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0

       *

        높은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햇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정교하게 맞춰진 시계처럼 아침이 되자마자 눈을 떴다.

        ​

        마치 누군가가 두들겨 깨우기라도 한 듯, 번쩍 눈을 뜨고 상체를 벌떡 일으킨 앨리스의 얼굴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

        앨리스는 숨을 참으며 서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

        풀, 나무, 돌, 흙.

        ​

        그리고, 애쉬.

        ​

        천천히 회전하던 앨리스의 시야 속으로 아직 곤히 잠들어있는 애쉬의 모습이 들어오자 비로소 앨리스는 깊은숨을 내쉬며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

        ​

        ​

        “… 하,”

        ​

        “오늘도 멀쩡히 살아서 일어났네,”

        ​

        ​

        ​

        그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앨리스의 귓등을 때리듯이 들어왔다.

        ​

        앨리스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애쉬가 잠들어있는 나무의 밑동에서 한참 고개를 들어올려야 보이는 나뭇가지 위.

        ​

        실비아가 그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

        ​

        ​

        “누가 보면 곧 죽는다는 거, 거짓말인 줄 알겠어.”

        ​

        “… 후우.”

        ​

        ​

        ​

        앨리스는 손등으로 식은땀을 털어내며 말했다.

        ​

        ​

        ​

        “내가 살아서 불만인 것처럼 들리는데,”

        ​

        “다행히 네 심장은 청력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구나.”

        ​

        “네 저주는 네 인성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지만,”

        ​

        “하하, 이것 봐라.”

        ​

        ​

        ​

        눈을 뜨자마자 사나운 말들을 주고받았지만 앨리스와 실비아는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

        두 사람 모두 이제 와서 날카로운 말 몇 마디로 상처받을 만큼 여린 심정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앨리스는 조용히 이를 꽉 물고는 자신의 살가죽에 눌어붙은 옷가지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

        찌익 하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쇄골 아래부터 가슴골 사이의 살들이 떨어져 나왔다.

        ​

        꽉 깨문 잇새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뜯긴 피부는 아물어갔다.

        ​

        ​

        ​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데, 그냥 벗는 게 어때??”

        ​

        “네가 언제부터 내가 아파하는 걸 신경 썼다고 그래?”

        ​

        “네가 아플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기 징그러워서 그러는데.”

        ​

        ​

        ​

        실비아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앨리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

        ​

        “이제 와서 소녀인 척하네, 사람을 산채로 완자처럼 다지는 년이.”

        ​

        “…”

        ​

        ​

        ​

        얄미운 말을 뱉어내던 실비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

        실비아가 앨리스를 무참하게 짓밟았던 일은 분명 그녀에게 참혹한 경험이겠지만, 동시에 실비아에게도 조금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

        무려 애쉬가 실비아에게 ‘앨리스 누나한테 사과하라’ 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

        심지어 애쉬 자신까지 같이 고개를 숙이기도 했던 만큼, 실비아는 그 일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

        만약 실비아가 앨리스에게 그날의 일을 들먹이면서도 도발이라도 했다간 애쉬가 싫어할 게 뻔하기에, 애쉬라면 껌뻑 죽는 실비아로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이겠지.

        ​

        앨리스는 천천히 벗어둔 흉갑을 들어 흥하게 일그러진 상체를 가리듯이 덮었다.

        ​

        그런 앨리스를 향해 실비아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

        ​

        “애쉬 때문이지?”

        ​

        “…”

        ​

        “애쉬가 있으니까 맨살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거잖아. 하, 누가 누구보고 소녀래.”

        ​

        “그런 거 아니야.”

        ​

        “아니긴… 아!”

        ​

        ​

        ​

        실비아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군. 흉하게 일그러진 살가죽을 보이기 싫은 거구나.”

        ​

        “…”

        ​

        “애쉬가 부끄러워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고 느끼면 상처받을까 봐 그렇지?”

        ​

        “상처를 왜 받아. 구멍이 숭숭 뚫린 가슴은 내가 봐도 안 좋은데,”

        ​

        “… 그렇긴 하지,”

        ​

        “아니, 그보다 이미 말했잖아. 나에겐 남은 시간이…”

        ​

        “지랄하네, 내가 모를 것 같아? 네 표정만 봐도 다 보여. 네가 애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

        “…”

        ​

        ​

        ​

        앨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

        오히려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바삐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

        천천히 흉갑을 갖춰 입은 뒤 몸을 일으킨 앨리스에게 실비아는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

        ​

        ​

        “똑바로 해.”

        ​

        ​

        ​

        앨리스는 한숨을 섞은 호흡을 내뱉으며 물었다.

        ​

        ​

        ​

        “… 뭘,”

        ​

        “아니라고 해놓고, 곧 죽을 거니까 자신은 가망이 없다고 해놓고, 정작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애쉬가 지금 여러모로 머리가 뒤숭숭해서 망정이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애쉬도 알아차렸을 거야.”

        ​

        ​

        ​

        앨리스는 심장이 잠시 덜컥 걸리는 것을 느꼈다.

        ​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실비아의 귀에까지 들렸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

        앨리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

        쓸데없이 정직해서 정곡을 찔려 뜨끔한 심정을 숨길 수도 없는 이 고물 심장이 정말 지긋지긋했다.

        ​

        ​

        ​

        “… 하,”

        ​

        ​

        ​

        확실히 실비아의 말대로 앨리스에겐 아직 애쉬를 향한 연심이 남아있었다.

        ​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커져 있었다.

