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

   *

     잠시 시간을 돌려 그날 오후의 일이다.

     수업을 마치고 이자벨의 집으로 향하는 길, 이반은 주위에 따라붙은 시선들에 옅은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군부의 견제가 생각보다 노골적이다. 방첩사령부와는 달리 대내첩보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학생들을 이용한 감시가 차라리 과시적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최대한 빠르게 군부와 협상을 마무리해야겠다. 이반은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툭.

     그러던 중, 한 학생이 다가와 부딪치려 시도했다. 눈에 뻔히 보일 정도로 과감하게.

     이반은 재빨리 손을 뻗어 달려드는 학생의 이마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단검을 꺼내 학생의 목젖에 붙였다.

     “뭐지.”

     “어, 저, 어어…?”

     여학생은 당황한 얼굴로 멈춰섰다. 이마를 붙잡은 큰 손 너머로, 이반의 얼굴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선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리고 시선이 또르륵 내려가자 보이는, 차가운 단검의 날. 학생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소니야 블라고미노브나 보그닌. 누가 보냈나.”

     “누, 누, 누가 보내다뇨…? 그보다 제, 제 이름을 아세요?”

     “내가 학생의 이름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하, 하지만 학년도… 수강 신청한 적도 없는데…요?”

     “그건 상관없다. 발리카 백작인가. 아니면 볼로노빈 대공이 직접 보냈나? 보그닌 남작가는 왕녀파에 속해 있었을텐데. 북방귀족이라 포섭하기 쉬웠나.”

     “그게 무슨…?”

     소니야라고 불린 학생은 혼란에 빠진채 어버버 거렸다. 이반은 그 모습을 내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연기라면 너무 자연스러워서, 훈련 상태가 나잇대에 걸맞지 않을 정도였다.

     “그, 그냥 옷이 젖었으면 수, 수선을 해주려 했어요…!”

     “옷이 젖어? 흠.”

     그 말에 시선을 돌려보니, 덜덜 떨리는 손 안에 커피가 꽉 쥐어 있었다.

     이반은 단검을 까딱여 여전히 소니야의 손에 잡혀 있는 커피를 빼앗았다. 적당히 식은 커피에선 좋은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소니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잔을 들어 살짝 입술을 적셨다. 입술 끝에 묻은 미량의 커피를 혀로 핥으며 잠시 입에 머금었다.

     피부에 쏟으려 시도했다는 말은 곧, 독소가 표피접촉으로도 침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란 뜻일텐데, 정작 후각과 미각에선 독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독 시도는 아니었나. 그럼 왜 옷에 커피를 쏟으려 한거지. 정신착란인가?

     “바른대로 말….”

     “아저씨—!! 멈춰!!”

     그의 뒤에서 빽, 소리가 울렸다. 이반은 자세 그대로 시선만 돌려 이자벨을 찾았다. 과연, 머지 않은 곳에서 이자벨이 쿵쿵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헐레벌떡 달려와 이반의 손을 툭 쳤다. 곧장 소니야의 옷을 털어주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선배, 저 미치광이한테 그냥 얼굴만 보고 달려들면 어떡해요! 죽고 싶은 거에요?!”

     “너, 너는….”

     “1학년 이자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빨리 도망쳐요! 고문실에 끌려 가기 전에!!”

     이자벨은 호들갑을 떨며 소니야를 보냈다. 상관없었다. 이목이 끌린 상황에서 귀족 여식을 납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건 저 여자의 인적사항과 동선은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지금 어디서 몰래 납치하려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요!”

     “음.”

     “음이 아니라! 진짜 미쳐버리겠어. 수염을 다시 기르게 하던가 해야지! 피해자가 얼마나 더 나올까. 불쌍한 사람들 정말…. 그냥 좀 친해지자고 하는 거잖아요! 왜, 남자들끼리 어깨를 좀 부딪치면서 하는 것처럼!”

     “그런 짓을 하면 죽는다.”

     이유 없이 시비를 걸 때에는 상대에게 도끼나 권총이 있는지 살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커피를 타인에게 쏟으면서 사교 행위를 시도한다는 뜻인가? 그런 상식은 크라실로프 인생 30년을 통틀어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이자벨은 이반의 말에 가슴을 쿵쿵 치며 다가왔다.

     “아무튼!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저 선배는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니까 괜히 꿍해서 뒷조사 같은 거 하려 하지 말고요.”

     “뒷조사는 이미 끝냈다.”

     그저 대면조사가 필요할 뿐이다.

     “돌겠네.”

