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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세린 씨는 아직도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름을 불러봐도 소리를 질러봐도 심지어는… 뺨을 때려도 이 설에게만 관심을 주고 있어요…”

         

        이세린.

         

        박지원은 이세린을 걱정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고.

         

        갑작스럽게 고문을 자원하고.

         

        갑작스럽게 정신이 나가버린.

         

        이세린을 그녀는 걱정하고 있었다.

         

        “심각하군요…”

         

        “… 시현 씨는 뭔가 아는 게 있나요…?”

         

        “아는 건 아니지만… 예상 가는 건 있습니다.”

         

        “뭐, 뭔가요?”

         

        다급한 박지원의 눈동자.

         

        알려준다고 해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 뻔했지만, 이시현은 그 눈동자를 보고서도 무시를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되지 않았다.

         

        “일부 성좌들… 이 계약을 매개로 대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세린 씨는 성좌와 계약하면서 그 대가에 노출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그 대가라고 하면…?”

         

        “그것까지는 제가 알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래도 원인으로 보이는 게 뭔지만 알아도 마음은 편해지니까요…”

         

        그리 말하는 박지원의 표정은 전혀 편하지 않아 보였다.

         

        분명 해결될 겁니다.

         

        괜찮아질 겁니다.

         

        그따위 말은 하지 않았다.

         

        절망에게 주는 불확실한 희망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었으니까.

         

        “시현 씨는… 계약하신 성좌가 있나요…?”

         

        말을 돌리는 박지원.

         

        이시현은 그녀의 행동에 어울려줬다.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계약을 빌미로 대가를 요구하는 성좌가 하도 많아서 신중하게 고르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물론.

         

        정확하게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숨은 기억의 회고자’가 당신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숨은 기억의 회고자’가 다만 이 계약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말합니다!]

         

        [‘숨은 기억의 회고자’가 보상은 정당함 그 이상일 것이라 성좌의 진명을 걸고 말합니다!]

         

        이번 회차가 시작되고 가장 처음부터 자신에게 계약을 걸어온 성좌.

         

        ‘숨은 기억의 회고자…’

         

        이 성좌는.

         

        회귀를 거듭한 그녀가 완전히 처음 보는 성좌였다.

         

        “망할…”

         

        나비효과.

         

        “네? 시현 씨 방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 상황이 정말 힘들어서요.”

         

        “하하… 그쵸 힘들죠… 많이 힘들긴 한 것 같아요… 로봇같던 시현 씨도 힘들어하시는 걸 보면…”

         

        그리 말하는 박지원의 눈은 이세린을 향해 있었다.

         

        이 설의 옆에 붙어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는 이세린.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굳이 찝지는 않았다.

         

        아픈 곳을 건드려 봐야 나아지는 건 없었다.

         

        “제가 로봇같습니까?”

         

        “하하… 모르셨나 보네요.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막 시현 씨 보고 지치지도 않는 기계라고 하던데요.”

         

        “제가 몬스터를 너무 많이 잡았나 보군요…”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밤에도 매일 보초를 서주시잖아요. 맨날 탐사도 나가고, 지금도 선두에서 미로를 헤쳐 나가고. 범죄자들 마주쳤을 때는 먼저 나서서 물리치셨잖아요.”

         

        “낯 뜨겁군요.”

         

        “표정 변화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그렇고요. 어떻게 보면 시현 씨는 주인공 같아요.”

         

        “주인공이요?”

         

        “네. 모두를 이끌어주는 것도 그렇고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남들을 지켜주려고 최대한 노력하시잖아요.”

         

        “… 그런 거라면 강아현 씨도 있지 않습니까.”

         

        “아현 씨… 그쵸 아현 씨도 그렇죠. 두 분은 참 멋지신 것 같아요. 자기 사람도 잘 지키시는데. 저는…”

         

        내뱉지 못한 박지원의 뒷말이 예상이 갔다.

         

        아마 이세린이 저렇게 된 것이 자기 탓이라고 여기는 모양.

         

        이해는 한다.

         

        착한 성품을 가졌던 그녀가 살인에 고문에 마다하지 않고 저지르다 미쳐버렸으니까.

         

        이시현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침묵을 고수했다.

         

        이게.

         

        최대한의 위로였다.

