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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0

       검을 휘둘렀다.

         

       무심하게.

         

       황도는 황폐와 파괴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때 번영하던 도시들이 이제는 그늘진 폐허로 변했다.

         

       검을 휘둘렀다.

         

       잔혹하게.

         

       거리에는 잿더미와 부서진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람에 휘날리는 쓸쓸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검을 휘둘렀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재앙이 도래하여 하늘도 슬퍼하듯, 어둡고 울상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태양의 빛은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로 가려져 대지에 비치는 모습은 참혹한 암울함을 자아내었다.

         

       검을 휘둘렀다.

         

       무참하게.

         

       소멸의 오러에 맞은 식물들은 말라 죽어가며, 수목들도 고여있는 물과 영양을 갈망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엄마, 엄마…!

         

       아이의 애절한 울음이 들려왔다. 내 눈동자는 끄떡하지 않았다.

         

       ─어, 어떡해…! 아들, 아들!

       ─엄… 마… 나 아파….

         

       떨리는 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다.

         

       ─대체, 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겐 딸이 전부였다고…!

       ─아파…! 아파요…….

       ─살고, 싶, 어…….

         

       곳곳에서 고통을 앓는 소리와 절망으로 인한 비명이, 몸부림이, 간절함이 솟구쳤다.

         

       부족했다.

         

       겨우 이 정도로는 그녀가 있는 하늘에 닿지 않을 것이다.

         

       비명이라는 진혼곡이, 그녀를 위한 추모곡이 더 필요했다.

         

       검을 휘둘렀다.

         

       가혹하게.

         

       막을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들의 얼굴에서 무력함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검을 휘둘렀다.

         

       나는 비명을 연주하는 지휘자였다.

         

       검을 휘둘렀다.

         

       내 지휘에 따라 비명이 합창을 이루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하나의 지옥이 되고자 했다.

       

       사람들의 지옥이 되어주기 위해, 절망이 되어주기 위해 피를 보았다. 그녀를 위한 나의 심연은 나날이 깊어져만 갔다.

         

       시체 더미가 쌓여 갔다.

       

       죽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감정이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이유를 알고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멸망해 가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다. 누가 어떤 짓을 저지르든 무슨 상관이겠나.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대륙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새하얗던 순백의 오러는 검게 변해있었고, 내 손과 얼굴에 묻은 피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또한, 모든 생명이 져버려 더 이상 그녀에게 바칠 진혼곡은 남아 있지 않았다.

         

       탁기에 물든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울적한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솨아아아.

         

       내게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이 일어났던 그날처럼.

         

       솨아아아.

         

       모든 것을 잃은 내가 의지한 그녀를 잃었던 그날처럼.

         

       솨아아아.

         

       비가 내렸다.

         

       “킬킬, 1년도 지나지 않아 대륙의 인간들을 전부 몰살시킬 줄이야. 과연 진 바렌베르크구먼.”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익숙한 얼굴, 초월 마법사가 있었다. 나는 즉시 새까만 오러를 펼쳤다.

         

       “이젠 오러의 색도 달라진 건가. 마왕이 되었구나.”

         

       초월 마법사는 킬킬, 웃으며 내게 제안했다.

         

       “이 모든 걸 바로 잡을 기회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보지 않겄어? 거래를 하는 거여.”

         

       나는 눈을 얕게 뜬 채 초월 마법사의 눈을 바라봤다. 무슨 목적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거래로 얻는 너의 이득은 뭐지?”

       “마법의 연구 성과.”

       “인제 와서 거래를 제안하는 이유는?”

       “너 또한 이 세계의 끝을 봤으니까.”

       “…….”

         

       수백 년을 살아온 초월 마법사의 제안. 여러모로 의심이 들지만, 인제 와서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좋다, 거래하지.”

         

         

       * * *

         

         

       초월 마법사와의 계약. 여신에게 맹세까지 하는 거래를 통해 시간을 되돌렸다. 시점은 내가 노예로 팔린 직후.

         

       “따라오렴.”

