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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얼마나···빌려드릴까요?”

역시 돈이 썩어나는 갑부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내가 안쓰러웠는지.

유리는 선뜻 돈을 빌려줄 의향이 있음을 드러냈다.

“경매에서 이기기만 하면 됩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제발. 너도 봤을 거 아냐. 나 대금화 몇 개쯤은 얼마든지 벌 수 있는 남자라고.

“알겠어요. 도와드릴게요.”

이 외침이 유리에게도 닿았을까.

그녀는 사람 좋은 미소로 뒷짐을 풀고, 내 번호표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카운트 들어갑니다! 5! 4! 3···”

“대금화 30개요.”

“3, 30개요···?”

그, 내가 빌려달라고는 했지만.

상대는 아무리 봐도 슬슬 한계였는데···여기서 통 크게 10개 레이즈를?

‘화, 확실하게 하려는 걸 거야. 혹시라도 말을 번복했다간 무안해질까 봐 얼마를 빌려달라고 금액을 말하진 않았잖아···?’

대금화 10개. 적은 돈은 아니지만, 딱히 못 벌 액수도 아니다.

···명색이 기사단장인데 막 차용증 쓰고 이자 붙이고 그러진 않겠지 설마.

“3, 30개 나왔습니다! 더 부르실 분이 안 계시다면···”

“대금화 40개요.”

“기사단장님???”

그런 희망은, 그녀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을 때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네. 40개가 나왔···”

“45개.”

“아니 왜 그러시는 거예요 도대체···!!”

이건 과연 무인답다고 해야 할까.

유리는 쉽사리 만족하지 못하고 이어서 번호표를 들었다. 고민하는 척 턱을 긋는 시늉까지 하며 아주 지극정성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50개가 좋겠네요.”

“카, 카운트 시작하겠습니다! 5!4!3!”

“6···”

“21떙! 낙찰! 낙찰됐습니다···!!”

다행히도 기사단장 유리의 외로운 싸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진행자에 의해 제지되었다.

저기서 안 막았다면···대체 어디까지 달릴 작정이었을지.

“낙찰자께서는 금액 지불 및 매물 수령을 위해 무대로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 일이 아니었음에도 식은땀을 다 흘리는 진행자의 부름에 따라, 셋이서 계단을 내려가는 길.

유리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내 걸음에 맞춰 폴짝폴짝 뛰었다.

뒷짐 지고 저러니까 진짜 귀엽긴 한데···이게 고도의 티배깅이라는 걸 남들은 알까. 금화 짤랑이는 소리가 매 칸 들려왔다.

“대금화 50개···확실하게 받았습니다.”

본래 이토록 처량하지 않았을 빈털터리가 되는 과정.

둘의 나이를 합쳐도 나보다 어린 애들이 총액의 자그마치 80%를 내는 그림이라 더 그랬다.

“저···기사단장님.”

“네. 부르셨나요. 아이 씨.”

이제는 저 ‘아이 씨’ 하고 부르는 게 마치 욕처럼 들린다.

“저는 50개까지 안 썼어도 충분히 낙찰받을 수 있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대금화 30개, 안 갚으실 건가요?”

“물론 제가 얼마를 빌려달라 말은 안 했다지만···”

“그래서, 안 갚으실 건가요?”

“솔직히 이미 다 이긴 건데 기사단장님이 독단으로···”

“안 갚으실 건가요?”

“···갚겠습니다.”

“이자는 따로 안 붙일게요. 천천히 조금씩 갚으셔도 괜찮아요.”

대금화 30개를 내고 좋은 교훈을 얻었다.

사성황로 유리 시저, 상냥한 그녀를 무례하게 대하면 큰 화를 입는다.

서글픈 마음에 고개가 절로 마리아에게로 돌아갔다.

“오빠. 마리아가 엄연히 하나의 생명인 오빠를 물건처럼 소유하는 건 잘못됐던 거 같아.”

너무해. 그런 이유로 본 거 아닌데.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겠지?

* * *

“그대가 이 몸의 주인이더냐?”

굵고 짧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천마와 마주하였다.

“나는 아이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

“마리아는 마리아.”

“저는 유리 시저라고 해요. 현재로선 지분 60%를 소유하고 있죠.”

“본좌는 천마 아스트레아. 이 몸은 천하에서 제일로 존귀하나니, 주인인 그대 입맛대로 어디 잘 굴려보거라.”

일단 첫인상은 자기가 천마인 줄 아는 정신병자.

태도도 말투도,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거 갖고 따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흠. 집요하게 가슴만 뚫어져라 보는구나. 만지고 싶더냐?”

‘지금 로브 안의 시선을 읽은 건가?’

심지어 눈이랍시고 원만 두 개 달랑 찍 그려진 거를.

이것만으로 그녀에 대한 평가가 대폭 상향조정 되었다. 최소한 천마 호소인 정도로는.

“오빠 변태. ···마리아한테도 아직 가능성은, 희망은 있어.”

“어쩐지 이즈리 선배를 찾으시더라니···”

소녀들의 음해는 가볍게 무시했다.

아니, 저 거대한 가슴을 좀 봐라. 눈을 어디다 둬도 보인단 말이다. 이게 내 잘못이냐?

그리고 이즈리 찾은 건 마리아잖아.

아무튼 이렇게, 제도에서의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 났다.

* * *

유리는 장난스레 빚 독촉만 살짝 남기고는 미련 없이 황궁으로 복귀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늦어진다 싶으면 한탕 노릴 방안도 구상해야겠다.

우리는 곧장 여펨아을로 가기 전에 앞서 잠시 주점에 들렀다. 