         

        “시현 씨! 이제 준비 다 됐어요! 이리 와서 마지막으로 점검해 주세요!”

         

        그렇게 잠시 동안 가만히 있자니 들려오는 강아현의 목소리.

         

        곧.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

         

        “이제 갑시다.”

         

        “시현 씨.”

         

        이시현은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이렇게라도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사망 플래그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여기 빠져나가면 무조건 술 한 잔 마셔요. 같이.”

         

        “… 그러죠.”

         

        그녀의 속마음이 이해됐다.

         

        그녀는.

         

        새로운 친구가 필요한 것이었다.

         

        이세린이라는 친구가 무너졌으니, 새롭게 의지할 존재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게 나고.

         

        그렇게 꽂아버린 사망 플래그.

         

        하지만.

         

        그녀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지난 523회차 동안 끝까지 살아남아 버텼던 이들 중 하나인 그녀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었다.

         

        비록 안될 것 같더라도.

         

        회귀자인 내가 그리 만들면 되니까.

         

        ***

         

        주변이.

         

        어두워졌다.

         

        무슨 이상한 공간에 새롭게 발을 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 헤헤…”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여자 때문이었다.

         

        아.

         

        아으.

         

        어떻게.

         

        어떻게 하지.

         

        무서운.

         

        아주 무서운 여자.

         

        검은 단발 머리와 붉은 머리보다 더 무서운 여자.

         

        아주.

         

        아주.

         

        나쁜 사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서웠다.

         

        너무 무섭기는 했다.

         

        내 목을 조르고 손톱을 빼냈으니까.

         

        너무.

         

        너무 아팠다.

         

        지금도.

         

        너무나도 아픈 것 같았다.

         

        분명 치료를 해준 것 같은데도.

         

        너무 아팠다.

         

        그래서.

         

        내 옆에 있는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

         

        저리 갔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내가 어디론가 가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포대.

         

        포대를 다시 달라고 할까?

         

        차, 차라리 포대를 쓰고 맞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때는 오줌을 지리지는 않았으니까.

         

        나이가 40이 넘어가는데 오줌이라.

         

        내 꼴 정말 웃겼겠는 걸.

         

        이히히.

         

        그래도 다행인 건, 10개를 다 뽑은 것 같은데 두세 번 정도는 기절해서 아픈 걸 잘 못 느꼈던 것 같다.

         

        앞으로 아픈 일 있을 때는 기절했으면 좋겠다.

         

        그게 덜 아프니까.

         

        그래도 사람이 노하우라는 게 쌓이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아파보니까.

         

        많이.

         

        많이 아파보니까.

         

        새롭게 생긴 노하우로 어떻게든 덜 아프려고 하잖아.

         

        히히.

         

        근데 내가 뭘 말하려고 했더라…?

         

        아아 맞다 나쁜 사람.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손톱이 뽑힐 때 시야가 몇 번 번쩍거린 이후로 머리가 잘 안 돌아갔다.

         

        어.

         

        음.

         

        아파서 그런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를 제일 아프게 한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나쁜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독심을 사용해서 그녀의 생각을 읽어본 결과, 그녀는 강간당할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이기기 위해 나를 사용한 것 같다.

         

        내가 강간 범죄자라서 그런가?

         

        음.

         

        내가 그렇게 심한 범죄를 저질렀었나?

         

        어.

         

        아.

         

        그렇네.

         

        나, 나는 범죄 안 저질렀었지 맞다.

         

        나이가 계속 들고 공부 못 해서 멍청하다 보니까 기억하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거 맞겠지?

         

        잘 모르겠다.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과정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도 아픈 사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

         

        음.

         

        그 덕에 세린… 씨? 가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그래도 다행인 거 아닐까?

         

        음.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한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좋은 일 아닐까?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한테 도움을 준 적이 많이 없어서 말이지.

         

        맨날 피해만 끼치지, 누구 슬프게나 하지.

         

        아.

         

        으.

         

        잘 모르겠다.

         

        그래도 세린 씨는 나를 아프게 한 거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그런 것보단 좋은 거 아닐까?

         

        자기 잘못에 반성할 줄 아는 거.

         

        이게 된다면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처음에는 법정에서 안 그랬다고 강하게 외쳤으니까.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증거도 다 명확하게 있는데.

