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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단죄: 이기심의 말로]

       

       

       스킬 설명: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파티원의 멘탈을 박살냅니다. 마력 혹은 기력 혹은 신성력 수치를 0으로 만들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합니다. 정신 붕괴는 덤.

       

       

       플레이버 텍스트: 

       “방법이 없음. 이 심상세계를 깨부숴야만 함.”

       

       

       이건 대체 뭐하자는 스킬일까.

       

       당시에는 서큐버스에 쫓기느라 크게 신경 쓸 수 없었지만 간신히 여유를 되찾은 지금 다시 보니 단순한 최고위 궁극 스킬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플레이버 텍스트는 말투로 보아 마법사 티그리아로 추정되기까지 하니 린은 스킬 스크롤을 펼쳐놓고 여신의 의도를 읽어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게임 세계에 전생을 했어도 상태창 같은 멋지고 유용한 UI 따위는 불러낼 수 없었다.

       

       가면을 쓰고 전생을 각성한 다음 수십 번도 더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대신 짐꾼에 걸맞게 그만이 갖고 있는 능력, 바로 아이템 설명 보기가 있었다.

       

       덕분에 까먹었던 스킬 효과라던가 그 역사를 알 수 있었지만 플레이버 텍스트까지 있는 것은 단죄: 이기심의 말로가 처음이었다.

       

       여신의 성소에서 찾아낸 스킬 스크롤이니 분명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을 터인데 설명에 쓰여진 대로라면 나중에 용사 파티원 한 명의 정신을 작살낼 필요가 있다는 섬뜩한 예언을 암시하는 게 된다.

       

       꺼림칙했지만 생각을 거듭하던 린은 아주 말이 안되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회복하긴 했지만 루시는 용사 파티에게 배신당해 팔다리가 찢겼다.

       

       포대기로 린에게 매달려 살던 루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의 8할은 그에 대한 집착이었다면 나머지 2할은 복수심이었다.

       

       

       ‘다시 회복한다면 제국, 멸망시켜 버릴까?’

       

       

       그러나 루시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해대다가 이 꼴이 됐으니 그건 아닌듯 해.’

       

       

       린은 반성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름 감격했었다.

       

       

       ‘대신 그 녀석들 몸통을 꼬챙이로 꿰어 효수해야 겠어. 팔다리는 놔두고 말야.’

       

       

       이어지는 처벌 계획에 얼굴을 바로 굳히기는 했지만.

       

       이런 그녀가 나중에 최종 보스와 맞서려면 용사 파티의 재합류는 필연이었다.

       

       린이 권유를 해도 루시는 거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이 스킬을 써야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린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린, 어디 불편해?”

       

       

       안겨있던 루시는 그 한숨을 듣고 올려다보았다.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나 때문… 인 거야?”

       

       “그런 거 아냐.”

       

       “그럼 뭐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사지를 회복한 루시는 린에 대한 집착과 의존도가 더 높아져 버렸다.

       

       엘릭서를 마시고 의식을 찾자마자 본 것이 린의 죽음이었던 탓에 루시는 시도때도 없이 그와 붙어 있으려 했다.

       

       

       “린… 린…!”

       

       

       온전한 육신을 갖게 되고 드디어 서로 떨어져서 자게 된 첫날 밤, 루시는 새로운 악몽에 시달리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짓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린의 이름만 불렀다.

       

       몸상태 때문에 깊게 잠들어 있던 린이 한참 뒤에 깨어나 루시를 깨우자 그대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울어버린 것이다.

       

       

       “린!”

       

       “루시 무슨 일이야? 또 악몽을 꾼 거야?”

       

       “린이 죽어 있었어… 나한테 잘 살라고 하고 죽어버렸어… 살리기 위해 온갖 수를 써봐도 린이 눈을 뜨지 않았어…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린이 없으면 난…!”

       

       “루시 난 여기 있어. 멀쩡히 살아있어.”

       

       

       그러자 그녀는 직접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정말이지?”

       

       “응, 네가 여신님께 기도해서 살려줬잖아.”

       

       “아아….”

       

       

       린을 꼭 끌어안은 루시는 속삭였다.

       

       

       “내게서 떨어지지 말아줘. 항상 린을 느끼게 해줘.”

       

       “으음 루시 몸도 이제 괜찮아졌으니 그건 좀….”

       

       “린.”

       

       

       루시의 목소리가 무겁고 음침하게 내리깔렸다.

       

       

       “린이 내 곁에서 없어진다면 이 세상을 반쪽 내서라도 널 찾아서 다시 곁에 둘거야.”

       

       “…….”

       

       “심장소리 듣고 싶어.”

       

       “음….”

       

       “들어도 돼?”

       

       

       세상을 반쪽내겠다 해놓고서는 애절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마지못해 승낙하자 루시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린… 나의 유일한 아군, 최고의 동료, 나의 린.”

       

       

       그 이후로는 정말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린은 루시와 강제로 붙어다니게 되었다.

       

       거기에 지금처럼 계속해서 린의 기색을 살피는 통에 여유롭게 혼자 고민도 할 수 없었다.

