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

   *

     “너희는 차세대 용사파티다.”

     반발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명예라고는 생각하더라도, 자신들이 내정되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은 없었다.

     이반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이 미개한 전근대 시대의 풍조 탓이다. 가문의 승계와 함께 직위 또한 승계 받는 귀족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세습이 보편적인 문화라, 용사의 딸은 용사가 되고, 기사의 아들은 기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따라서, 용사 파티의 자녀들인 이들은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다.”

     이반은 단언했다. 다소 싸늘해진 좌중을 훑으며.

     “너희가 노력 없이 얻은 모든 것들은 당연하지 않다. 이자벨, 네가 막시밀리앙의 딸이라 하나 네가 곧 그 나이대의 막시밀리앙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굳이 이자벨만을 언급하기야 했으나 그녀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전쟁 시절과 달리 지금 이 시대는 비교적 평화롭다 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을 보낸 영웅들은 생존하기 위해 언제나 투쟁해야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부모의 휘광을 등에 업는 것만으로도 증명할 필요 없이 우대 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용사 파티는 다만 그들의 부모가 용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용사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용사 파티가 필요하다는 말은 곧, 그 정도의 시련이 도래할 것이란 의미와 같으니까.

     “내 부모는… ‘이 몸’의 부모는 소작농이었다. 나는 민병대로 징병되어 전선에 섰고, 30년간 전장에서 살아남아 여기에 있다.”

     이반은 우묵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 일행은 더 이상 이반의 변한 외모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부터 긴 이야기가 될 게다. 이건 너희의 부모와….”

     이반은 일행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들 뒤로, 젊은 시절의 용사 파티가 비치는 듯했다.

     모두 흩어지고, 누군가는 다신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다른 누군가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이젠 다신 모두 같이 모여 그 시절처럼 음식과 술잔을 나누고, 함께 웃으며 추억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리고 이내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당대의 모습이 보였다. 치기 어리고 부족하지만, 희망을 품으며 웃고 떠드는 이들의 모습이.

     그래, 시대는 무너지고 있는 중이 아니라.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순간일 뿐이라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그리 생각하며.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

     한편 다른 일행에게 시선이 닿았다. 빙의자들. 긴장한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다른 세상의 표류자들이다. 세상의 어떤 법칙과 의도에 의해 흘러들어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어린 실향민들이다.

     이들의 정체는 이 자리에서만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다행히 이 자리의 모두는 믿을 수 있었다.

     휩쓸려 들어왔다 하나,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므로. 이들 또한 이들 나름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모두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와 막시밀리앙, 그리고 마왕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막시밀리앙과 마왕 둘 모두 빙의자였다. 여기 이 자리의 이반, 그리고 다른 몇몇과 마찬가지로.

     이반과 학생들을 제외한다면, 막시밀리앙과 마왕의 출생 자체는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라 하겠다. 용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왕 또한 어느날 나타나 마족을 평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둘의 기이할 정도로 흐릿한 초기 시절을 고려한다면, 빙의자라 말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역사 속에 그런 이들이 드물게나마 존재했다는 것은 고위 귀족이라면 알고 있는 일이니.

     그러나 빙의자들은, 마왕과 용사가 그러했듯이 반드시 역사 속에 무언가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간다. 마치 그러한 위업을 위해서 세상이 준비한 안배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니, 일행의 시선이 빙의자들에게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저씨가….”

     이자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학생들이야 뭐, 빙의자라 해도 별달리 뭘 보여준 것이 없으니 그다지 체감되진 않지만….

     “저, 저는 기사학부 수석인데요….”

     “난 주께서 직통으로 연락도 주는 사이인데, 좀 친한 편이라고 할까.”

     “저는 엘프입니다. 오래 살죠.”

     빙의자라고 해도 별달리 대단한 걸 뭘 보여준 적이 없으니 그다지 체감되진 않지만.

     이자벨은 이상한 소리를 주워섬기는 빙의자들을 무시하고 이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남자는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혈통에 따라 우월성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니다. 거의 명백히, 거의 확실히 전해진다.

