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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알현이 끝나자, 이제 따로 남는 일정은 없었다.

        ​

        부모님도 딱히 나를 집으로 부르지 않으셨고, 원래는 알현만 끝나면 아직 시간이 남았을 때 제국 너머 동부로 갈 생각이었기에 누군가의 의뢰를 받거나 해둔 것도 없었다.

        ​

        그리고, 그건 시간이 넘쳐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

        구태여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기에 바로 황후와 연관된 사람들을 파악하러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

        하지만 계획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

        “후후.”

        ​

        “…그렇게 즐거워?”

        ​

        “네, 그렇답니다. 언제나 이런 때가 오길 기다렸어요.”

        ​

        “그래, 네가 좋다면야….”

        ​

        나는 마리아의 손에 끌려 팔츠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

        처음에는 반쯤 끌려가는 마음으로 돌아다녔지만, 시간이 지나 점심 무렵이 지나서부터는 나도 즐기기 시작했다.

        ​

        “오, 이건 뭐야? 무슨 장식품 같은 건가?”

        ​

        “아, 그건 사탕이에요. 마법으로 설탕과 과일을 잘게 부숴 조각처럼 만든 거죠.”

        ​

        “…마법 탕후루?”

        ​

        “예?”

        ​

        “아, 아냐.”

        ​

        과연 제국의 수도답게,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현란하고 화려한 사치품과 고급 물건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역시 귀족들이 현역으로 뛰는 시대라 그런지 보석이나 장신구를 세공하는 기술이 정말 미친 듯이 발전해 있었다.

        ​

        흔히 졸부를 가리켜 품위도 모르고 보석으로 떡칠하고 보는 천것이라 보는 이미지가 왜 생겼는지도 알 수 있었다.

        ​

        그야 평범해 보이는 금 한 덩이로도 이런 정신 나간 예술품을 만들 사람들을 다수 후원하거나 고용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돈 좀 벌었다고 아무튼 비싼 것들을 무작정 사들여 치장하는 게 그리 곱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

        “그보다, 마법사를 이런 일에 동원한다고?”

        ​

        “마탑 소속의 마법사 중 연구비가 부족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걸로 알아요.”

        ​

        “세상에.”

        ​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상인들이 마법사를 고용하는 일이 다 있다는 점이었다.

        ​

        내 기억 속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재수는 없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놈들이었다.

        ​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마법사란 선택받은 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경지였다. 마력을 느끼고 운용할 수 있는 이들도 적은데, 마법사가 될 정도로 마력을 운용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소수였다.

        ​

        요컨대, 저 잘난 맛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

        그래서 그들이 돈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건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

        “그 마법사들이 귀족도 아니고 돈에 고개를 숙인다고?”

        ​

        “수도에서 이렇게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인 길드 소속이니까요.”

        ​

        “허.”

        ​

        하지만 상인길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

        마법과 오러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배 째라고 나오면 진짜 배를 째버리고 역으로 자기들 불리할 때가 되면 역으로 배 째라는 시전하며 꼬우면 힘으로 덤비라고 나오는 귀족을 상대로 정말 배를 쨀 능력을 보유한 그들이라면, 마법사를 고용하는 게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였다.

        ​

        “진짜, 신기하네.”

        ​

        하지만 마법사들이 참여했다는 걸 감안해도, 팔츠의 거리는 굉장히 화려했다.

        ​

        금박이 입혀진 장신구가 노점에서 팔리고 있었다. 저택으로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대장간에서는 쉬지 않고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어물 가게와 청과점은 무려 마법을 동원해 식품을 수송해와 가공하지 않은 싱싱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

        여관은 붐비고, 고기 굽고 스튜 끓이는 냄새가 거리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냄새는 다시 길거리에 파는, 현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간식거리의 향기에 묻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잊혔다.

        ​

        조금 더 들어가니, 시계와 같은 정밀기계와 온갖 고급 의류점이 들어서 있었다.

        ​

        백화점의 향취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벌써 몇 시간을 걷고 있음에도 시장이 끝나지 않는 것이, 이 구역이 통째로 오직 상행위만을 위해 구성된 곳 같았다.