       

       루시는 린의 모든 생각을 알고 공유하기를 원했다.

       

       

       “슬슬 도시에 들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난 싫어. 도시는 사람이 많아.”

       

       

       쫓기고 있는 입장에서 루시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있었다.

       

       

       “일단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를 못하니까 확인할 필요가 있어.”

       

       

       린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패닉에 빠진 루시는 무작정 그를 들쳐업고서 무지막지한 힘을 이용한 전력으로 달려 이곳에 도착했다.

       

       녹음이 꽤나 우거지고 근처에 개울도 있지만 아직 살얼음과 눈이 남아있는 이 산터는 에팔테르가쪽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거 말고는 알 길이 없었다.

       

       

       “도시는 싫어.”

       

       “왜? 사람들이 많아서?”

       

       “…다른 여자들이 있잖아.”

       

       

       다른 곳을 쳐다보며 루시는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린은 내 건데 다른 년들이 접근하는 게 싫어.”

       

       “아냐아냐 누구도 나한테 접근하지 않아.”

       

       “린이 잘 몰라서 그래!”

       

       

       린은 대체 뭘보고 루시가 그를 불안해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난봉꾼도 아니고 난봉꾼이 될 외모와 성격도 아니었다.

       

       애초에 린은 루시의 것도 아니었다.

       

       자꾸 합의한 적도, 넘긴 적도 없는 소유권을 줄창 주장해대니 린은 골치가 꽤나 아파졌다.

       

       이 집착과 의존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감도 안 잡힌다.

       

       

       “있잖아 루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어.”

       

       “없어. 문제없어. 린 곁에 내가 있고, 내 곁에 린이 있잖아. 아무 문제없어.”

       

       “아니 말 좀 들어봐.”

       

       “좋아한다는 말 외에는 듣지 않을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안 들을래.”

       

       “…….”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곁눈질로 재촉하는 게 보였다.

       

       빈말은 안하는 주의인 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해.”

       

       

       동료로서.

       

       

       “나도 좋아해 린.”

       

       

       그러면서 그의 품에 폭 파고든다.

       

       귀를 최대한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이제 얘기해도 돼?”

       

       “응 듣고 있어.”

       

       

       루시는 그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차피 똑바로 들을 생각이 없었다.

       

       

       “크흠,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말야.”

       

       “헤어지자는 말 빼고는 전부 괜찮아.”

       

       

       그거 큰일이다.

       

       언젠가는 해줄 말이긴 하니까.

       

       

       “루시.”

       

       “응.”

       

       “너 왜 속옷 안 입니.”

       

       

       루시가 동그란 눈을 깜박인다.

       

       

       “나 팔다리 잘릴 때부터 안 입었는데?”

       

       “그때랑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그치만 속옷만큼은 본인이 들고 다녔으니까. 절벽 떨어질 때부터 여분은 없었고. 입고 있던 것도 엘릭서 마셨을 때 열기로 타버렸는 걸?”

       

       

       엘릭서를 마시면 체온이 급격히 올라가며 입고 있던 옷가지가 타버린다는 건 애러건트 사가 공식 설정이다.

       

       그것도 루시 알몸 CG를 뽑아내기 위한 빌드업.

       

       사지를 회복한 알몸의 루시 CG까지 출력될 정도로 공들인 씬이라고나 할까.

       

       파티원들에게 찢기고 베여나갔던 부분들은 마치 이음매처럼 더 새하얀 튼살이 있는 게 특징인 CG였다.

       

       

       “그리고 난 매일매일 씻는데다가 린의 옷 사이즈가 커서 편한 걸?”

       

       “그것 참 다행이네. 편하다면 굳이 나한테 매달리면서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절대로 안 돼.”

       

       

       승낙 따위 기대도 안했다.

       

       루시와 함께 다니면서 린은 그녀에게 긍정의 말을 들어본 적이 손에 꼽았다.

       

       이건 그녀가 배신당하기 전이나 후나 똑같았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점이라고나 할까.

       

       

       “루시 다 큰 숙녀가, 그것도 귀족 영애가 외간 남자한테 매달려서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해.”

       

       “린은 외간 남자 아니야. 최고의 동료라구. 그리고 누가 뭐라할 건데?”

       

       

       지금 당장 내가 뭐라하고 있잖아.

       

       쓸개즙이라도 역류하는지 린의 입속은 쓰기만 했다.

       

       

       “루시 세상을 구하고 나서건 그 전이건 간에 너도 귀족이니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되겠지.”

       

       “…그건 그렇지.”

       

       

       결혼 이야기에 루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확실히 인륜지대사라 그런가 집착과 의존증 속에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준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말야.”

       

       “린이 말하는 거라면 헤어지자는 거 빼고는 모두 괜찮아.”

       

       “…여튼 그 브래지어라는 건 가슴 모양을 잡아주고 처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거라고 들었단 말이지? 맞아?”

       

       “누구야?”

       

       “응?”

       

       “누가 린에게 그런 걸 알려줬어?”

