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59

       솨아아아-

       

       하늘에서 내리는 장대비의 두껍기 그지없는 빗줄기가 전신을 차갑게 적셨다.

       

       싸늘해진 그녀의 눈을 손수건으로 덮어주곤 허리를 일으켜 나무에 기댄 형태로 자세를 바꿨다.

       

       빌어먹을 성녀와 추종자들을 죽이고 오면 그녀의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다.

       

       그 후,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두에게 알려줄 것이다.

       

       기구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고.

       

       모두에게 새겨줄 것이다.

       

       처음부터 비극이 정해진 사람이 있었다고.

       

       “…….”

       

       투둑투둑. 투둑투둑.

         

       장대비를 맞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죽인 모두에게 심판을 내릴 시간이다.

       

       전신에 오러를 담아 강화. 비가 내리는 탓에 후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빼고, 시각과 청각을 집중적으로 강화했다.

       

       「대체 왜…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소미레, 그 여자는 살려두면 안 됐어.」

       「어차피 사형이었어. 시일을 앞당겼을 뿐이지.」

       「우리는 그저 심판을 내린 것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대화가 멀리서 들려온다. 방향을 확인한 나는 바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박. 투두둑. 사박. 투두둑.

       

       수풀을 밟으며 나아가는 소리와 두꺼운 장대비가 쏟아지는 소리.

       

       물에 젖은 흙의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만, 내 몸 속 안에서 들끓는 증오를 없애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걸음을 더 내디뎠을 땐.

       

       “소미레, 방식이 과격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너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우린 그저 너만을 위한 선택을 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성녀를 비롯한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대화는 들을 필요가 없는 거 같아 청각 강화는 멈췄다.

       

       “…….”

       

       눈을 얕게 뜨고 앞으로 내가 죽일 그들의 신상을 상기했다.

       

       제국의 황태자, 레제프 페델리안.

       

       페르시아 공작가의 후계자 카서스 페르시아.

       

       프라이덴 후작가의 아실 프라이덴.

       

       프레이아 백작가의 셀다스 프레이아.

       

       출신을 알 수 없는 카자르 유플레인.

       

       소드 마스터가 둘, 마스터 어쌔신이 하나, 초위 마법사 하나. 아실 프라이덴은 내정이 특화된 놈인지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준비가 끝난 나는 수풀에서 나왔다.

       

       사박. 사박.

       

       “누구냐!”

       “소미레, 내 뒤로.”

       “검은 머리에 금안?”

       “진 바렌베르크군.”

       “하, 그 마녀의 심복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레제프 페델리안은 고개를 뻣뻣이 세우며 나를 굽어왔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주인을 놔두고 어딜 다녀왔나?”

       “…….”

       “살려달라고 애원하진 않더군.”

       “…….”

       “뭐, 자기도 죽을 죄를 지었다는 건 알았겠지.”

       

       나는 그저 눈을 얕게 뜬 채 살기를 내뿜었다. 순간적으로 움츠러든 레제프가 검을 뽑았다.

       

       “다들, 전투 준비해.”

       “알겠다.”

       “네 마음대로 명령하지 마라.”

       

       카자르 유플레인의 양손에서 마법이 전개되고 두 소드 마스터가 검을 뽑았다. 셀다스 프레이아는 은신으로 사라진 지 오래. 아실 프라이덴은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는 건가.

       

       “이곳에서 너희들을 전부 죽이겠다.”

       “하, 그 망할 마녀의 노예 새끼가 어딜 가서 이제 오나 싶었더니만, 복수하러 온 거였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다. 단체로 덤벼라.”

       

       레제프는 픽 웃으며 검날을 세웠다.

       

       “성격도 급하군. 다들 소미레를 지켜!”

       

       전방에서 두 소드 마스터가 달려들고 지척에선 마스터 어쌔신이 단검을 투척한다. 카자르 유플레인은 모두의 공격을 보조하는 역할.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너희들이 죽으면, 대륙은 멸망할 거다.”

       

       우웅!!! 온몸의 혈류가 세차게 돌며 오러가 개방된다. 새하얀 불꽃이 전신을 불태우며 그 어떤 때보다 강하게 일렁였다.

       

       “무슨…!”

       “겁먹지 마, 오러의 크기가 전부는 아니다!”

       “하, 누가 겁을 먹었다고.”

       “다들 집중하세요!”