참고로 대화할 장소 찾으려니까 여기 추천해 준 것도, 직원한테 들어갈 건데 어쩌라고 시전한 것도 마리아다. 그러니까 구석 쪽 테이블 거기, 그런 표정 좀 그만 지어줬으면 한다. 술은 안 시킬 거니까.

“맥주 3개.”

“맥주만 빼고 주세요.”

“우우.”

아스트레아는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듯 우리 둘을 바라봤다.

“그대와 아해는 연인 관계더냐?”

“비슷해.”

“미쳤냐? 얘 겨우 8살···마리아 뭐라고?”

“흐응.”

정말이지 편견이 없···는 건 아니고 분위기 풀려 그런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허수아비인 것까지 밝혔는데.

왠지 모르게 불만 가득 부풀어 오른 마리아의 뺨을 콕콕 찌르며 본론으로 넘어갔다.

“우선은 간단하게 이것부터 물어볼게. 왜 자기 자신을 경매에 올린 거야?”

“이 몸을 비싸게 사줄 인물에게 의탁해 기반을 마련하려 한 것이었노라.”

“그랬다가 엄한 놈이 낙찰받···아도 별일은 없었겠구나.”

노예래 봤자 구속구도 안 찼다. 애초에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이상, 마냥 함부로 대하지도 못한다.

거기에 스스로를 매물로 올린 소녀라는 점에 주목을 받아, 이 소식은 기사단장 귀에도 들어갈 정도로 퍼졌으니.

세간의 관심 속에 보호를 받으며. 금전적인 거래로 묶인 관계를 이용할 여지는 여지대로 생기는 것이다.

“마리아는 가슴 쳐다보는 것도 엄한 짓이라고 생각해.”

“글쎄 그런 게 아니래도···.”

마리아의 볼을 찌르는 깊이를 늘렸다.

“다음은 이걸 물어야겠지. 아스트레아, 넌 어떻게 천마가 된 거야?”

“간단한 이야기니라. 이 몸은 천마를 자칭했고, 누구 하나 겐세이를 거는 작자가 없었기에 천마인 것이니라.”

그야 천마가 뭔지도 모를 텐데 어떤 놈이 굳이 그걸 막아.

나 같아도 누가 깊은 저 바닷속 비키니 시티 주인 한다고 들면 퍽이나 반발하겠다.

“뭐···그래. 그럼 질문을 바꿔서. ‘천마’라는 건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이 질문에는 내내 볼을 찔리며 빵을 우물대던 마리아도 관심을 보였다.

여유로 일관하던 아스트레아 또한, 눈빛에 작은 동요가 서리는 게 느껴졌다.

“흠. 질문에 질문으로 먼저 답하게 됐다만. 그대의 질문은 천마가 뭐냐는 게 아니라, 이 몸이 이를 알아낸 그 출처. 이것이 맞더냐?”

“···맞아.”

“호오. 그렇단 말이지.”

내 대답에 아스트레아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곡선으로 휘어진 눈매 안에서 붉은 달이 응시해 온다. 짧게 갈라진 입꼬리는 작은 기대를 머금고 있었다.

“재밌구나. 그대에게 반할지도 모르겠느니라.”

“···!! 새치기, 안 돼···!!”

“아해는 방금 주인에게 차이지 않았더냐?”

“우우우···!!!”

깡깡깡-

갑자기 왜 내가 맞는 흐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저 답해 줄 것을 재촉했다.

마리아는 무릎 위에 앉혀주니 얌전해졌다.

“···흐, 흥.”

“약 100여년 전.”

“···100년 전?”

한편 아스트레아는 우상을 애기하는 어린아이처럼, 살짝은 들뜬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최초의 천마는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인재들과 함께 천마신교라고 하는 세력을 꾸렸느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직까진 전형적인 무협 속 기본 배경.

다만 척 보기에도 줄줄이 설명할 건 많아 보였기에 잠자코 앉아 경청했다.

“처음에는 박해받는 등 고난도 없지는 않았으나. 북부의 서리 드래곤을 처리하는 걸 기점으로 천마신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이가 늘었지.”

“응?”

“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세우다, 최초의 천마는 마침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이리 외친 게다. 천마야말로 최고이자 최강이다, 라고.”

‘잠깐···’

“저기, 그 천마의 이름이 혹시 ‘태근’이냐···?”

“오. 거기까지 알고 있었더냐?”

‘천마 컨셉 잡던 그 랭커 놈이잖아.’

천마신교는 길드명, 서리한 드래곤은 길드 레이드. 저 천마가 최고이니 최강이니 한 거는 길드전 우승 발표 소감 내용.

솔플을 고수하던 나한테 하도 영입 제안을 해대서 기억에 익은 자식이다.

“이 몸은 바로 그의 무용담에 반하여 천마를 꿈꾸고, 또한 그 길을 걷게 된 것이니라.”

태근아, 보고 있냐? 너한테 본받아서 미소녀 천마가 생겼댄다. 가슴도 짱 커.

“아스트레아 너 막 백 살이고 그런 건 아니지?”

“딱 스물이니라.”

“그렇다는 건 당연히 어디선가 문헌 같은 걸 통해서 본 거겠네?”

“아무렴. 바로 그 천마신교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버려진 건물. 거기서 본 내용들이니라.”

‘길드 건물이겠지.’

방향성은 예상과는 완전 딴판이지만, 현실과 조금이라도 접촉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마침 천마신교 길드 건물이라면 제도 내에 있었을 터. 지체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한번 가보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소제목으로 처녀임을 인증한 히로인은 처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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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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