     귀족의 자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마력 조율을 타고난다. 그런 자들만이 귀족이 되었고, 그러한 유전형질을 이어가며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그렇게 다진 기반을 중심으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다른 귀족들과의 통혼으로 자식을 낳으면, 그 후손은 선대보다 우월하게 성장한다.

     귀족 사회에서 정체는 곧 퇴보다. 매 세대마다 발전하지 못한다면 도태되고 마니까. 그 성장세를 따라가지 못한 모든 귀족들은 역사 속에 사라졌다.

     이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용사 파티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그들 중 누구도 평범하거나 비루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소작농 출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반이 빙의자라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있다. 소작농 출신의 징집병이 지금의 저 사내처럼 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출신이어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랑 같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막시밀리앙 또한 빙의자였다 한다면 이건… 동향 출신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다른 세상과 이쪽 세상의 혼혈인 셈이니까.

     이자벨은 주먹을 꾹 쥐며 생각했다.

     “그리고 연합 왕국은 5년 안에 반드시 멸망한다.”

     “엑.”

     조용히 이반을 바라보며 납득하던 일행은, 곧 다시 딱딱하게 굳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유진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체하겠는걸. 형님이 아주 각오하고 오셨구만.

     “지난 틸레스 내전에서 말했다시피, 유진은 몇몇 사안들을 ‘정량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건 교차 검증이 끝난 부분이니 이견을 받지 않겠다.”

     “그, 주께서 직접 이야기해준다는 것이….”

     “맞다. 5년. 연합 왕국의 존치가 가능한 시간이라더군.”

     이반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난데없이 너희 나라가 오 년 뒤에 멸망한다고, 그것도 신의 이름을 빌어 내려온 정보란다.

     유진의 정보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은 의미가 없었다. 유진은 사제였으며, 주의 이름을 팔아 거짓을 논했을 경우 직위와 신성력을 박탈 당할 테니. 주로 교단이 아니라 주가 직접.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저것이 정말 신의 계시라는 의미라고 보아야 했다. 신의 이름 아래에 반문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으니, 일행은 조용히 이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5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는 없다. 마왕이 나타날지, 다시 마족들과의 전쟁이 벌어질지. 그러나 지금 이 시점, 연합은 결코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란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용사는 사라졌다. 그가 정말 타락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긴 어려웠으나, 적어도 그것이 완전한 타락으로 귀결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가 정말 스스로를 잃어버렸다면, 지난 틸레스 내전 당시 틸레스는 이미 멸망했을 테니까. 그가 나타나 왕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민심은 분열된 왕가를 이반했을 것이다.

     질 베르는 죽었다. 이것은 다만 한 개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질 베르는 지금 연합 왕국이 지닌 가장 강력한, ‘움직일 수 있는 개인의 무력’이었다.

     칠용장을 죽인 일행 중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으며, 대외적으로 무력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질 베르 한 사람이 유일했으니까.

     에이나르는 드로안을 떠날 수 없다. 드로안은 오로지 그 한 사람의 권위로 유지되는 국가였으므로. 그의 부재는 곧 드로안의 분열을 의미할 것이다. 다만 그 시일이 문제일 뿐.

     알렉산드르는 몇 개월 전 에시디스의 납치 미수에서도 드로안에 손을 뻗은 바가 있다. 무려 허스칼을 이용해 에시디스를 공격한 것이다. 그런 수작이 더 남았다고 볼 때, 에이나르는 본국을 비울 수 없다.

     ‘베올그린을 제외하면 용사 파티의 무력 담당은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정작 그 베올그린은 칼리온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번 공중 전함에서의 이야기를 고려해본다면, 그는 지금 알렉산드르를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연합 왕국에선 칠용장에 비견할 무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족들이 이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가 문제일 뿐.

     정작 마족들 또한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 이 기묘한 균형이 유지되고야 있으나. 균형이 깨지는 것은 필연이다.

     상태창이 이르기를, 그것이 5년이라.

     ‘질 베르. 너 하나가 인류의 5년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반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상태창에 처음 주어진 보상은 연합 왕국의 존치 10년이었다. 질 베르의 죽음과 함께 5년으로 단축되었을 뿐.