       

       이걸 보고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다니. 역시 성녀를 추종하는 저 남자들은 지능이 낮은 게 틀림없다. 아니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불사지르는 그런 건가? 웃기는 놈들이다.

       

       저벅. 쿠구구궁! 저벅. 쿠구구궁!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면에 진동이 일었고, 대기가 무거워져 중압감에 짓눌렸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납작해지고 있다.

       

       “…말이 안 되는 힘이군.”

       “다들 집중해라, 놈은 왕국의 재앙이다!”

       “소미레! 우리에게 축복을!”

       

       뒤에 있던 성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망설이는 듯했지만…….

       

       “소미레! 어서! 여기서 하지 않으면 전부 죽어!”

       

       마지못해 모두에게 축복을 내렸다.

       

       전신이 황금으로 빛나며 보호막까지 생겨났다. 성녀의 축복이니 말도 안 되는 힘을 발휘하겠지.

       

       다시 봐도 좋은 조합이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나는 검날을 세운 채 폭발하는 오러를 한곳에 담았다.

       

       우우우웅!!!

       

       거대한 진동과 함께 빛나는 순백의 오러가 초신성처럼 빛났다.

       

       “편히 보내주고 싶진 않지만, 내가 인내심이 부족해서.”

       

       후웅! 종베기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과과과과──!

       

       압도적인 밀도를 자랑하는 소멸의 오러가 대지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초인적인 반응으로 빠져나간다 해도 다리 하나는 내줘야 할 것이다.

       

       콰과과광─!

       

       오러의 검기가 그들에게 충돌하고 거센 폭발을 일으켰다. 흚먼지가 비산하며 시야를 가렸다. 이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턱!

       

       “무슨…!”

       

       내 감각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으니까.

       

       “셀다스, 너에게 절망을 보여주겠다.”

       

       푸욱! 급소를 피해 찔렀다. 출혈량이 많지도 않고 목숨을 잃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커흑…!”

       

       복부를 잡으며 뒤로 물러서는 셀다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검을 휘둘렀다.

       

       스가가가각!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두른 검격이 셀다스의 다리 근육을 모두 베어냈다. 이것으로 이놈은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얌전히 지켜봐라. 그녀의 지옥을, 원망을, 절망을 너희들에게도 안겨줄 테니까.”

       

       그리 말하곤 목표물을 옮겼다. 신체 능력이 비교적 떨어졌던 카자르 유플레인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반 토막. 성녀를 포함한 다른 놈들은 무사히 도망쳤군.

       

       “…….”

       

       솨아아아. 장대비가 워낙 거세게 내려 소리도 듣기 힘들고 후각을 맡을 수 없다. 하지만…….

       

       ‘저기있군.’

       

       빗줄기에 흘러 떠내려오는 피는 숨길 수 없었다.

       

       “여기서 뭐하나?”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는 카서스 페르시아와 레제프 페델리안. 그들의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변했고,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두려운가?”

       

       저벅. 걸음을 내디뎠다.

       

       “절망적인가?”

       

       저벅.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넋을 잃은 레제프가 중얼거렸다.

       

       “미쳐버렸군…….”

       

       인제 보니 카서스의 두 다리가 잘려있고, 레제프는 한쪽 팔을 잃었다. 지혈은 끝마쳤지만, 둘 다 전투 불능. 다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스가가가각!

       

       “크아아악!”

       “커헉!”

       

       놈들이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은 다 잘라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빨리 해야겠군.’

       

       놈들이 죽기 전에 보여줘야 한다.

       

       그녀가 바라봤던 세상을, 느꼈던 절망을, 가져야만 했던 원한을.

       

       투둑투둑. 사박사박. 투둑투둑. 사박사박.

       

       ─소미레, 여기서 벗어나야 해!

       ─제가 있다면 치료할 수 있어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멍청한 아실 프라이덴. 이때를 노려서 성녀를 독차지하려는 생각인가. 쓰레기들의 총집합이다.

       

       다리에 오러를 담아, 콰과광! 돌풍을 일으키며 단번에 이동했다.

       

       “허억…!”

       “…!”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피로 물든 나를 바라보는 성녀와 아실. 나는 둘의 뒤로 이동해 목덜미를 잡은 채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철푸덕!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크흑…!”

       “흐윽!”

       

       우선은 아실이다.

       

       스가가가각!

       

       빠르게 휘두른 검격에 아실의 다리 근육이 모두 절단되었다.

       

       “크아아악…!”

       “제가, 제가 치료를…!”