        ​

        “항상 번영과는 거리가 먼 곳 위주로 돌아다녀서, 이런 곳은 본 적이 별로 없죠?”

        ​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한 번 와볼걸.”

        ​

        나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고 자부했지만, 이런 곳은 본 적 없었다. 겨우 시장바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시장바닥이 어지간한 마을의 규모를 압도했다. 여기 돌아다니는 인원만 해도 어지간한 지방 영주의 영주성이 있는 고을을 압도하지 않을까.

        ​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 마리아가 나를 데리고 골목길 쪽으로 빠졌다.

        ​

        “어어, 여긴 시장과는 관련 없는 곳 아냐?”

        ​

        “쉿, 잠깐 조용히 해주세요.”

        ​

        “읍.”

        ​

        마리아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멈춰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끌려갔다.

        ​

        마리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간판은커녕 아무런 표시도 없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

        “여기예요.”

        ​

        “…진짜?”

        ​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부실한데. 이 안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기엔, 외관이 너무 허름했다.

        ​

        그리고, 그게 굉장히 섣부른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세상에.”

        ​

        판타지를 얕보지 마라, 지구인.

        ​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던 것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 공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다소 무의미해진다는 깨달음이었다.

        ​

        허름한 외관은 둘째치고, 분명 건물의 크기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 골목길 안이긴 하지만, 한쪽 벽면 전체를 통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었으니 오히려 유달리 큰 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런 건물이, 내부에 들어서니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여 있었다. 심지어 지하도 파여 있었는데, 지하는 건물과 상관없이 사방으로 더 뻗어져 나가 있었다.

        ​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야?”

        ​

        비록 마법사는 아니라지만, 한때는 마법을 동경해 이론이라도 열심히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름 마탑의 마법사를 불러 5 위계의 마법까지 공부했음에도 이런 수준의 힘을 낼 수 있는 마법은 본 적 없었다.

        ​

        4 위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법사라고 불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마법사 중에서도 상당히 재능 있고 경지가 높은 이들을 여럿 불러야만 할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대마법사를 부르던가.

        ​

        어느 쪽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면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고, 권력으로 해결하려 해도 보통 권력으로는 안 됐다.

        ​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마리아가 나를 이끌었다.

        ​

        “고대부터 존재하던 건물이에요. 어떤 이유로 세워졌는지는 몰라도, 과거부터 비밀스런 시장으로 쓰이고 있죠.”

        ​

        “…지하 시장이라고?”

        ​

        뭔가 불길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

        경외의 눈빛이 의심의 눈초리로 변하자 마리아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그런 꺼림칙한 건 아니에요. 존재 자체는 엄연히 공개된 곳이니까.

        ​

        “그럼 왜 비밀스러운 시장인데?”

        ​

        그녀는, 내 말에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

        [“타올라라.”]

        ​

        나도 잘 아는, 담뱃불 정도로 요긴하게 쓰이는 점화 마법의 주문이었다.

        ​

        그러나 마리아의 손가락 위에 나타난 것은, 불꽃이라 하기엔 너무 커다란 불꽃의 회오리였다.

        ​

        그녀는 손가락을 한 번 까딱여 불꽃을 꺼트리고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

        “마법사만이 입장할 수 있는 결계가 쳐진 곳이니까요.”

        ​

        그녀의 말에 내 심장이 요동쳤다.

        ​

        수도 한복판에 존재하는, 마법사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시장이라고?

        ​

        이건 못 참지.

        ​

        “푸훗.”

        ​

        마리아는, 그런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웃음소리를 흘렸다.

        ​

        …살짝 부끄러웠다.

        ​

        -―

        ​

        과연, 이곳은 마법사들만의 시장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 자격이 있었다.

        ​

        저 지상의 시장에서는 잡화점이 말 그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화를 파는 곳이었다면, 이곳은 잡화점조차 격이 달랐다.

        ​

        잡화점은 온갖 마법 실험이나 작업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팔고 있었다. 비커에서 시작해 마법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도구들까지, 말 그대로 온갖 마법사 전용 잡화를 팔았다.