        ​

        처음 약혼 소식을 들었을 땐 그저 ‘음, 그렇게 돠었구나’ 싶은 생각 정도였다.

        ​

        당시엔 아카데미를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고, 용사파티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애쉬가 가족들과 함께 죽었다고 들었을 땐 몹시 분노했었다.

        ​

        하지만 그 분노는 약혼자가 죽었다는 감정 보다, 죽은 마리아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발현된 것에 더 가까웠다.

        ​

        애쉬와 라일라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위해서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했었다.

        ​

        앨리스에게 있어 애쉬는 소중한 친구의 동생이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던 추억 속의 꼬마 아이에 불과했다.

        ​

        아카데미를 가기 전, 애쉬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엔 그는 아직 청년조차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하지만 정작 그 연심에 불이 붙기 시작한 건, 성장한 애쉬를 만난 이후였다.

        ​

        애쉬는 정말 훌륭하게 자라 있었다.

        ​

        그 여리면서도 곧은 심성도 그렇고, 운동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런데도 제법 남자 티가 나는 몸도 그랬다.

        ​

        하지만 애쉬의 매력 단순히 외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마음이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겉보기엔 꽤 자신을 잘 추스르고 있는 애쉬지만, 그에게선 결코 숨길 수 없는 처연한 슬픔과 지독한 고통이 깊은 흉터처럼 박혀 있었다.

        ​

        앨리스의 눈에 그 흔적들은 너무나 쉽게 포착되었다.

        ​

        하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애쉬가 맞이한 불행들은, 그 누가 겪었다 해도 쉽게 이겨내지 못할 만큼 악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그 가냘픈 몸뚱이에 새겨진 그 상처들은 실비아의 사랑으로는 전부 덮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

        그 사실이 앨리스가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

        ​

        ​

        “그런 거 아니야.”

        ​

        ​

        ​

        앨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

        실비아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 스스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

        아니야.

        ​

        안돼.

        ​

        나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

        내가 말한 대로 나는 남은 시간이 없다.

        ​

        나는 곧 죽으니까.

        ​

        ​

        ​

        “거짓말.”

        ​

        ​

        ​

        실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

        덜컹,

        ​

        앨리스의 심장 역시 앨리스를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앨리스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

        ​

        ​

        “시발,”

        ​

        ​

        ​

        그래, 

        ​

        그래, 이 빌어먹을,

        ​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어.

        ​

        생각보다 훨씬 멋진 남성이 되어있는 애쉬, 심지어 어린 시절의 추억도 공유하고 있는 데다, 비극적인 사건이 할퀴고 간 상처에 모성애도 일으킨다. 

        ​

        무엇보다 그 비극적인 사건들은 앨리스와 함께 공유하는 추억의 교차점에서 발생하지 않았는가.

        ​

        아마도 그 부분이 앨리스가 애쉬에게 마음을 쏟게 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

        애쉬에게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흔적이 앨리스뿐이듯이, 앨리스에게도 애쉬가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흔적이었다.

        ​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복수에 미쳐 이 개 같은 심장을 설치하는 실험에 자원했을 정도로 날뛰던 앨리스. 

        ​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사람인 애쉬에게 강한 애착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

        심지어, 그런 애쉬가 자신의 약혼자이기까지 했는데!

        ​

        내가 먼저였는데!

        ​

        왜 흔들리지 않겠어, 왜 억울하지 않겠어!

        ​

        ​

        덜컹,

        ​

        ​

        ​

        “후 우우…”

        ​

        ​

        ​

        앨리스는 천천히, 실비아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심호흡했다.

        ​

        냉정해지자.

        ​

        차갑게 생각해야 한다.

        ​

        이건 착각이다.

        ​

        달아오른 심장이 만든 착각일 뿐이다.

        ​

        뜨겁게 돌아가며 뜨거운 감정들을 더욱 불태우는 이 빌어먹을 심장이 만든 거짓 감정이다.

        ​

        ​

        ​

        “…하아.”

        ​

        ​

        ​

        앨리스는 간신히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그리고는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씩 잘근잘근 씹어 뱉듯 말했다.

        ​

        ​

        ​

        “하, 옛날엔 연애나 사랑 같은 것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사람 얼굴만 보고도 연심을 알아차릴 정도로 연애 박사가 되셨나?”

        ​

        ​

        ​

        실비아를 향한 적대적인 조롱으로, 날뛰는 심장이 주목하는 감정의 방향을 바꿔보려 했다.

        ​

        하지만, 그 애써 돌린 방향키는 실비아의 한 마디와 함께 순식간에 의미 없는 저항으로 변해버렸다.

        ​

        ​

        ​

        “내가 그랬으니까.”

        ​

        “… 뭐?”

        ​

        “내가 딱 너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

        ​

        ​

        아, 안돼.

        ​

        앨리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가슴에서부터,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피부와 근육을 타고 얼굴로 오른다.

        ​

        뇌가 익는 것 같은 뜨거운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

        앨리스는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

        부정해야만 했다.

        ​

        그렇지 않으면, 정말 멈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

        ​

        ​

        “나는 애쉬를 좋아하지 않아!”

        ​

        ​

        ​

        그때였다.

        ​

        ​

        ​

        “… 으웅?”

        ​

        “헛된…!”

        ​

        “누나…?”

        ​

        ​

        ​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일어나는 애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앨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

        실비아는 새빨갛게 빛나는 음흉한 눈빛으로 앨리스를 깔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 너,”

        ​

        ​

        ​

        나는 저년이 정말 싫어.

        ​

        앨리스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벽에 한편 더 올라갈겁니다
    다음화 보기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