         

       기쁘게도, 다시 그녀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감정에 매몰되지 않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삶은 예정대로, 내가 알던 그대로 흘러갔다.

         

       데카르트의 모두에게 배척받았고, 믿었던 페르시아 후계자에게도 배신당했다. 아무것도 없던 사람에겐 그 무엇 하나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걸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네. 네가 있었지.”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나는 프란체가 내게 더욱 의지하도록 의도했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내가 전부가 되도록. 나중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그녀는.

         

       “성녀에게 복수할 거야.”

         

       언제나 같은 선택을 했다. 마치 그녀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똑같은 결말이 반복됐다.

         

       “킬킬, 아무래도 실패한 거 같구먼.”

       “다시 돌려라.”

       “괜찮은겨? 영혼이 소모되는데.”

       “상관없다.”

       “그렇다면야.”

         

       딱! 초월 마법사에 의해 시간이 되돌아갔다. 시점은 이전과 똑같았다.

         

       이번에는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그녀의 선택을 바꿀 수 없다면 매력적인 선택지를 늘리자는 목적으로.

         

       “진, 이대로 너와 도망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공녀님의 선택이라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

         

       생기없는 얼굴의 프란체는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하더니.

         

       “됐어. 이대로 도망칠 순 없지. 나는 내 미래를 가로막은 성녀에게 복수할 거야.”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그렇습니까.”

         

       이번에도 똑같이 흘러갔다. 그녀는 암살을 실패했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황도의 버려진 숲으로 도망쳐왔다.

         

       “각인으로 명한다. 여기서 떠나렴.”

         

       똑같은 장소. 피할 수 없던 죽음. 돌리지 못한 그녀의 선택. 어째서일까? 왜 그녀는 나를 이용하지 않은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내게 초월 마법사가 다시 찾아왔다.

         

       “흐음, 이번에도 실패한 거 같구먼?”

       “…다시 돌려라.”

       “이번에 돌리면 세 번째인디?”

       “상관없다.”

         

       시간을 돌려도 그녀는 정해진 운명처럼 죽음을 맞이했지만, 수확은 있었다. 결과는 똑같았더라도 과정은 달랐으니 말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그녀를 살릴 수 있을 거다.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다.

         

       나는 내 영혼을 소모해 다시 한번 시간을 돌렸다.

         

       하지만 과정은 달라져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프란체에게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주고 다른 방법을 제시할 순 있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향해 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다시 돌려라.”

       “몇 번째인지는 기억하고 있는겨?”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으로 900번.”

       “그게 어쨌다는 거지?”

         

       초월 마법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휘저었다.

         

       “괴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시간을 돌릴 수 있을 줄이야. 그려, 원할 때까지 계속 돌려주지.”

         

       딱!

         

       시간은 되돌아갔다.

         

       실패하고, 실패했다. 수십을 넘어 수백에 도달하고, 수천을 넘었을 땐 지금이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

         

       혼란이 왔다.

         

       일의 원흉이 되는 성녀를 암살했다. 권력의 중심인 황태자와 카서스 페르시아를 죽였다.

         

       프란체의 죽음과 연관된 모든 이들을 제거했지만, 그녀의 결말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불만족스러운감?”

       “다시 돌려라. 이번에는…….”

       “아니, 이젠 끝이여.”

       “뭐?”

         

       살기를 담아 초월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리 쳐다보지 말고. 네 영혼이 이제 버티지 못한다는 거여.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린 줄 알어? 2천 번이여, 2천 번. 여신이 와도 이렇게는 불가능허다고.”

         

       그런가. 이제 기회는 없는 건가. 초월자라 해도 인간. 주제에 맞지 않게 정해져 있던 그녀의 운명을 바꾸려는 것부터 잘못됐던 걸까?

         

       죽었던 감정이 더욱 심연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런디 방법이 있으.”

       “뭐지?”

       “세계를 넘어가는 거여.”

       “…세계?”

