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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이건 에리송 남작이 쓰신 건데, 쾌활한 주인공의 전형적인 유랑기야. 방랑시인이 주인공이라 가볍게 보기 좋아.”

       

       턱.

       

       “아, 이것도 입문작으로 좋아. 무명 작가님 건데, 용병단 이야기야. 멋진 동료들과 모험하며 사건사고들을 해결하는 그런.”

       

       턱.

       

       “맞다. 이것도! 이건 결말이 정말 좋은데 반전을 위한 설계가 치밀해서 반전 있는 소설 좋아하면 딱이야.”

       

       턱.

       

       “이게 빠졌네! 이건 위대한 그레이트 기사단을 모티브로 한 소설인데, 기사들의 뜨거운 충성심이 감동적인 소설이야. 이건 꼭 읽어봐야 돼.”

       

       턱.

       

       벌써 4권째다.

       순수 문학 코너의 초입부터 4권의 책이 탑을 쌓기 시작했고, 이대로 가다간 고인물의 하늘 같은 은덕에 압사당할 듯해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저기, 아리엘?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응? 그래?”

       

       잔뜩 들떠있던 아리엘의 기운이 누그러들었지만, 이 정도의 은총도 과분했다.

       햇뉴비가 고인물이 막 던지는 걸 막 집어먹다 보면 복상사할 수도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체류 기간 동안, 레이첼과의 실전 훈련에 북부령 도시 탐방기도 겸행해야 했기에, 독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다.

       

       고인물께서 입증하신 책들이다.

       

       뉴비가 찍먹하고자 들고 갔던 7권의 책보다 질적인 면에서 뛰어날 것이기에, 4권도 과분한 은총이었다.

       물론 개인마다 취향 차이가 있겠지만, 7층 책탑 만으로 취향 분석을 완료한 고인물의 선택이라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리엘이 막 집어들었던 책을 다시 꽂으며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 아, 아니.”

       “…오늘은?”

       “아, 아니야.”

       

       말을 흐리곤 쑥스러워하는 아리엘.

       뉴비 키우기에 맛들린 고인물께서 짧게 끝나버린 베품의 시간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했다.

       나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이 느낀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고, 그것에 공감받는 것으로써 유대감과 친밀감을 형성, 더 나아가 자존감을 고취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심리였으니까.

       우연한 만남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아리엘이 아니었다면 이것 저것 찍먹만 하다 지레 물려버렸을지도 모를 일.

       자고로 도움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갈 갚아야 하는 게 인간된 도리였다.

       

       “내일도 도서관에 들러?”

       “나?”

       “어.”

       “응! 이미 매일 오고 있는걸? 아마 보름 정도는 쭉 올 거 같아. 아직 못 읽어본 게 잔뜩 있거든.”

       “흠. 몇시쯤?”

       “나?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기 쭉 있는데…?”

       

       아하.

       당연한 걸 물어봐버렸군.

       잠깐, 근데 대공성 내부엔 외부인이 따로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걸로 아는데.

       하물며 중세시대 도서관에 현대식 편의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점심은 어떻게 해결해? 딱히 식사할 수 있는 곳이 없을 텐데.”

       “아….”

       

       아리엘이 잠시 머뭇거리며 답을 미룬다.

       그저 궁금했을 따름인데, 괜한 것을 물은 듯한 느낌에 화제를 바꾸려던 찰나.

       아리엘이 머쓱한 표정으로 나직히 답했다.

       

       “사, 사실 굶어.”

       “…굶는다고?”

       “응.”

       

       밥 굶는 백작가문의 영애.

       무소불위의 권력의 귀족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자, 알고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자, 참으로 전무후무한 영애이지 않을 수가 없다.

       고막을 두드린 것이 믿기지 않아 되물어야 했다.

       

       “하루 종일 굶는다고? 배 안고파?”

       “조금 고픈데… 뭐, 딱히 해결할 거리도 없고 책 읽는 게 너무 좋아서 그냥 참고 있어.”

       “대단한데.”

       “밖에서 해결하고 오려면 시간도 너무 걸리고 하니까.”

       “대여하면 되잖아?”

       

       아마도 방금 내가 아리엘을 봤던 시선일 거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올리며 황당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말이다.

       

       “대여는 어쩔 수 없을 때나, 집에 갈 때 하는 건데?”

       “…….”

       

       대강 짐작이 갔다.

       아리엘이 말하는 ‘어쩔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천재지변, 단기 여행, 병으로 인한 외출 불가 같은 뭐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독서광에겐 이 도서관이란 곳이 풍기는 쿰쿰하며 구수한 내음 속 평온이 훌륭한 독서 환경이겠지.