       

       

       아이고 이런 젠장, 못생긴 얼굴로 속옷이니 가슴 모양 같은 단어 꺼내니까 눈총 받는구나.

       

       다행이도 루시가 날카로워진 건 그 이유가 아니었다.

       

       

       “여자야? 여자지? 여자가 알려줬지?”

       

       “어… 주워들은 거야. 누구랑 이야기를 했다기 보다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내가 옆에서 막일하다가 주워들은 거지, 응.”

       

       “그렇구나.”

       

       

       루시는 린의 품에 귀를 가져다 대니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응, 거짓말하는 심장소리가 아니네.”

       

       “…….”

       

       

       린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거짓말할 때의 심장소리를 안다는 걸까.

       

       린 자신도 어떤 소리일지 궁금했다.

       

       

       “결혼, 하고 싶어.”

       

       “그치, 루시도 언젠가 하게 되겠지.”

       

       

       웬일로 루시가 본론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기회라고 여긴 린은 심호흡을 한 뒤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처진 가슴 안 좋아해.”

       

       “에?”

       

       “가슴이 아무리 커도 처졌다면 그걸 본 순간부터 남자의 마음은 식어버려.”

       

       “가슴이 아무리 커도?”

       

       “그렇지.”

       

       “수박만해도?”

       

       “처진 수박일 뿐이잖아.”

       

       

       이게 용사 파티의 격조 높은 대화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용사한테 속옷 입히겠다고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반면 루시는 심각했다.

       

       

       “처진 가슴은 별로….”

       

       

       말이 나왔으니 정리하자면 루시의 가슴은 꽤 큰 편이었다.

       

       파티 내에서라면 근소하게 아르실이 이기지만 평소 흉갑 안에 감춰진 육감적인 곡선은 특히, 속옷도 입지 않은 지금 여과없이 대단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아무리 커도 처지면 별로라고 했다.

       

       루시의 머리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1. 루시는 나중에 무조건 남자(린)과 결혼할 것이다.

       

       2. 루시는 가슴과 골반 등 몸매에 상당한 자신감과 크기를 가지고 있다.

       

       3. 그러나 남자(린)은 아무리 커도 가슴이 처지면 마음이 식는다고 했다.

       

       4. 브래지어를 안하고 있으면 앞으로 가슴이 처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5. 처진 가슴이 되면 남자(린)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6. 당장 브래지어를 사서 입어야 한다.

       

       얼마나 골몰하고 있었는지 린이 캠핑 뒤처리를 하고 이동할 준비를 할때까지 루시는 부동의 자세로 앉아있었다.

       

       순 지멋대로의 공식과 결론을 도출한 루시는 안구에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봤다.

       

       속옷을 사려면 도시로 가야한다.

       

       안 보인다.

       

       눈에 더 힘을 줘보자.

       

       저기 날아가는 새의 발톱이 보일 정도까지만 힘을 줘보자.

       

       그래도 안보인다.

       

       저어기 나무 끝에 걸린 벌레의 더듬이 솜털이 보일 정도로 더 힘을 줘보자.

       

       그러자,

       

       

       “찾았다.”

       

       

       루시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린!”

       

       “응, 그래그래.”

       

       

       평소처럼 안기러 오는 줄 알고 린은 두 팔을 벌렸다.

       

       꼭 안아준 뒤 이동하자고 하면 군말없이 따라주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으응?”

       

       

       루시는 린의 몸통을 한 팔로 휘감고 옆구리에 꼈다.

       

       

       “루시?”

       

       “도시 찾았어 린.”

       

       “그거 다행이네. 바로 이동하면 되겠다. 나 좀 내려줄래?”

       

       “5번 정도? 점프하면 근처에 도착할 거 같아.”

       

       “…??”

       

       

       그건 안된다.

       

       한 번 도약한 것만으로도 주위를 다 작살내놓는 파괴력이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을 받아내는 건 땅바닥만이 아니라 루시가 끼고 다니는 린의 육체도 있었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폭발과 함께 뺨따구를 때려대는 대기와 거친 부유감, 착지 시 또 느껴지는 상당한 충격은 일개 짐꾼 린에게는 버거웠다.

       

       그런데 그걸 5번이나?

       

       

       “루, 루시 그건 너무 급한….”

       

       “린이 처진 가슴은 싫다했어.”

       

       “아니 나는 그냥 속옷을 입으라고….”

       

       “아무리 가슴이 커도 처지면 싫다했어.”

       

       “루시, 가슴이 크니까 처진다는 개념이 성립하는 거야.”

       

       “결국 처진 건 싫다는 거잖아!”

       

       

       콰아앙-!!

       

       도움닫기 한번에 조화롭던 녹음과 살얼음 지대는 찢겨버렸다.

       

       균열이 개울까지 벌어지며 순식간에 흙먼지와 흙탕물로 더럽혀졌다.

       

       마왕 토벌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던 쉼터가 붕괴하고 점이 되어 갈때쯤 루시는 결연한 목소리로 외쳤다.

       

       

       “린! 나는!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 할거야!”

       

       

       그 전에 사람말을 들을 줄 아는 여자가 되면 안될까?

       

       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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