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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

     

    대낮에도 숲속은 무성한 나뭇잎이 가려 저녁처럼 어둑어둑하다.

     

    “어이쿠!”

     

    내 옆에서 걷던 기스가 발을 헛디디고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벌써 네 번째다.

     

    “거 입 좀 다무십쇼. 마물에게 저희가 여기 있다고 광고합니까.”

     

    참다못한 기사 한 명이 기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처음 기사단 병영을 찾아갔을 때 보초를 서던 기사다. 분명 이름이 보리스였다.

     

    “발밑이 안 보이는데 어떡합니까. 원시인도 아니고, 횃불 좀 들면 안 됩니까?”

     

    기스의 불평에 헛웃음이 나왔다.

     

    “방금 뭐 들었냐. 아예 마물들에게 전단지도 돌리지 그래. 싱싱한 인간 고기 무상 제공, 절찬 영업 중이라고.”

     

    내 말에 기사 몇 명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기스가 인상을 팍 썼다.

     

    “겁줘서 제 퍼포먼스를 떨어트릴 생각이라면 소용없습니다. 고블린이 수준 낮은 마물이라고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집단행동을 하는 걸로 보아 홉 고블린이 상대라니까. 만만히 보면 안 돼.”

     

    “안 속습니다. 어찌 됐건 제 치유 능력을 증명할 뿐이죠. 황녀님의 주치의가 되어 황실 내의원에 입성하는 건 접니다!”

     

    기스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하지만 자신감은 마물 토벌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법이었다.

     

    “쉿.”

     

    앞서나가던 타냐가 검지를 입에 댔다.

    수신호를 나누고는 대형을 이루는 다섯 명의 기사들. 각자 검을 강하게 쥔다.

     

    “돌격!”

     

    타냐의 명령에 맞추어 기사들이 수풀 뒤로 달려들었다.

     

    “흡!”

    “키에엑!”

     

    검을 내려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래 끓는 비명이 나무 사이로 퍼진다.

     

    조용해진 후 수풀을 넘어가 보니 바닥에 고블린 세 마리가 양단되어 굴러다녔다.

     

    소드 익스퍼트의 칭호를 증명이라도 하듯 괜찮은 실력을 보여줬다.

     

    “여기부터 고블린의 영역이다. 기척 탐지를 게을리하지 말고 원군을 부르기 전에 즉시 척살하도록.”

     

    타냐가 명령했다. 우리 뒤로 따라오던 다른 분대도 상황을 이해하고 부산히 움직였다.

     

    “집단이 맞긴 한 겁니까? 이렇게까지 경계해서 사냥해야 하는지….”

     

    기스가 고블린의 시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네.

    내가 놈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 나뭇더미를 발로 차며 말해줬다.

     

    “이걸 봐. 불을 피우려던 흔적이야. 여기서 캠핑을 하려 했거나 우리를 발견하고 본대에 신호를 보내는 용도였겠지. 본래 이놈들은 이만한 일을 벌일 지능이 안 돼.”

     

    기스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확실히 선언해준다.

     

    “우두머리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야. 그만 투덜거려라.”

     

    “제가 언제 투덜거렸다고… 도련님이 언제 마물을 그리 잘 아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한 판단이십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오셨군요. 계속 나아가죠.”

     

    타냐가 내 발언을 긍정했다. 그제야 기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고블린의 흔적이 난 풀숲을 따라 한참 더 나아갔다. 도중 마주친 개체는 기사들이 즉시 토벌했다.

     

    그 끝에 우리는 절벽 벽면에 난, 시커먼 동굴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로 이어지는군요.”

    “고블린이 굴에서 생활을? 희귀하군요.”

    “가주님, 여기부턴 횃불을 사용해야 해서 토벌이 위험해질 수 있겠습니다만, 계속 진행할까요?”

     

    타냐의 질문에 아버지가 조금 고민하는 눈치를 보였다. 채점관 상급치유사들과 토론을 나누었다.

     

    그들이 의견을 결정하는 동안 나는 굴 입구 주변을 뒤졌다.

     

    “찾았다.”

     

    동물의 두개골을 찾아 그것을 들고 아버지에게 보여줬다.

     

    “이걸 보시죠.”

     

    “먹다 남은 뼈인가?”