     이자벨은 투덜거리며 이반의 앞에 섰다. 그녀는 이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 쯤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말했다.

     “저, 저녁까지 시간 좀 남았는데… 시, 시험 범위나 더 알려주던가요. 밥값으로.”

     “나는 학생 개개인에게 수업 성적을 위해 부정한 대가를 편취하지 않는다.”

     “진짜 돌겠네.”

     이자벨의 입에서 으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냥 아무나 납치해서 고문하면서 시간이나 보내던가요!! 이따 저녁에 와서 밥을 먹든지 말든지!”

     “음.”

     이자벨은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반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저 나이대 학생들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는 곧 학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매일매일 직접 보고하라는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소니야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꾹 움켜쥐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화장실로 뛰어가 몇 차례 찬물을 얼굴에 끼얹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 귀기가 어린 새파란 눈동자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름에 잠겼다. 아버지, 보그닌 자작의 밀명을 실패하고 말았다.

     셔츠에 커피를 쏟고, 보상을 명목으로 조금씩 다가가려는 시도…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실수, 귀여운 사고, 딱 정형화된 그 정도의 수작이다.

     “다, 다섯 명이 모두 실패하는 게 말이 되는 일이야…?”

     볼로노빈 대공의 일그러진 얼굴을 떠올리면 오금이 저렸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화장실을 떠났다.

    *

     학장실에 도착한 이반은 곧장 손을 들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대로변에서 여학생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을 했다지.”

     “아닙니다.”

     “보고가 잘못 들어왔나.”

     “협박이 아니라 진술 유도였습니다.”

     “잘못 들어온 건 보고가 아니라 상식 쪽이었군. 본인이 실수했네.”

     엘리자베타는 허탈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반이 팔을 내리고 소파에 앉자, 그녀는 미간을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카, 조금 진정하는 것은 어떤가.”

     고작 이틀이다. 저 사내가 이 대학에 복귀한 것이 고작 그 정도의 기간이다.

     그 기간동안 다섯 명의 학생이 같은 수모를 당했다. 전원이 여학생, 그리고 전원이 ‘사소한 계기로 안면을 다지려 시도’했던 결과였다.

     그 전까진 그렇지 않았다. 이반이 교편을 잡은 짧은 시간 동안엔, 수업 방식이 과격할지라도 수업 외적으로 학생을 직접 건드린 적은 없었다.

     수염을 밀어서—.

     그 시점에서 엘리자베타는 이반의 턱을 한차례 바라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절대 그것 때문은 아니야.’

     잠깐 떠오른 나쁜 생각을 재빨리 물리쳤다.

     물론 학생들의 접근 자체는 외모의 변화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반의 반응이 유난히 날이 선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리라.

     “에타크리히 대공의 죽음은 본인 또한 유감이네.”

     “…예, 전하.”

     “애도를 하는 것은 이해하네. 평생에 걸쳐 한다 하더라도 이해하고도 남음이야. 하지만 타인에게 날을 세우지 말았으면 좋겠군. 본인은, 반카. 그대가 더 사회에 잘 녹아들었으면 하고 있네.”

     “예, 전하.”

     전혀 납득한 표정이 아니라서, 엘리자베타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었다.

     “교류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는 들었네. 몇몇 학생들은 틸레스에 함께 동행하기도 했고. 그대가 보기에, 그들이 당대의 용사들인가?”

     “그렇습니다.”

     “그 아이들을 가르칠 생각이고?”

     “예, 전하.”

     “쓰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겠고.”

     “예, 전하.”

     엘리자베타는 테이블을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마왕이 도래하나?”

     맥락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모든 풍문, 소문, 낭설, 그리고 루머까지 모조리 수집해서 보고 받는 인물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대내첩보에 우수하다는 크라실로프 방첩사령부의 수장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조차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이반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눈 앞의 사내는 엘리자베타의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결코 용사파티를 상식의 선에서 재단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반은 무언가 말하지 않은 계획이 있는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면 알 필요 없다는 뜻이겠고, 그런 판단은 아마도 그조차도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거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엘리자베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경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 본인이 그대의 부족한 확신이 되어주겠다. 자원이 필요하다면 왕궁 보물전을 열어도 좋다.”

     “전하…!”

     가만히 듣고 있던 시종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타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두 나라를 구한 영웅에게 필요한 바가 있다면 그 정도가 대수로우랴. 반카가 사적인 이득을 챙기는 자였다면 애초에 틸레스에서 목숨을 걸었겠느냐.”

     “하오나 대신들의 반발이….”