         

        CCTV에도 아민이랑 같이 있던 게 찍혔는데.

         

        왜 반성도 안 하고 억울하다 그랬지?

         

        어.

         

        음.

         

        나는 나쁜 사람인 건가?

         

        아아.

         

        나는 나쁜 사람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벌 받는 거구나.

         

        그렇지.

         

        11살 짜리 어린애를 강간한 뒤에 잔인하게 죽이고 시체를 토막 내 유기 했으니까.

         

        어?

         

        그러면 이것보다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너무너무너무너무.

         

        너무 나쁜 짓을 했는데?

         

        어어.

         

        어떻게 하지?

         

        나, 난 나쁜 사람인데.

         

        너무 큰 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지?

         

        어어…

         

        아민이.

         

        아민이한테 너무 미안한데…

         

        아, 아니야.

         

        기회는 더 있을 거야.

         

        더 벌 받을 기회가 있을 거야.

         

        지금도 이렇게 무서운 벌을 받고 있으니까.

         

        분명 나는 내 죄를 뉘우칠 기회가 있을 거야.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렇겠지?

         

        그런 거 맞겠지?

         

        어.

         

        음.

         

        잘 모르겠다.

         

        히히.

         

        [지킬 거야… 지킬 거야…]

         

        옆에서 아까 전부터 이 생각 만을 반복하는 그녀.

         

        지금도 너무 무서웠지만.

         

        토가 나올 것 같고 머리가 뜨거워질 정도로 무서웠지만.

         

        그래도 내가 벌 받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나아졌다.

         

        히히.

         

        ***

         

        튜토리얼을 클리어 할 것 같은 곳에 들어왔다.

         

        만약 여기서도 몬스터나 다른 위험한 것들이 튀어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세린.

         

        그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로지 목적 하나.

         

        이 설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지금 생각의 전부였다.

         

        파르르르.

         

        그녀가 옆으로 더 다가갈 때마다 몸을 떠는 이 설.

         

        그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망가뜨린 그의 모습에 가슴이 쑤셔오듯 아팠다.

         

        자신이 각인해 준 공포.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며 기뻐하던 자신이 각인해준 공포.

         

        그 산물이 그녀에게 까지 느껴졌다.

         

        죽은 눈.

         

        오른쪽 눈은 조금씩 하얗게 변해가는 듯 했고, 왼쪽 눈은 생기를 잃어갔다.

         

        그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어떻게든 끊임없이 사과해 보려 하지만.

         

        소용은 여전히 없었다.

         

        지금은 위험한 곳.

         

        언제 어디서 아프게 하는 것들이 나올지 모른다.

         

        그걸 대비 해서라도 이 설을 지켜야 했다.

         

        그게.

         

        그게 내가 속죄하는 유일한 길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더욱 불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복구 완료: 2Y 11M 16D 4H 58M]

         

        시야 한 구석에 띄워져 있는 작은 메시지.

         

        3년 가까이 남은 알 수 없는 카운트 다운.

         

        복구.

         

        그 단어는 이제 잊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기억의 복구 이후, 지금의 내가 이렇게 됐으니까.

         

        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프게 한 그에게 용서를 빌 기회가 생긴 거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건, 아직 이 복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더, 더 무슨 숨겨진 기억이 있는 건가?’

         

        그녀는 제발 이 기억이 별 기억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녀는 제발, 이 기억이 이 설에 관한 기억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래야.

         

        그래야.

         

        어떻게든 용서를 빌 처지라도 되니까.

         

        만일, 이 기억이 이 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한 기억이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리 간절하게 빌며 그녀는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칼로 베어냈다.

         

        “캬아악!!!”

         

        스걱.

         

        이 설을.

         

        내가 망가뜨린 그 인형을.

         

        지켜내야 하니까.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약스포)

    주인공은 더 망가져야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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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gret of the Regressor Who Killed Me 523 Times

The Regret of the Regressor Who Killed Me 523 Times

나를 523번 죽인 회귀자가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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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being falsely accused of being a sex crime murderer and serving time, I was summoned to another world. There, I awakened the ability to read minds and found out there was a regressor. But that regressor was regretting something about me. Why is he acting this way towards me? I don't un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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