     

    “썩은 게 아니라 도구로 뜯어낸 물건입니다. 먹은 게 아니라 의식용입니다.”

     

    “의식용이라니?”

     

    “홉이 아니라 샤먼이 무리를 통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발언에 기사단이 술렁거렸다. 반면 치유사들은 심각성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스가 질문했다.

     

    “샤먼이면 마법을 쓰는 고블린인가? 뭐가 다릅니까?”

     

    “달라도 한참 다르지! 안에 있는 건 마법으로 강화된 고블린 군대다. 길드에 의뢰를 보내도 홉과 샤먼은 D와 C급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보리스가 기스를 타박했다.

     

    타냐가 의견을 전했다.

     

    “확정된 건 아닙니다만, 정말 안에 고블린 샤먼이 있다면 이쪽 피해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저희 기사단이라면 얼마든지 토벌할 수 있을 실력입니다. 하지만 치유사분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치유사들이 겁에 질려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주치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군을 치유해야 하는 법, 이런 상황도 가정해야 함은 분명하나 시험에서까지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아버지가 즉시 결단을 내렸다.

     

    “고블린 샤먼 토벌은 길드에 의뢰를 내 추후 다시 진행하도록 하지. 시험은 인근 마물 소탕으로 이어가겠네.”

     

    전문 모험가가 아닌 치유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올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이는 흔적을 발견했기에 아버지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럼 토벌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길드에서도 모험가에게 수주를 내야 하니 며칠 후가 되지 싶구나.”

     

    “그때까지 납치된 영지민이 생존해 있어야 할 텐데요.”

     

    “뭐라고?”

     

    동굴 벽면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찐득한 피가 묻어나왔다.

     

    “혈액의 응고 상태로 보아 여섯 시간이 안 지났습니다. 고블린들이 납치해 안으로 끌고 간 모양입니다.”

     

    “으음…!”

     

    아버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기스가 내 말에 반박했다.

     

    “그게 꼭 사람의 피가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식사거리인 동물을 가져간 걸지도요.”

     

    얘는 이제 반대를 위한 반대 사이클로 들어섰다.

    내 말이 제발 하나만 틀리기를, 하고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

     

    어디 계속해봐. 내가 한 번이라도 틀리나.

     

     

    ―――――――――――

     

    진단 D가 발동합니다.

    부상 상태 : 출혈

    부상 위치 : 좌측 이마

     

    ―――――――――――

     

     

    피의 주인이 사람이니 진단이 발동했겠지.

     

    부상의 일부만 봐도 진단이 발동하는 건 꽤 편리하지 싶다.

     

    내가 기스를 향해 말했다.

     

    “치유사면 한 번 봐서 사람 피인지 짐승 피인지는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봐, 사람 피야. 그리고 이대로 돌아가서 골든타임을 놓쳤으면. 책임은 네가 지고?”

     

    “그, 그건….”

     

    내가 기스에게 피가 묻은 손가락을 들이밀자 놈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나는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굴은 고블린들의 본거지니 이 편성으로 진입하기에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으음. 라스 치유사, 그 피가 사람의 것이라 확신하는가?”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내게도 호칭을 붙여 부르는 아버지였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확신합니다.”

     

    “알겠다. 타냐 단장, 진입을 준비하게.”

     

    “예. 전군, 경계 진형으로 진행한다. 치유사들을 안쪽으로 배치해서 기습당하지 않게 해라.”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치유사들을 둥글게 감싸 보호하는 형태가 됐다. 몇몇이 횃불을 들었다.

     

    “진입한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걸음을 옮긴다.

     

    동굴의 입구를 지나자 훅, 시야가 어두워지면서 적어진 산소량에 숨이 턱 막혀왔다.

     

    선두의 정찰조가 긴 창을 내밀어 벽 구조를 확인하며 나아간다.

     

    그 뒤를 타냐가 앞장선 본대가 따른다.

     

     

    …긴장감이 감돈다.

     

    누구 하나 잡담을 나눌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동굴 벽면에 비친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횃불이 바람에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공기가 통하고 있다. 막힌 굴은 아니다.

     

    “단장님, 갈림길입니다.”

     

    “음.”

     

    타냐가 어느 쪽으로 향할지 판단을 고민하는 듯했다.