       식욕보다 독서욕이 더 강하기에 그런 것일 테지만,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시녀에게 도시락을 싸오라고 하면 되잖아?”

       “…….”

       

       재차 머쓱한 표정으로 답을 미루는 아리엘.

       이어 그녀가 뱉은 답은, 참으로 엉뚱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아카데미 급식소에서 밥을 먹는 아리엘의 모습이 기억에 없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떠올리다 보니 한 가지씩 기억이 추가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혼자 밥 먹기가 조금 그래서……. 그렇다고 시녀한테 같이 먹자고 하기엔 불편해 할 거 같아서 그냥 참았다가 숙소에 가면 먹어. 민폐 끼치는 건 질색이라.”

       

       그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말단직원이 사장님과 겸상하려면 밥알이 명치에 턱턱 걸릴 테니까.

       

       어쨌든.

       

       고인물께 은혜를 받은 뉴비가 그것을 갚을 방법이 생긴 듯싶다.

       체류 기간 동안 재미난 소설을 건지기 위해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나 북부령 최대의 규모 도서관엔 희귀한 도서들이 잠들어있다.

       복제 기술이 부족한 이곳에서 재미나며 희소성있는 소설은 그야말로 진흙 속 진주인 법.

       대공성을 떠나기 전까지 그것들을 탐독하려면 고인물의 도움은 필수에 가까웠다.

       

       

       “그럼 점심 때 같이 먹을까? 나랑 같이 가면 지인 자격으로 그레이트 홀에서 식사할 수 있을 거야. 도서관이랑 거리도 가깝고.”

       

       

       무의미한 혼약대전보다 유의미한 탐독시간이 더 중요했던 내겐, 당연한 약속이자 답례였다.

       애당초 고인물의 서포트를 거절할 뉴비가 어딨겠는가.

       아리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정말? 왜?”

       “뭐. 나도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긴 했거든.”

       “네가? 왜?”

       

       4층 책탑을 든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악질 망나니 캐릭터와 정답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위인은 드문 법이다.

       그녀의 말대로 혼밥이 싫어 가련한 중생들을 식탁에 끌고 와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리고 혼밥이라면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가진 것이 없어, 빼앗길 것은 많아, 밤잠까지 줄여가며 쓰리잡을 해야 했던 이준우에게 혼밥은 일상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끼리 식사를 하며 사담을 나누는 건 진취적인 즐거움을 낳기 마련이다.

       그러한 복합적인 이유를 뭉뚱그려 답해주었다.

       

       “망나니의 삶은 고독한 법이니까.”

       “아…….”

       

       재차 외마디 탄식을 내뱉으며 암묵적 동의를 표하는 아리엘.

       가만 보면, 귀족가 영애답지 않게 제 속을 숨기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없는 영애인 듯싶다.

       

       

       **

       

       

       스륵.

       

       힐긋.

       

       스륵.

       

       힐긋.

       

       스륵.

       

       힐긋.

       

       스륵.

       

       힐긋.

       

       …….

       

       힐긋?

       

       자리를 옮겨 독서실에 앉아있는 우리였다.

       나는 추천받은 책을, 아리엘은 골라온 책을 읽기 위해 말이다.

       

       문제는.

       

       하늘 같은 은혜를 하사하신 것은 좋으나, 뉴비의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전전긍긍하듯 눈치를 보는 고인물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 장 넘길 때마다 미어캣마냥 책 너머로 힐긋거리곤 재차 고개를 파묻는 아리엘.

       이제 10장을 읽었으니 10번의 눈치를 본 셈이다.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 책을 놓으며 고개를 들자 부리나케 책 뒤로 숨어버리는 아리엘이 보였다.

       왜 그러는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충분했다.

       

       “재밌어.”

       “어, 응?”

       “이거, 진짜 재밌다고. 걱정하는 거 같아서.”

       

       책을 들어보였다.

       4권 중 가장 마지막에 추천받은 [위대한 그레이트 기사단의 충성록]이었다.

       아직 10장 밖에 읽어보진 못 했지만, 고인물의 추천답게 초반부터 몰입도가 높았다.

       물론 극초반이라 재미를 논하기엔 어려웠지만, 아리엘의 노심초사가 눈에 밟혀 그리 얘기해준 것이었다.

       재밌을 것 같기도 했고.

       직후, 아리엘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피었다.

       

       “휴우- 다행이다. 걱정했거든.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해준 적은 처음이라서… 히.”

       “그래?”