         

       초월 마법사는 씩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간다면 운명이 뒤틀릴 거여. 그럼 정해진 죽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어뗘, 한 번 해볼겨?”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게 되니 운명이 고쳐진다는 건가. 마법에 대해 자세하겐 모르지만, 이해가 갔다.

         

       “대가는 뭐지?”

       “너의 모든 것.”

       “…모든 것?”

         

       미간을 찌푸리자 초월 마법사는 픽 웃었다.

         

       “영혼, 생명, 존재. 이 세 가지다.”

         

       말도 안 되는 대가지만…….

         

       “받아들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달리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프란체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건가?”

       “아니, 가는 건 너여.”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킬킬,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초월 마법사.

         

       “이곳에 있던 존재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 불순물 취급을 받아 버틸 수 없지. 하지만 너라면 버틸 수 있을겨.”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간다고 해서 프란체의 운명이 바뀌나?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초월 마법사는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을 이었다.

         

       “영혼 결속이여.”

       “영혼 결속?”

       “그려.”

         

       무슨 소린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구먼? 좋아, 설명허지.”

         

       딱! 초월 마법사는 손가락을 튕기더니 새하얀 연기를 만들었다.

         

       “이게 네 영혼이고 저건 마녀의 영혼이여. 이 두 개를 결속시켜서 하나로 만드는 거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초월 마법사는 “이제 알겠구먼?”하고 씩 웃었다.

         

       “네 운명이 달라지면 마녀의 운명도 달라질 거여. 2천 번으로도 바꾸지 못했던 결말이 바뀔 테지.”

         

       나는 살기를 담아 엄중히 물었다.

         

       “왜 그걸 처음부터 제안하지 않은 거지?”

       “마법이 완성되지 않았으니께.”

         

       초월 마법사는 두 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원했고, 너도 원했던 궁극의 마법이여. 네가 2천 번 동안 회귀하지 않았으면 수백, 수천 년은 더 기다려야 했던 마법이지.”

         

       내가 회귀한 2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마법을 완성했다는 건가.

         

       “불안정한 건 없나?”

       “초월자만 가능하다는 점.”

       “…그런가. 상관없군.”

         

       인제 와서 거절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질문이 있다.”

       “뭐지?”

       “내가 돌아올 순 있는 건가?”

       “킬킬, 당연허지.”

         

       초월 마법사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준비만 하면 문제없이 돌아올 수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구먼.”

         

       이 망할 마법사가 무엇을 원해서 2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마법을 만든 지 모르겠지만, 이미 한배를 탄 상황. 끝까지 신뢰하는 수밖에 없다.

         

       프란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다.

         

       “내가 돌아오는 건 어떻게 할 셈이지?”

       “킬킬,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여.”

       “…….”

       “궁금한 거 같으니 짧게만 알려주지.”

         

       초월 마법사는 검지를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건 세계의 인과율을 어기는 마법. 영혼이 결속된 사람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서로의 운명에 간섭허지. 내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넌 내가 정한 시간의 이 세계로 돌아올겨. 원하지 않아도 말이지. 킬킬.”

         

       그다지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이해했다. 마법을 바로 실행해라.”

       “그전에 시간을 한 번 더 돌려야 혀.”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는 시간을 돌릴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초월 마법사는 비릿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갈가리 찢긴 네 영혼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아주 살짝만 돌릴 것이여. 그 마녀가 죽기 직전으로. 그때 시간을 멈추고 둘의 영혼을 결속시킬 거여.”

         

       그런 거였나. 납득했다.

         

       “빨리 시작해라.”

       “급하기도 혀라.”

         

       킬킬, 웃은 초월 마법사는 손가락을 튕겨 시간을 돌렸다.

         

       시점은 황도의 버려진 숲으로 도망쳐 온 직후. 여기서 내가 프란체에게 애원해야 하지만…….

         

       “공녀님.”

       “…뭐니?”

       “제가 모든 걸 바꾸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

         

       “킬킬, 시작허지.”

         

       우웅!!! 거센 마력이 휘몰아치며 어둡던 하늘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간절한 영혼의 노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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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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