     “호오.”

     엘리자베타는 시종의 말에 비릿하게 웃었다.

     “대신들의 반발이 본인의 뜻보다 두려운가.”

     “아, 아, 아닙니다, 전하!!”

     “본인이 죽으라 명할 때 목을 들고 있을 자가 아직 크라실로프에 남았던가. 몰랐군.”

     창백하게 질린 시종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감히 입도 열 생각을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가. 나가보아라. 충분히 쉬고 돌아와라.”

     “사, 사, 살려주세요, 전하!”

     “쉬라 했는데 무슨 소린가. 본인은 수족을 참할 때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시종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며 학장실을 벗어났다. 잠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던 이반이 입을 열었다.

     “누구 쪽에 붙었던 여식입니까?”

     “죽은 이곤 백작의 딸이다. 내 못난 오라비의 수족 중 하나였지.”

     “이곤 백작. 궁내부 의전관… 남은 잔당이 있습니까?”

     “궁내부 전원을 참수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저 여식을 보살피는 것 하나만으로도 궁내부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엘리자베타는 가볍게 웃었다.

     왕세자파 귀족들은 대부분 행정귀족들이었다. 이들 전원을 잘라내면 당연히 나라의 행정 체제가 마비되고 만다.

     따라서 핵심적인 인물 몇몇을 제거하고, 그 아래에서 활동하던 꼭두각시들은 고스란히 품고 가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가벼운 충성 서약 정도로는 불안하다. 알렉산드르의 영향력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그러니 저들에게 경고와 회유를 동시에 하는 편이 좋았다.

     그런 의미였다. 죽은 의전관의 딸을 바로 곁에 세워 두는 것은.

     이반은 작은 감탄 속에 고개를 숙였다.

     “볼로노빈 대공이 프리첸카야로 오고 있다 하더군.”

     “충성 서약을 뒤늦게 하는군요.”

     “그것이 충성 서약이겠느냐. 몸값을 제대로 정산하겠다는 뜻이겠지.”

     엘리자베타는 삐뚤게 웃으며 일어섰다.

     “반카, 그대가 처리해줄 수 있겠나.”

     “볼로노빈 대공을 죽이면 1군단의 제어가 어려워집니다.”

     “…아니, 누가 죽이라 했나. 대체 왜 다들 본인이 무슨 말만 하면 죽이네 마네, 살려주네 마네. 그런 험한 말을 하는 건가. 그냥 그대가 대신 나가 협상을 마무리하고 오란 말이었네. 최대한 오붓하게, 온화하게. 할 수 있겠는가?”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이반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일어섰다. 슬슬 저녁이었다.

     용사 파티에게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전달해야 했고, 교육 스케줄을 정리해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아주 오랜만에 이자벨의 요리들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꾸벅 인사를 올리고 학장실을 빠져나갔다.

     “후, 후후….”

     그를 내보낸 뒤, 홀로 남은 학장실에서 엘리자베타는 음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공과의 협상에 이반을 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대내적인 창구에 꾸준히 이반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것으로….

     모든 귀족들에게 알려지도록.

     이 사내는, 엘리자베타의 것이라고.

     이 몸의 남자라고, 가장 믿고 있으니 가장 중요한 자리에 대신 파견하는. 향후 이 나라의 군왕이 되고 난 뒤엔 국서로 책봉될 사내라고.

     그녀는 테이블 위, 이반에게 보이지 않게 가리워졌던 서류철을 뒤적이며 웃었다.

     용사 파티의 신상명세가 나열된 보고서였다.

     이자벨, 에시디스, 엘피헤라… 최소한 이 셋은 반카에게 일정 이상의 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크라실로프의 주인에게서 보물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그녀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보다, 원하는 것을 가로채는 것에 더 익숙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

     “많이 들어요!”

     이자벨은 테이블 가득 요리들을 올리며 방실방실 웃었다. 이반이 포크를 쥐는 모습도, 수저로 스튜를 떠먹는 모습도 너무 재밌어서 시선을 돌리기 어려웠다.

     와 진짜 너무 재밌네. 하는 것만 봐도 막, 응. 마음이 뿌듯해지고.

     “어르신… 수염… 없어… 왜…?”

     룬디스는 울먹이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행복해졌으니 행복의 총량을 계산한다면, 전체적으로 모두가 즐거운 자리라 하겠다.

     묵묵히 수저를 움직이던 이반은, 입가를 가볍게 닦아내며 좌중을 훑었다.

     이젠 이 꼬마들에게 현실을 알려주어야 할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