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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0

        우정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형성된다.

       

        단순히 자주, 오랫동안 만나는 것으로도 깊은 친분을 쌓을 수 있다. 인간관계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만큼 정신적인 거리도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나와 로테는 취미가 맞는 친구였다. 둘 다 지독한 공붓벌레였다.

       

        그런 우리의 일상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공부하고, 밥 먹고, 잠깐 쉬다가 다시 공부하고. 명문대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교우관계였다.

       

        이런 피상적인 관계는 지구에서 다니던 학교에서조차 몇 번 경험한 적 있었기에 익숙했다. 그나마 한 가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로테와는 두 학기 연속으로 같은 기숙사를 쓰게 되었다는 것 정도.

       

        성적 때문이었다.

       

        버멜이 자퇴하면서 내가 1등, 로테가 2등으로 올라섰다. 로테 대신 누군가가 2등을 했고, 그 친구가 여자였다면 그 아이가 새 룸메이트가 될 터였다.

       

        그러나 로테의 실력은 특별반 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가지다.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도 더 많이 붙는다는 것.

       

        로테는 다른 친구와도 어울렸지만, 나와 어울리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루 평균 10시간은 붙어 다니는 것 같았다.

       

        이만큼 오래 붙어 다니면 필연적으로 서로의 여러 가지를 알게 된다. 가령 생활 패턴이라든지, 남몰래 가지고 있는 비밀이라든지.

       

        아니면,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의외의 면이라든지.

       

        인간은 누구나 의외성을 가진다. 세상에 단편적인 인물이 어디 있다고? 다들 걱정거리나, 남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습관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당연히 로테에게도 의외인 면이 있었다. 얼마 전, 나는 그중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다 컸는데 옷은 잘 골라서 입어야지. 이게 뭐니?”

       

        얘, 생각보다 잔소리가 많다.

       

        잔소리가 나쁜 일면이라는 건 아니다. 애정이 있으니까 이렇게라도 말해주는 거겠지. 오히려, 로테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내 일에 지적해주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런 잔소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기억을 반추하자면, 대강 2학기가 끝날 때부터 이러기 시작했다.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어응.”

       

        로테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칭얼댈 뿐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하느라 기력을 전부 소진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무어라 항변할 여력도 없었다.

       

        반면에 로테는 아까 전부터 한숨만 픽픽 쉬어대는 중이었다.

       

        “자, 로브나 코트로 대충 가린다고 다가 아니야. 안쪽도 잘 챙겨 입어야지. 응?”

        “예….”

        “많이 힘들어?”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여기 졸업하면 귀족일 텐데 몸가짐이 너무 서툴러서 그렇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딱히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여자애’치고는 몸가짐이 개판인 편이었다.

       

        일단 머리부터가 제멋대로였다. 나는 동급생 중에서도 머리가 긴 편에 속했다. 그것도 또 단순히 길기만 하면 상관이 없었는데, 관리를 하도 안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만 움직여도 산발이 되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로테의 ‘에테르 사람 만들기 계획’에 따라 고풍스럽고 유연한 머릿결로 탈바꿈했으니까.

       

        나는 꾸중을 가장한 로테의 걱정을 들으며 머리를 매만졌다.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결이 많이 보드라워졌다. 뻣뻣한 감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갈라지는 일도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무엇보다도 중량감. 가끔가다 목덜미가 당기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 감각이 말끔하게 가셨다.

       

        48시간 정도 머리를 감으면 안 된다는 페널티가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 정도는 참아야지.

       

        마냥 후회되지는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잘 정돈된 머리와는 반대로, 옷은 아직도 후줄근한 상태 그대로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뭐부터 본다고 생각해?”

        “얼굴.”

        “그다음은?”

        “옷, 이겠지?”

       

        로테는 그제야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소 로테는 의복에 관해 지적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할 때는 주로 교복만 입고 돌아다녔으니까.

       

        하얀 와이셔츠에 브로치, 테니스 스커트 비슷한 치마에 두꺼운 로브 하나 두르면 그게 교복이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대개 그러한 차림으로 돌아다닌다. 이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복 차림은 다르다.

       

        사복에는 무궁무진한 조합이 존재한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핏이 살 수도, 혹은 멍청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내 경우에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야 패션 센스가 괴랄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이러는 건 지구에서나 여기에서나 똑같았다. 계속 책만 보고 논문만 썼는데, 패션에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좋아, 이것도 입어 보자.”

       

        매장을 하도 돌아다닌 탓인지, 나는 반쯤 정신이 풀려있었다.

       

        미용실에서 보낸 시간만 무려 다섯 시간이다. 그런데 미용실을 나서고도 두 시간이 지났다. 아무리 못해도 일곱 시간은 미용 목적으로 싸돌아다닌 것이다.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바깥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태양은 가라앉고, 별과 천구는 떠오른다. 달빛이 구름 몇 점을 받아 미약하게 산란한다.

       

        “이래서야 모레 연구할 때 힘들겠는걸….”