       

       아실을 향해 팔을 뻗는 성녀. 나는 그녀의 팔을 잘라냈다.

       

       스각!

       

       “어…?”

       

       절단된 두 팔을 바라보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본다.

       

       “재생해라. 쓸데없는 짓거리는 하지 말고.”

       

       두려움에 빠진 성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무치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신성력으로 자신의 팔을 재생했다.

       

       “모두들 거기서 잘 지켜봐라.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나는 성녀의 목덜미를 잡고 높게 들어 올렸다. 압도적인 살기에 짓눌린 그녀는 바짝 경직되어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을 뿐, 입도 뻥긋 못했다.

       

       “너희들은 공녀님에게 자비 없는 죽음을 선사했더군. 전신이 검으로 난도질당해 있고, 두 눈이 파여있었다.”

       

       나는 성녀의 눈가에 손을 올렸다.

       

       “이건 그녀가 느꼈던 고통이고.”

       

       푹! 콰드드득! 한쪽 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대로 뽑아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악!!!”

       

       장대비가 내리는 숲속에서 울리는 성녀의 비명. 프란체의 추모곡으로 나쁘지 않다.

       

       “소미레!!!”

       “그만둬, 이 미친 새끼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제발 멈춰! 소미레의 고통은…!”

       

       그들이 뭐라 하건 말건 나는 멈추지 않고 내 할 일을 했다.

       

       “이게 그녀가 느꼈던 증오다.”

       

       푹! 콰드드득! 남은 한쪽 눈도 뽑아버렸다.

       

       “아아아아아악!!!”

       

       툭. 뽑은 눈깔을 바닥으로 던져버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그녀가 느꼈던 절망이다.”

       

       성녀의 어깨를 잡은 뒤 팔뚝을 잡아 손목에 힘을 주자 뼈가 으스러졌다.

       

       “꺄아아아악!!!”

       

       성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른다. 꽤 듣기 좋은 울림이었고, 저들의 표정이 절경이었다.

       

       “제발 그만둬!”

       “차라리 나를 가지고 하란 말이야!”

       “소미레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소미레…!”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악마로 보이나?”

       

       웃기는 놈들.

       

       “우리에게 있어선 너희들이 악마였다.”

       

       쓰레기 같은 놈들.

       

       “나도 너희들과 똑같아. 그러니 할 일도 똑같아야겠지.”

       

       푸슈우욱! 성녀의 팔을 찢어 뽑아내자 곳곳에 피가 뿜어졌다.

       

       “아… 아악…! 아…!”

       

       바르르 몸을 경련하는 성녀. 쇼크로 인해 기절인가. 이러면 쓸모가 없어지는데.

       

       철퍽! 나는 들고 있던 성녀를 집어던졌다. 마무리를 위해 발로 내려찍으며 경추를 박살 냈고, 머리를 뽑아내 그들의 앞에 던져버렸다.

       

       툭. 데구르르.

       

       “아, 아아… 아아아…!”

       “무슨 짓을…….”

       “…이게, 이게 대체!”

       “이 미친 또라이 새끼가!!!”

         

       다들 충격으로 인해 공황에 빠졌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소미레는 잘못이 없었단 말이야…!”

       “미친 새끼가…….”

       “이게 무슨…!”

       “왜 우리에게 하지 않고 소미레에게…!”

         

       원망과 증오가 가득 담긴 눈빛.

       

       저들의 말대로 성녀는 잘못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잃었고, 유일한 안식처마저 잃었다.

       

       나는 그저 내가 느낀 걸 똑같이 보여줄 뿐이다. 내게 자비를 바라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두 눈깔이 빠진 성녀의 머리를 보며 천천히 죽어가라.”

       

       검을 휘둘렀다. 스가가가각!

       

       “커흐억!”

       “허억!”

       “크아아악!”

       “으아아아아!”

       

       일부러 급소만 피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라 과다 출혈을 막을 수도 없겠지.

       

       “천천히 분노를 느껴라. 증오를 새겨라. 원한을 품어라. 그리고 죽어가라.”

       

       휙. 걸쭉한 피가 묻은 검을 털어내며 검집에 집어넣었다.

       

       “너희들이 죽어도 재앙은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를, 생명체를 몰살할 거다.”

       

       모두에게 보여주겠다.

       

       그녀가 바라봐야 했던 세상을, 느껴야만 했던 분노를, 가져야만 했던 증오를, 품어야만 했던 원한을.

       

       이 세상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리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