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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0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제국 내의원 소속, 월광궁의 의사 라스 고트베르크입니다.”

     

    나는 마주앉은 용사에게 악수를 청했다.

    리셰와 다르게 그녀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떨떠름하게 내 악수를 받았다.

     

    기아스에 착실하게 서명했기에 그녀의 구속은 일단 풀어준 상태였다.

     

    “우선 호칭을 정하고 싶은데요. 용사든 이름이든 제가 아는 리셰와 헷갈려서요.”

     

    “뭐든 상관없잖아.”

     

    “그럼 임의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샤를씨라고 부르려고 하는데 어때요.”

     

    “야, 지금 무슨 강아지 이름 붙이니? 그렇게 대충 생각난 대로 바로 사람을 부르게.”

     

    “대충이라뇨, 존경하는 분의 이름이에요. 알러지 기질 반응을 밝혀내신 분인데…”

     

    “샤를 리셰. 기억났어. 전에도 이런 얘기를 했었구나.”

     

    성검 쪽의 리셰― 샤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예전 회차에 샤를이라고 그녀를 부른 적이 있었다. 잠입 임무에서 가명을 써야 했던 때였다.

     

    그게 리셰였는지 샤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번 있었던 일이기에 한 번쯤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라스, 너…”

     

    “이전이요? 샤를씨와 저는 지금 처음 만났을 텐데요.”

     

    “…그렇지.”

     

    샤를이 실망한 눈치를 보였다.

     

    그녀에게 내 회귀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불안정한 샤를이 비밀을 지킨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의도치 않게 리셰에게 정보가 전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땐 정말 복잡해진다.

    당연하지만 그녀는 아셀라에게 적대적이다.  처음 회귀했던 시점의 나처럼.

    지금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면 치료는 거기서 끝난다.

     

    “그럼 샤를씨, 본론부터 바로 이야기하지요. 우선 샤를씨는 성검과 공명현상으로 발생한 용사 리셰의 또 다른 인격입니다. 인지하고 계셨나요?”

     

    “나도 리셰야.”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제가 알던 리셰는 아니군요.”

     

    “너야말로 내가 알던 라스가 아니잖아! 황제 아셀라에게 반항하던 반골은 어디 가고 황실에 빌붙은 충견이 됐는데!”

     

    아이구, 이건 좀 아프네.

    그치만 월급이 잘 나오는걸.

    밥도 용사파티에서 먹던 전투식량에 비하면 천국이고.

     

    뭐, 농담이다.

     

    “이해는 잘 안 가지만 샤를씨의 말씀도 다 근거가 있겠지요. 무엇보다 대륙을 위해 싸우는 용사님이니까요.”

     

    “그래. 넌 아셀라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믿을 수가 없어. 어쩌면 지금은 공명 상태가 아닌 걸까? 혹시 환상으로 정신공격을 당하고 있는 거라면….”

     

    샤를은 불안정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설 기세였다.

     

    상당히 흥분했다. 내가 10년 전으로 돌아와 바꿔놓은 과거가 그녀에게 혼란을 줬다.

     

    이대로 대화를 계속해도 엇나간 채 감정만 상할 가능성이 높단 예상이 들었다.

     

    나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며 샤를을 대상으로 스킬을 시전했다.

     

    ‘카운슬링.’

     

    그러자 상태창에 처음 보는 게이지가 나타나며 선택지가 제시됐다.

     

     

    ―――――――――――

    대상 : 용사 리셰 (공명 중)

     

    스트레스    안정 ■■■■■■■□ 긴장

    자율신경 부교감 ■□□□□□□□ 교감

    피 로 도     건강 ■■■■■■■■ 피로

     

    A : 같이 산책을 하자 (피로도 –2)

    B : 고생이 많았다 (스트레스 –1)

    ―――――――――――

     

     

    ‘이런 식이구나.’

     

    신경계 검사인 HRV를 실시간으로 하는 상태가 됐다.

    환자의 심리 상태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으면서, 안정시킬 방법도 제안해준다.