        “어허, 결정 무르기 없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유한 조건으로 내걸을 걸 그랬나. 나는 쩝 입맛을 다시며 피팅룸에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무수히 반복. 한 매장에서 가까스로 자리를 뜨면, 곧바로 다음 옷가게 직행이었다. 여기서도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아입고 포장하기의 연속.

       

        불경기라 옷값이 만만찮았다. 그런데도 내 지갑은 든든했다. 로즈마리가 지원해 주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내가 낸다니까?”

        “괜찮으니까.”

        “아니,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로테가 몇 번이고 지갑을 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제지했다. 나에겐 든든한 수입원이 여럿 있지만, 로테는 아니었다. 당장 산 외출복만 몇 벌인데, 분에 넘치는 소비를 그녀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로테가 나에게 뭐든지 시키는 날이다. 돈을 받는 주체가 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금화나 백금화 뭉텅이 대신 카드를 하나 꺼냈다. 이 세계에는 보편화되지 않은, 그러나 아주 유용한 지불 수단이었다.

       

        돈을 꺼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그네틱 바에 마력을 흘려주기만 하면 된다. 소량의 마력 정도는 양장본에게서 즉석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사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마그네틱 바에 마력을 흘린다. 그러더니 마력은 곧 금화로 바뀌어 카운터 위에 놓였다. 그 광경을 로테와 종업원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마도구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난 거야?”

        “있어, 그런 거.”

       

        절멸급 마수가 정체인 블랜튼 공작가의 블루베리 공녀님이 줬다고는 말 못해.

       

        -꼬르륵

       

        그나저나 배고프다. 7시간 넘게 머리하고 옷만 사 입으며 돌아다녔으니 아사할 지경이다.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

        “그러는 게 좋겠다.”

        “특별히 원하는 메뉴 있어?”

        “아무거나… 앗.”

       

        로테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아무거나, 라니. 상당수의 사람이 싫어하는 말 아니던가.

       

        “미래에 귀족이 될 거잖아. 좀 더 똑부러지게 얘기해 봐.”

        “…어, 파스타?”

       

        그제야 로테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졸지에 귀족 예법을 배우는 꼴이 되었다.

       

        사실 귀족 예법은 예전부터 틈틈이 배움받고 있었다. 당장 여름 방학 때만 하더라도 귀족들이 어떻게 술을 하는지 익혔으니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헤를라인 선생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 평민이 갑자기 귀족이 되잖아? 그러면 이것저것 견제를 많이 받게 돼. 간단한 예의범절 하나로도 말이야. 그러니까 졸업하고도 모든 일이 능사는 아니라는 거지.

       

        평민과 귀족의 생활상에는 차이가 있다. 그랬기에 서로 공유하는 예의범절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미묘한 차이가 큰 질타를 만들어낸다. 옷 입는 거라든지, 준수한 머리스타일을 유지하는 것도 포함해서.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곤궁과 가난으로 인해 정말 ‘뭐라도’ 먹어야 하는 하층민과는 달리, 귀족은 주도적으로 메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가 사소하면서도 중대하다고 한다. 적어도, 귀족 사회에서는.

       

        안 되겠다. 역시 귀족은 못 해 먹겠다. 어떻게든 졸업하기 전에 여기를 떠나서 일리야드로 가야….

       

        …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코앞에는 마냥 좋아하는 로테가 앉아있었다.

       

        로테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음식이 나온 직후, 그녀가 입을 달싹이며 물었다.

       

        “나중에 작위를 받으면 말이야, 황제 폐하께 부탁해서 우리 영지 바로 옆으로 토지를 받자고 얘기할까?”

        “응?”

       

        갓 나온 따끈따끈한 크리미 파스타로 향하던 내 포크가 그 말을 듣고선 우뚝 멈춰섰다.

       

        저번 이야기의 연장선상이었다. 우리가 열핵폭탄을 개발하고, 그걸로 세상 모든 마수를 무찌른 뒤 평화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 이후로는 자기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자는 로테의 제안.

       

        나는 마지못해 그 제안을 수락했다. 당시 분위기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로테에겐 준 것보다 받은 게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일을 얘기한 것이다. 우리 돈도 서로 충분하고, 공부로는 교류를 많이 헀으니까, 네가 필요한 걸 내게 부탁해 주라.

       

        어찌 보면 비겁한 짓이기도 했다. 친한 친구에게 고개를 숙였는데, 로테가 마음이 편할 리가.

       

        그래서 이참에 날 치장시켜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는 편이 노예나 시종처럼 부리는 것보다야 훨 나았으니까.

       

        배려심 깊은 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감히. 이런 순진무구한 애한테 ‘같이 살자’라는 귀여운 부탁 하나 못 들어줄 수 있겠나….

       

        안타깝게도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마왕을 잡으면 나는 지구로 돌아가고 없을 테니까.

       

        솔직히, 계속 거짓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가 괴물의 몸이라는 건 말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함께하긴 어렵다는 것 정도는 얘기해야겠다고.

       

        그리 다짐하며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어, 언니! 내 통장에서 방금 금화 4백 장 나갔는데 이거 맞아…?”

       

        블루베리 한 떨기가 가게 안으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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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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