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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햇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정교하게 맞춰진 시계처럼 아침이 되자마자 눈을 떴다.
마치 누군가가 두들겨 깨우기라도 한 듯, 번쩍 눈을 뜨고 상체를 벌떡 일으킨 앨리스의 얼굴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앨리스는 숨을 참으며 서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풀, 나무, 돌, 흙.
그리고, 애쉬.
천천히 회전하던 앨리스의 시야 속으로 아직 곤히 잠들어있는 애쉬의 모습이 들어오자 비로소 앨리스는 깊은숨을 내쉬며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 하,”
“오늘도 멀쩡히 살아서 일어났네,”
그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앨리스의 귓등을 때리듯이 들어왔다.
앨리스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쉬가 잠들어있는 나무의 밑동에서 한참 고개를 들어올려야 보이는 나뭇가지 위.
실비아가 그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누가 보면 곧 죽는다는 거, 거짓말인 줄 알겠어.”
“… 후우.”
앨리스는 손등으로 식은땀을 털어내며 말했다.
“내가 살아서 불만인 것처럼 들리는데,”
“다행히 네 심장은 청력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구나.”
“네 저주는 네 인성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지만,”
“하하, 이것 봐라.”
눈을 뜨자마자 사나운 말들을 주고받았지만 앨리스와 실비아는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이제 와서 날카로운 말 몇 마디로 상처받을 만큼 여린 심정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는 조용히 이를 꽉 물고는 자신의 살가죽에 눌어붙은 옷가지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찌익 하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쇄골 아래부터 가슴골 사이의 살들이 떨어져 나왔다.
꽉 깨문 잇새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뜯긴 피부는 아물어갔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데, 그냥 벗는 게 어때??”
“네가 언제부터 내가 아파하는 걸 신경 썼다고 그래?”
“네가 아플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기 징그러워서 그러는데.”
실비아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앨리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소녀인 척하네, 사람을 산채로 완자처럼 다지는 년이.”
“…”
얄미운 말을 뱉어내던 실비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실비아가 앨리스를 무참하게 짓밟았던 일은 분명 그녀에게 참혹한 경험이겠지만, 동시에 실비아에게도 조금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무려 애쉬가 실비아에게 ‘앨리스 누나한테 사과하라’ 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애쉬 자신까지 같이 고개를 숙이기도 했던 만큼, 실비아는 그 일을 최대한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실비아가 앨리스에게 그날의 일을 들먹이면서도 도발이라도 했다간 애쉬가 싫어할 게 뻔하기에, 애쉬라면 껌뻑 죽는 실비아로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이겠지.
앨리스는 천천히 벗어둔 흉갑을 들어 흥하게 일그러진 상체를 가리듯이 덮었다.
그런 앨리스를 향해 실비아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애쉬 때문이지?”
“…”
“애쉬가 있으니까 맨살을 보이는 게 부끄러운 거잖아. 하, 누가 누구보고 소녀래.”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아!”
실비아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흉하게 일그러진 살가죽을 보이기 싫은 거구나.”
“…”
“애쉬가 부끄러워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고 느끼면 상처받을까 봐 그렇지?”
“상처를 왜 받아. 구멍이 숭숭 뚫린 가슴은 내가 봐도 안 좋은데,”
“… 그렇긴 하지,”
“아니, 그보다 이미 말했잖아. 나에겐 남은 시간이…”
“지랄하네, 내가 모를 것 같아? 네 표정만 봐도 다 보여. 네가 애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
앨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히려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바삐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천천히 흉갑을 갖춰 입은 뒤 몸을 일으킨 앨리스에게 실비아는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똑바로 해.”
앨리스는 한숨을 섞은 호흡을 내뱉으며 물었다.
“… 뭘,”
“아니라고 해놓고, 곧 죽을 거니까 자신은 가망이 없다고 해놓고, 정작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애쉬가 지금 여러모로 머리가 뒤숭숭해서 망정이지,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애쉬도 알아차렸을 거야.”
앨리스는 심장이 잠시 덜컥 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실비아의 귀에까지 들렸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앨리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이죽거렸다.
쓸데없이 정직해서 정곡을 찔려 뜨끔한 심정을 숨길 수도 없는 이 고물 심장이 정말 지긋지긋했다.