     

    정신질환 치료에는 더없이 훌륭한 스킬이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높아. 반면 교감신경은 다 죽었어.’

     

    성검에 갇혀 지나치게 전투만 경험하고 실패만 반복된 나머지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됐다.

     

    검사 결과만 보면 정신이 붕괴하지 않은 게 초인일 정도였다.

     

    “샤를씨.”

     

    “왜.”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대륙을 위해 용사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홀로 싸우느라 힘드셨겠군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샤를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기색이었다.

     

    “…라스 넌 항상 다 아는구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은 용사에서 리셰로 돌아온 톤이었다.

     

    “그리고 항상 날 이해하는 건 너뿐이고.”

     

     

    ―――――――――――

    A : 무슨 말씀이신지. (스트레스 -0)

    B :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스트레스 –1)

    ―――――――――――

     

     

    우선 공감을 기반으로 신뢰를 올리는 게 정답이겠지.

     

    “앞으로도 저는 샤를씨의 편입니다.”

     

    “응. 나도 네 편이야.”

     

    샤를은 기분이 진정되었는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라스. 넌 모르겠지만… 난 네 도움을 많이 받았어. 아, 갑자기 이런 얘기 해도 곤란하겠지.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해. 몸이 다쳤을 때도, 마음이 힘들 때도, 늘 네가 도와줬거든. 처음부터.”

     

    “그랬군요. 용사님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아이, 뭘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고 그래. 그리고 용사… 이런 내가 용사라니, 대체 누가 뭘 보고 고른 걸까.”

     

    샤를이 애매하게 웃었다.

     

    “저기, 라스. 존댓말 쓰니까 어색하다. 그냥 편하게 반말 쓰면 안 돼?”

     

    물론 나도 그녀가 반갑기는 하다.

    함께 고생한 동료기도 하고, 그녀는 내게 도움받았다고 했지만 내 목숨을 구해준 적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리셰지, 전부 샤를이었던 건 아니다.

     

    샤를은 무수한 반복 끝에 지친, 이른바 실패한 버전의 리셰다.

     

     

    [No. 010 : 성검 파괴 99%]

     

     

    그녀가 밖으로 나온 동안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이 엔딩 확률을 보면 알 수 있다.

     

    샤를은 리셰보다 잘 싸울지 몰라도, 내가 굿엔딩으로 가는 길에는 걸림돌이다.

     

    어디까지나 싸우는 건 리셰여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와는 조금 거리를 두기로 했다.

     

    “반말은 조금 이르지 싶군요. 더 친해지면 그때 고려해 볼까요.”

     

    “그, 그래…”

     

    샤를이 아쉬운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번쩍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맞아, 라스. 경고할 게 있어. 중요한 일이야. 내게 미래의 지식이 있다고 추측했지.”

     

    “예.”

     

    “그럼 날 믿을 수 있겠네. 이건 널 위해 하는 말이야. 당장 아셀라 3황녀의 곁에서 벗어나.”

     

    역시 그렇게 나왔나.

     

    “그 여자는 위험해. 곁에 있으면 내일이라도 목숨을 잃게 될 거야.”

     

    “패기가 센 분이라고는 이해하고 있어요. 주치의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니까요.”

     

    “그럼 왜…!”

     

    “샤를씨가 생각하는 위험요소는 제가 제거했다고 판단합니다.”

     

    “뭐?”

     

    샤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잖아요. 지금은 리셰도 황실에 묶여있고,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황실에서는 언제든지 연을 끊고 떠날 수 있다. 내게는 아셀라와 맺은 계약이 있다.

     

    아직은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돌아갈 영지도 좀 더 준비가 필요하고, 제도에서 지워야 할 배드엔딩도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굳이 아셀라를 두고 떠나야 할까.’

     

    지금은 그런 의문이 조금 든다.

     

    뭐, 진짜 혼약대로 아셀라와 결혼한 미래를 그리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나를 꽤 좋아하고 있고.