       “응! 주변에 순수 문학 읽는 애들이 없어. 시녀들도 전부 시시한 로맨스 같은 거만 읽어서 말이야.”

       

       한숨을 쉬며 푸념하듯 씁쓸히 토로하는 아리엘.

       아기자기한 파스텔풍 2D RPG보다 성인용 풀3D RPG를 즐기는 여성들처럼 남다른 취향을 가진 덕에 홀로 취미를 즐겨야 했던 모양이다.

       

       그 덕에 나는 큰 도움을 받긴 했다만.

       

       현대의 이준우 또한 늘 홀로 탐독했던 고독한 누렁이였지만, 익명의 커뮤니티가 있었기에 작품을 읽으며 느낀 감상을 공유하고 공감 받을 수 있었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아리엘과 똑같은 푸념을 늘어놓아야 했을 터였다.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것이 독서라지만, 때로는 모태 집돌이에게도 외출이 필요하듯, 읽었던 작품에 대한 갑론을박을 논할 시간도 필요한 법이니까.

       

       “로맨스를 싫어한다라, 의외인데.”

       “그냥 재미가 없더라. 알잖아? 우리에게 그런 극적인 사랑 같은 건 환상일 뿐이란 거.”

       

       [우리]

       소설에서야 이뤄질 법한 극적이고 낭만적인 사랑보다 정략혼이란 족쇄로써 ‘사랑’보다 ‘사람’을 보고 결혼해야 하는 귀족들을 일컫는 것일 터.

       혼밥 못 하는 영애께서 환상보다는 현실을 즐기는 모양이다.

       판타지 세계에선 용병들의 우정, 기사도 정신, 용사의 모험, 이종족 간의 전쟁 같은 게 현실적인 이야기이니까.

       연애와 연이 없었던 전생의 내겐 둘다 환상적인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렇긴 하지. 그럼 순수 문학만 읽나봐?”

       “고전이랑 신화 쪽도 읽기는 하는데 주로 순수 문학 쪽이야.”

       “오호. 고전이랑 신화라…, 그것도 재밌겠는데?”

       “정말?”

       

       뉴비가 흥미를 비추자, 아리엘의 푸른 눈동자가 햇빛이 반사되는 바다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눈빛이 반짝인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판타지 세계에서 쓰인 고전 문학은 대륙탄생기, 왕국건국기 또는 영웅 전설과 같을 터이고, 신화는 현대의 상상 속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대륙을 간접적으로 관장하며 실재(實在)하는 ‘진짜배기 신’들의 이야기일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우선 추천해준 거 다 읽고 나면 신화나 고전쪽도 추천해줄 수 있을까?”

       “정말?”

       “응.”

       “나야 좋지!”

       

       그렇게 짧은 독서 시간을 마치곤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레이첼과 훈련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책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볼게. 저녁엔 훈련이 있어서. 추천해준 건 오늘 밤에 읽어볼 테니까 내일 또 얘기하자.”

       “응. 그럼 내일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오늘 고마웠어.”

       “아?”

       

       무심히 내뱉은 인사에, 익숙한 표정이 아리엘에게서도 보였다.

       렌들러 영감이 하루를 멀다하고 짓는 그 표정이었으니까.

       ‘엘든 라펠리온이 —–!?’ 같은.

       

       “고, 고맙긴 뭘. 나도 이렇게 소설에 관련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

       “그럼 간다.”

       “응!”

       

       환한 미소로 손인사를 하는 아리엘.

       그것을 어색히 받은 후, 도서관 출입구로 가 4권의 책들을 대여했다.

       

       근데, 그러고 보니…….

       

       ‘마법 이론서 가지러 간다던 집사장께선 어딜 간 거지?’

       

       아리엘을 만난지만 해도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마법 이론서를 가지러 마탑에 가기라도 한 걸까.

       잠시간 기다려도 코빼기를 보이지 않는 렌들러에, 결국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마법서 코너에 콧수염을 기른 노집사가 방문하진 않았나?”

       “흐음… 모르겠습니다.”

       

       뭐야.

       

       어디로 간 거야?

       

       

       

       

       

       

       

       

       

       

       

       

       

       

       

       

       

       

       

       

       **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이오.”

       

       일전에 방문했던 기억을 따라 호기롭게 걸음을 했던 노집사 렌들러, 현재 대차게 길을 잃고 지하 4층 창고에 도착한 상태였다.

       

       “어, 어디로 가야하오…….”

       

       훌쩍.

       

       눈물이 앞을 가린 울보 노집사는 그렇게 한참을 해매이다, 방범 직원에게 무단 침입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엘든을 만날 수 있었다.

       

       길치는 용감한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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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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