“… 하,”
확실히 실비아의 말대로 앨리스에겐 아직 애쉬를 향한 연심이 남아있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커져 있었다.
처음 약혼 소식을 들었을 땐 그저 ‘음, 그렇게 돠었구나’ 싶은 생각 정도였다.
당시엔 아카데미를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고, 용사파티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쉬가 가족들과 함께 죽었다고 들었을 땐 몹시 분노했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약혼자가 죽었다는 감정 보다, 죽은 마리아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발현된 것에 더 가까웠다.
애쉬와 라일라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위해서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했었다.
앨리스에게 있어 애쉬는 소중한 친구의 동생이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던 추억 속의 꼬마 아이에 불과했다.
아카데미를 가기 전, 애쉬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엔 그는 아직 청년조차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연심에 불이 붙기 시작한 건, 성장한 애쉬를 만난 이후였다.
애쉬는 정말 훌륭하게 자라 있었다.
그 여리면서도 곧은 심성도 그렇고, 운동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런데도 제법 남자 티가 나는 몸도 그랬다.
하지만 애쉬의 매력 단순히 외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마음이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보기엔 꽤 자신을 잘 추스르고 있는 애쉬지만, 그에게선 결코 숨길 수 없는 처연한 슬픔과 지독한 고통이 깊은 흉터처럼 박혀 있었다.
앨리스의 눈에 그 흔적들은 너무나 쉽게 포착되었다.
하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애쉬가 맞이한 불행들은, 그 누가 겪었다 해도 쉽게 이겨내지 못할 만큼 악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가냘픈 몸뚱이에 새겨진 그 상처들은 실비아의 사랑으로는 전부 덮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앨리스가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앨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실비아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 스스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야.
안돼.
나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내가 말한 대로 나는 남은 시간이 없다.
나는 곧 죽으니까.
“거짓말.”
실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덜컹,
앨리스의 심장 역시 앨리스를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시발,”
그래,
그래, 이 빌어먹을,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어.
생각보다 훨씬 멋진 남성이 되어있는 애쉬, 심지어 어린 시절의 추억도 공유하고 있는 데다, 비극적인 사건이 할퀴고 간 상처에 모성애도 일으킨다.
무엇보다 그 비극적인 사건들은 앨리스와 함께 공유하는 추억의 교차점에서 발생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 부분이 앨리스가 애쉬에게 마음을 쏟게 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애쉬에게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흔적이 앨리스뿐이듯이, 앨리스에게도 애쉬가 유일하게 남은 과거의 흔적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복수에 미쳐 이 개 같은 심장을 설치하는 실험에 자원했을 정도로 날뛰던 앨리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사람인 애쉬에게 강한 애착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심지어, 그런 애쉬가 자신의 약혼자이기까지 했는데!
내가 먼저였는데!
왜 흔들리지 않겠어, 왜 억울하지 않겠어!
덜컹,
“후 우우…”
앨리스는 천천히, 실비아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심호흡했다.
냉정해지자.
차갑게 생각해야 한다.
이건 착각이다.
달아오른 심장이 만든 착각일 뿐이다.
뜨겁게 돌아가며 뜨거운 감정들을 더욱 불태우는 이 빌어먹을 심장이 만든 거짓 감정이다.
“…하아.”
앨리스는 간신히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억지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씩 잘근잘근 씹어 뱉듯 말했다.
“하, 옛날엔 연애나 사랑 같은 것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사람 얼굴만 보고도 연심을 알아차릴 정도로 연애 박사가 되셨나?”
실비아를 향한 적대적인 조롱으로, 날뛰는 심장이 주목하는 감정의 방향을 바꿔보려 했다.
하지만, 그 애써 돌린 방향키는 실비아의 한 마디와 함께 순식간에 의미 없는 저항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그랬으니까.”
“… 뭐?”
“내가 딱 너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아, 안돼.
앨리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슴에서부터,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피부와 근육을 타고 얼굴로 오른다.
뇌가 익는 것 같은 뜨거운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앨리스는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멈출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애쉬를 좋아하지 않아!”
그때였다.
“… 으웅?”
“헛된…!”
“누나…?”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일어나는 애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실비아는 새빨갛게 빛나는 음흉한 눈빛으로 앨리스를 깔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너,”
나는 저년이 정말 싫어.
앨리스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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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한편 더 올라갈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