력 좋은 모험가 출신들로 무장했지. 연무회에서는 유리하오.”

     

    “일리가 있습니다. 적은 마계의 마물과 마족이니 연무회도 그에 맞는 내용으로 구성될 테니까요.”

     

    “그대만 알고 있으시오. 목숨을 구해준 답례로 주는 정보요. 황녀님들께는 비밀로 하리라고 내 믿으리다.”

     

    “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장군에게 대답했다.

     

    “제가 3황녀님의 혼약자인 건 알고 계시고 하신 말씀이시죠?”

     

    내 말에 장군이 입을 쩝쩝대다가 한참 후에야 반문했다.

     

    “…그랬소?”

     

    “예, 몇 년 됐는데요.”

     

    “젠장.”

     

    장군이 큰 말실수를 했다고 깨닫고는 혀를 찼다.

    그러기도 잠시, 그가 눈을 번쩍 떴다.

     

    “그 3황녀님의 혼약자란 말이오?”

     

    “예.”

     

    “그런 미녀의 마음을 대체 어떻게… 아니, 잊어주시오. 실언이었소.”

     

    장군이 고개를 흔들고는 더 말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꽤 허술한 주책바가지 아저씨였다.

     

     

     

    ***

     

     

     

    “하앗!”

     

    호쾌한 검격과 함께 헬하운드의 목이 깔끔하게 양단됐다. 쿵! 마물이 쓰러지고 그 앞에 선 리셰가 긴장을 풀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완벽했습니다. 이제 중급 마물 상대로는 더 말씀드릴 것이 없군요.”

     

    “정말요? 아핫, 다 스승님과 기사님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중급 던전 공략에 나선 지도 열흘 차. 점점 자신감이 붙은 리셰는 벌써 능숙한 실력을 보였다.

     

    “마지막 층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던전의 주인 마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주의하시길.”

     

    “네!”

     

    여기만 이겨내면 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리셰는 희망에 부풀었다.

     

    ‘이제 만날 수 있겠다.’

     

    던전 공략 내내 검을 알려주고 든든하게 옆을 지켜준 타냐도 고맙긴 했지만, 리셰는 누구보다 라스가 보고 싶었다.

     

    타냐나 기사들의 백 번의 칭찬보다 라스의 칭찬 한 마디가 더 듣고 싶었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존재라서 그럴까. 고트베르크 선생님은 리셰에게 의미가 컸다.

     

    그가 같이 안 온다고 했을 때는 조금, 아니. 상당히 실망했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는 황녀님의 혼약자이자 주치의이니 자신에게 신경을 덜 쓰는 게 맞았고.

     

    ‘선생님과 약속했어.’

     

    어엿한 용사가 되어 대륙의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 라스가 알지도 못하는 자신의 동네 사람까지 고쳤던 것처럼, 그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를 위해서는 성검을 내 몸처럼 다룰 줄 알게 되어야 한다.

    라스도 도움을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리셰는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음….”

     

    하지만 방금 마물을 베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새하얗게 빛나는 성검의 날을 보면 조금 께름칙해지고 만다.

     

     

    잡다한 생각은 털어버리고 일단 나아간다.

     

    그간 합을 맞춰온 기사들과 수신호와 몸짓만으로 의도를 파악하고 순조롭게 다음 층으로 내려간다.

     

    “포착.”

    “주인, 옥염견, 상급!”

     

    온몸에서 생생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뿜어내는 마물견이 리셰를 맞았다.

    진형을 구축한 기사들이 던전의 주인을 포위하여 빠져나가지 못하게 에워싼다.

     

    “으악!”

    “웬델!”

     

    후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리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두 마리다!”

     

    기사를 덮친 마물견이 한 마리 더 있다. 동시에 포위하던 쪽도 날뛰기 시작했다. 선봉을 맡던 타냐가 그쪽을 맡았다.

     

    리셰는 자신의 역할을 이해했다. 긴박한 처지에 놓인 기사를 돕기 위해 뛰었다.

     

    그의 갑옷이 고열의 불꽃에 녹아내리고, 날카로운 이빨이 심장을 파고들기 직전.

     

    아직은 거리가 조금 멀다. 조금 더 빨리 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필사적인 감각이 리셰의 뇌리에 깃들었다.

     

    “하아앗―!”

     

    전투 한복판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는 없었다.

     

    리셰의 왼손에 새겨진 징표가 번쩍였다.

     

    유난히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새하얀 성검의 칼날.

     

    동시에 무언가가 리셰의 머릿속을 덮쳐왔다.

     

    ―파아악!!

     

    공중을 답보하듯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용사.

    다음 장면, 그녀가 휘두른 성검이 마물견을 기사에게서 떨어트렸다.

     

    “허억, 용사님!”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어 연속동작으로 마물견을 제압하는 용사. 그 듬직한 전투력을 목격한 기사들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명실상부 신통한 능력을 가졌으며, 대륙을 구원할 이가 틀림없다는 확신.