     

    나도 지금은, 기왕 후작가로 돌아갈 땐 옆에 있어도 괜찮겠다 싶기도 하달까.

     

    ‘물론 그럴 일이야 없겠지.’

     

    아셀라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역사가 어떻게 바뀌어도 자신의 힘으로 기어코 옥좌를 쟁취할, 강하고 능력 있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승계전을 손에서 놓고 은퇴한 나와 함께 후작가로 간다는 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와 아셀라는 가는 길이 다르다.

    타고난 천성 자체가 별세계에 있달까.

     

    “지금은, 이라니. 아, 그렇구나.”

     

    샤를이 뭔가 깨달은 듯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라스, 황실을 떠날 생각이구나.”

     

    “글쎄요?”

     

    예리하기는.

     

    “떠나면 뭘 하려고?”

     

    “생각해둔 일은 있습니다.”

     

    “그래? 있잖아, 라스. 나는 여기서 네리아도 라르크도 아닌 널 만난 게 역시 운명이라고 생각하거든.”

     

    샤를이 눈을 반짝였다. 마치 우물 속에서 마지막 희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저기, 나와 함께 용사 파티에서 싸우지 않을래? 네가 있으면 이번에는, 정말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숫자가 움직인다.

     

     

    ―――――――――――

    · 굿엔딩

    · 용사와 ■■ 45% → 62%

    ―――――――――――

     

     

    추측은 하고 있었다.

    두 번째 굿엔딩이 기슈타와 연관될수록 올라갔던 것처럼.

     

    역시 세 번째 굿엔딩은 리셰, 그리고 샤를과 함께하는 엔딩이었다.

     

    아마 이건 내가 수도 없이 겪었던 미래처럼 용사 파티의 일원이 되어 맞는 엔딩이겠지.

     

    마왕으로부터 대륙을 구한,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할 기회가 주어진 길.

     

    영웅의 루트다.

     

    ‘이 루트의 리스크는.’

     

    리셰가 있으면 공명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고, 샤를이 있으면 거의 무조건 성검이 파괴되어 배드엔딩이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의사다.

     

    세상을 구할 영웅이 아니다.

     

    이번 생은 그렇게 정했다.

     

    ‘바로 거절하면 치료에 지장이 생겨.’

     

    카운슬링이 그 대답은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나는 가볍게, 하지만 진중하게 대답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하군요. 한 가지만 여쭤보지요. 제가 파티에 들어간다면 용사님은 성검을 들고 전력을 다해 싸우시겠나요?”

     

    샤를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야, 그게 내 의무니까.”

     

     

    [No. 010 : 성검 파괴 99% → 99.5%]

     

     

    거짓말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녀는 어떻게든 성검을 부술 생각이다.

     

    아쉽지만, 샤를의 인격은 리셰에게 방해가 된다고 확신하고 치료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다시 한 번 판단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우선 치료에 협조해 주시지요.”

     

    “…알았어. 응, 미안해? 갑자기 나만 아는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놔서… 그래도 얼굴 봐서 좋았어. 자주 얘기하자, 또 불러줘.”

     

    “그건 리셰에게 달렸죠.”

     

    “그도 그렇네. 응.”

     

    샤를은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내게 몸을 기대며 가슴팍에 머리를 묻었다.

     

    “샤를씨.”

     

    “조금만….”

     

    스트레스가 조금씩 떨어지는 게 보인다.

    [성역화] 버프는 도움이 될 테니 잠시 내버려두기로 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헉, 고트베르크 선생님!”

     

    막 잠에서 깬 듯 깜짝 놀라며 침을 닦는다.

    리셰가 황급히 내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나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스읍, 제가 또 무슨 실례를 저질렀나요? 꽤 기세 좋게 마물을 토벌한 것까진 기억나거든요. 언제 월광궁으로 돌아왔나요?”

     

    “진료 경과는 좋습니다. 내용을 설명해드릴게요.”

     

    나는 리셰와의 면담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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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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