     그렇다는 이야기는 곧, 질 베르의 생존. 그 상태가 어떻든 일단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연합 왕국의 수명을 5년 더 연장시킬 수 있다는 의미겠다.

     “크라실로프와 틸레스의 분열은 파탄 전에 저지할 수 있었다. 드로안은 한 차례 저지했으나 아직 온전히 끝난 상황이 아니야. 칼리온은 예상조차 할 수 없고.”

     모든 국가에 ‘용사 파티를 죽이기 위한 안배’가 있다고 가정할 때, 드로안의 에이나르에게도 그와 같은 고난이 하나 있기 마련.

     그러니 지금 당면한 문제는 둘 중 하나다.

     “칼리온과 드로안. 둘 중 하나의 정세를 살펴야 한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가 될 테니.”

     “칼리온으로 가죠!”

     “드로안으로 가요!!”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이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정보를 모아야 할 때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다른 한쪽이 무너지면 그것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연합의 존치가 위협 받을 테니.

     드로안이냐, 칼리온이냐.

     에이나르의 생존이냐, 베올그린의 생존이냐.

     그리고 대체, 그 누가 그들을 해칠 수 있을 것인가.

     ‘질 베르의 경우, 예상할 수도 없던 적들이 나타났듯이.’

     지하에 봉인된 수십 마리의 용을 그 누가 사전에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이 시나리오의 계획은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작용하리란 점이었다.

     용사 파티의 영웅들을 암살할 수단이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이 국가를 양분하기 위해 거병하는 방식.

     드워프 내전에서 이반이 없었다면, 엔리케가 홀로 나서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엔리케는 아비디타스에 대응하기 어려웠을 테니, 그녀를 위한 암살 수단은 드워프 내전 시나리오 자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얀스크 대학 지하에 매립된 신도.’

     이반이 사전에 봉인을 깨고 직접 처리하지 않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힘을 비축한 신이 프리첸카야에 직접 도래했을 것이다.

     왕세자와의 내전을 간신히 봉합한 이 나라 수도에는 그런 사태를 막아설 힘이 없을 테니, 엔리케가 직접 나서야 했을 것이고.

     그때 드워프의 내전이 마무리되어, 아비디타스와 함께 군세를 모아 들이친다면… 크라실로프는 멸망했을 것이다.

     그 두 사건이 각각 개별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본디 세상에 안배된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흘러갔을 터이니.

     ‘드로안과 칼리온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사전에 대응할 수 없다.’

     문제가 그것이었다. 정보의 부재. 크라실로프의 일이야 대내첩보를 통해 사전 감지가 가능했으나, 당장 틸레스만 해도 정보 부족으로 질 베르를 잃고 내전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하지 않았나.

     그러나 실패는 한번으로 족하다.

     이반은 감은 눈을 떴다. 짙푸른 눈동자가 음울하게 빛났다.

     ‘더 이상 같은 상황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반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일어섰다.

     “오늘 자리는 여기서 마치지.”

     “예? 하지만 아직 뭐 정해진 게 없는데요?”

     “당장 해야 할 일은 그게 아니니까.”

     “예?”

     이반은 당황한 일행에게 짧게 대답했다.

     “기말고사 준비를 마쳐라. 언제 움직이든 방학 이후부터 진행될 테니.”

     한 학기에 대형 사건은 한 번만 발생한다. 이것은 ‘상식’의 영역이다. 아카데미는 학기와 방학으로 나누어 에피소드를 진행하기 마련이므로.

     2학기에 틸레스 내전을 저지했으니, 다가오는 겨울 방학에 다음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것은 상식의 범주가 아니겠는가.

     이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일별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니, 이런 얘기를 쭉 하다가 결론이 기말고사라고?”

     “이러고 무슨 기말에 집중을 하란 말야….”

     “아, 근데 우리 형님이랑 말 놔도 되는 거 아닌가?”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왜, 우리 이제 파티끼리 말 놓기로 했잖아.”

     유진의 말에 이자벨은 한숨을 내쉬며 그릇을 정리했다.

     “해보고 말해. 살아서 돌아오면 나도 말 놓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