     

    ―쿵!

     

    마물견이 쓰러진다. 반대편에서도 타냐가 한 마리를 제압했다.

     

    “토벌 완료했습니다. 부상자는 의사에게 보고를.”

     

    전투를 마친 기사들이 긴장을 풀었다.

     

    그 한복판, 용사가 마치 성장을 마친 듯한 자세로 서 있다.

     

    기사들은 그런 그녀를 경외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작 그녀의 생각은.

     

    한참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에는 뭔가 달라.’

     

    용사는 성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 다음 회차는 아니야. 악녀와 같이 있던 라스와 만난… 그 시간대지.’

     

    용사.

     

    성검에 저장되어있던 인격 쪽의 ‘그녀’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타냐도 있어. 눈도 멀쩡하고 젊어. 마왕군도 아직인가 봐. 달라. 너무 많은 게 달라. 왜? 어디서 달라졌지?’

     

    그녀가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기억을 정돈하려 애썼다.

     

     

    항상 이런 식이다.

    새로운 시간선에서 눈을 뜨고 나면 혼란스럽다.

     

    그녀가 일어날 수 있는 건 리셰가 성검과 공명했을 때뿐이다.

     

    하지만 모든 시간선에서 그녀의 경험은 성검에 저장된다.

     

    성검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신비.

     

    때문에 그녀는 지옥 같은 전장만을, 세상이 멸망하는 장면을 이미 몇백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멸망까지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공명하지 않은 리셰인 상태로 끝날 때도 있었고, 아예 불려 나오지 않은 시간선도 있었으니.

     

    그녀의 머릿속은 단편적인 기억들로 뒤죽박죽이 됐다. 엉망진창이 될 만도 했다.

     

    그렇다고 깨어날 때마다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신세다.

     

    용사인 자신이 싸우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하니까.

     

     

    아주 가끔은 지금처럼, 전장이 아닐 때도 있었지만.

     

    ‘…라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을 이해해주듯 이야기를 나눌 상대는 그 치유사뿐이었다.

     

    “용사님, 공략은 끝났습니다. 회궁하시죠.”

     

    타냐가 용사에게 말을 걸었다.

    용사는 잠깐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용사님?”

     

    그녀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먼 옛날, 자신이 리셰였던 시절의 기억을 어떻게든 억지로 끄집어내며.

     

    “네, 잠깐 긴장을 놓았었나 봐요. 고생하셨어요.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훗, 지금처럼 의욕만 내주시면 충분합니다. 가시죠.”

     

    타냐가 고개를 까닥였다.

     

    ‘기회야.’

     

    전에 깨어났을 때는 갑작스런 상황에 흥분해버렸다.

     

    타냐의 외모를 보아 아직 마왕군 침공으로부터 대략 5년 전쯤이다.

     

    ‘지금부터 미리 멸망을 유발할 요소들을 제거하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용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선 그 악녀부터.’

     

    그리고.

     

    ‘라스, 너랑은.’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네.

     

    용사는 묵직한 장화를 천천히 내딛다가, 조금씩 발걸음을 가볍게 통통 튀기며 타냐의 뒤를 따랐다.

     

     

     

    ***

     

     

     

    “던전 공략대가 귀환합니다.”

     

    브루노의 보고였다. 타냐와 리셰가 귀환하는 날이다.

     

    나는 아셀라를 본궁 안에서 나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리셰는 내가 먼저 마중하겠다고 했다.

     

    “아,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나를 본 리셰는 방실대며 반갑게 인사했다.

    검집의 성검을 꼭 쥔 그녀는 전사로서 한층 성숙한 모습이었다.

     

    “좋아 보이시는군요. 활약은 미리 서면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헤헷, 기사 여러분들이 고생하셨어요.”

     

    “바로 검사와 진료에 들어갈 텐데 괜찮으시겠지요.”

     

    “아, 네에.”

     

    “그 전에 한 가지.”

     

    내가 눈짓하니 대기하던 월광궁 기사들이 다가와 리셰에게 수갑을 채웠다.

     

    리셰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서, 선생님?”

     

    “난동을 부리지 않겠다는 기아스에 서명하시면 풀어드리겠습니다.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난동이라니요, 제가 갑자기 왜…”

     

    “음, 인사부터 다시 할까요.”

     

    나는 리셰, 아니. 성검의 용사에게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용사님.”

     

    용사가 태도를 싹 바꾸고는 나를 원망하듯 표정을 바꾸었다.

     

    “…어떻게.”

     

     

    ―――――――――――

    No. 010 : 성검 파괴 72% → 99%

    No. 014 : 공명 해제 66% → 2%

    ―――――――――――

     

     

    미안하지만 리셰의 인격이 바뀐 건 모를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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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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