     

    조금 도움을 줄까.

     

    “동굴에 사는 고블린은 반드시 출구를 여러 개 만들어. 언제든 도망치기 위해서야.”

     

    “도련님.”

     

    “하지만 외부에서 납치해온 인간이라면 출구가 있는 곳에 가둬둘 필요가 없지.”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두 동굴 방향에 대본다.

    바람은 한쪽에서만 불어오고 있었다.

     

    “인질은 막힌 쪽에 있을 확률이 높아. 오른쪽부터 탐사하길 추천해.”

     

    타냐의 눈썹이 이마 위로 쑥 올라갔다.

     

    “상당한 지식이시군요. 감탄했습니다. 모험가 일이라도 해보셨습니까?”

     

    “아니?”

     

    용사 파티는 지겹게 해 봤어.

    극한 직업이더라. 절대 추천 안 해.

     

    “그럼 우측으로 향하겠습니다. 선두는 함정에 주의하라.”

     

    길이 좁아지기에 조금 더 천천히,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여기부터는 진형을 유지하기도 힘들었기에 분대별로 다시 떨어진 형태로 변경했다.

     

    얼마 안 있어 기스가 동굴 끝을 손가락질하며 급하게 외쳤다.

     

    “저기 있습니다!”

     

    기스가 횃불을 들이밀며 뛰어갔다. 동굴 구석에 고블린들이 모아놓은 동물 시체들과 함께 사람이 두 명 쓰러져 있었다.

     

    “잠깐! 진형을 벗어나지 마라!”

     

    타냐가 다급히 명령했지만 기스는 이미 쓰러진 영지민들에게 달려간 후였다.

     

    확실히 그들의 상태는 다급해 보이긴 했다. 옷은 엉망으로 찢어졌고 몸에는 멍이 가득했다.

     

    남자와 여자 한 명씩이었는데, 여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단으로 확인한 쪽이 분명했다.

     

    “하늘에 계신 자애로운 여신님께 아뢰옵니다! 여기 자비를 필요로 하는 어린 양이 대답을 기다리니….”

     

    기스가 성서를 펼치고 치유주문 시전에 들어갔다.

     

    직업정신이 투철한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경솔한 행동이었다.

     

    ―키이익!

    ―케엑!

     

    고블린들의 울음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친 건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몽둥이를 든 고블린들이 떼거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털도 없는 조그만 몸뚱이로 위협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혐오스럽다.

     

    “허억!”

     

    그 모습에 놀란 기스가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블린들은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기스를 덮칠 기세였다.

     

    “흡!”

     

    그 고블린들을 순식간에 양단하는 바스타드 소드.

    타냐의 검이었다.

     

    “기습이다!”

     

    “전원, 전투태세를 취해라!”

     

    기사들이 검을 들고 싸움에 들어간다. 순식간에 좁은 동굴이 전장으로 변한다.

     

    “가, 갑자기 대체 어디서…!”

     

    기스가 손을 벌벌 떨었다. 나는 놈의 뒤통수를 쳤다.

     

    “보물을 놓고 함정으로 먹이를 유도하는 건 놈들의 기본적인 수법이야. 몸집이 작으니 안 보이는 굴로 이동하거나 틈새에 숨어있기 마련이고. 정신 차려라.”

     

    “으윽, 아, 알겠습니다!”

     

    기스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는 다시 치유주문 시전에 들어갔다.

     

    다른 치유사들도 몇 붙어 영지민들을 치유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고트베르크 기사단은 우수하다. 타냐가 평소에 잘 교육해놓은 덕이다. 기습을 당했다고는 해도 고블린 정도는 손쉽게 막아내 토벌할 터.

     

    아버지를 지키는 임무도 호위기사들이 착실히 해내고 있다.

     

    그리고 감독으로 붙은 아셀라의 시녀장.

     

    …흠.

     

    어째 이런 상황인데도 전혀 동요한 기색이 없다. 기습을 받지 않는 위치에 미리 적절하게 서 있었다는 느낌이다.

     

    나는 내 몸만 지키면 되겠네.

     

    “하압!”

     

    참을 필요도 없겠다, 힘껏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키에엑!!

     

    나에게 달려들던 고블린 하나가 머리를 얻어맞고는 나가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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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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