        ​

        그런가 하면, 건어물 상점과 청과점은 굉장히 고급 가게로 취급받았다. 식자재를 팔던 지상과 다르게 이곳은 마법을 위한 재료로 쓰이는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

        가령, 청어는 지상의 건어물 가게에서 평범하게 잘 차린 정식집 한 끼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싼 값에 팔렸다면, 여기서는 청어 앞에 ‘200년 묵은’이나 ‘천년 묵은 괴물이 사는 심해에서 잡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 한 끼 값에 팔려나갔다.

        ​

        반면 보석상은 지상에서와는 달리 가장 하찮은 대접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이곳이 가격이 더 쌌다.

        ​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보석상이 말 그대로 아무 세공도 하지 않은 단순한 광물을 파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지상보다 단가가 더 낮았다. 물론 딱 한 군데, 마법사가 관여해 세공한 장신구를 파는 곳이 있긴 했다. 이곳은 농담이 아니라 수도에 집 몇 채 마련할 가격으로 거래됐다.

        ​

        다만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들이 물건을 파는 곳은 없었다.

        ​

        “이건 의왼데.”

        ​

        “딱히 의외랄 것도 없어요. 마탑에서 활동할 마법사들이 돈이 부족한 건 연구비가 터무니없이 비싸서지, 정말 재산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다들 적당히 주거래하는 대장간 하나쯤은 있어요. 아예 한 명 물고 후원 계약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

        막힘 없이 척척 설명하는 마리아의 지식에 감탄하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

        “후후,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요.”

        ​

        한참을 호들갑을 떨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마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자기가 하는 말을 숨기려 하면 사일런스를 알아서 걸던 그녀였기에, 이건 내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

        “…티가 많이 나나?”

        ​

        “이걸 보고 모르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빌헬름이죠.”

        ​

        “아니, 내가 왜 나와?”

        ​

        “그냥요.”

        ​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고 앞서나갔다.

        ​

        “슬슬 식사나 할까요? 점심시간도 조금 지난 것 같은데.”

        ​

        그녀의 말에 그제야 나는 내가 아침만 먹고 이 시간까지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엔 굉장히 늦고, 저녁을 먹기엔 많이 이른 시간이었다.

        ​

        “이런, 미안.”

        ​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제가 좋아서 따라다닌 건데.”

        ​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

        “그런데, 나는 여기를 잘 모르는데.”

        ​

        “괜찮아요. 제가 잘 아니까.”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워낙 이곳이 큰 공간이라 그런지 움직이는데도 몇 분이 걸렸다.

        ​

        “안녕하십니까.”

        ​

        “마리아 호프부르크. 예약이에요.”

        ​

        “네, 바로 모시겠습니다.”

        ​

        “…예약?”

        ​

        의아한 이야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분명 아침에 갑자기 갈 곳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 나왔건만, 예약이라고 한 걸 보면 진작부터 준비하던 것 같았다.

        ​

        “제가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어딜 갈 수는 없잖아요?”

        ​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데, 네 호위 기사들은 전혀 모르던 것 같은데?”

        ​

        내 기억에 철십자 기사단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외출 선언에 굉장히 당황해했었다. 미리 계획해둔 외출이라면, 걔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

        하지만 마리아는 아주 간단하게 이를 논파했다.

        ​

        “당신이 같이 있는데, 수도에서 호위가 더 필요할까요?”

        ​

        “…그건, 그런가?”

        ​

        하기야, 결국 철십자 기사단은 나를 대신해 그녀에게 소개해준 기사단이었다. 나름 실력이 있긴 했지만, 결국 기사단이 움직여서 ‘나’를 대신해준 거니까, 실력 차이가 큰 건 사실이기도 하고.

        ​

        …이렇게 말하니 논리적으로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

        이, 이게 맞나?

        ​

        “이야기 다 끝났으면, 얌전히 따라오세요.”

        ​

        “으, 응.”

        ​

        얼떨결에 마리아와 함께 웨이터가 안내하는 룸으로 향했다.

        ​

        그리고 문이 닫혔다. 반대편에 앉은 마리아의 눈빛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

        그 순간 깨달았다.

        ​

        ‘어라.’

        ​

        나, 지금 아무도 없는 방에 단둘이 마리아와 남은 건가?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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