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0

        

         똑…… 똑….

         

         “…….”

         

         카이쥰의 시선이 바닥을 나뒹구는 가죽 지갑과 야금야금 방울져서 떨어지는 피를 구경하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흐르는 게 자신의 생혈이기에 얼떨떨했다거나, 찢어진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거슬려서 반응한 건 아니고.

         

         대체 얼마나 힘을 실어서 던졌길래 저런 모난 곳도 없는 물건에 살가죽이 벗겨졌나 새삼 신기해서.

         또 지갑의 주인인 에다마츠 상임 이사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객관적으로 가늠해보고자 일종의 지표로 삼으려던 것이었으니.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으니까.”

         

         “이사님의 청력에는 아무 이상이 없으십니다. 반응이 격렬하신 걸로 보건대, 제가 한 말도 아주 제대로 들으셨다고 사료됩니다.”

         

         흐르는 피를 닦아내는 대신 무심하게. 찢어진 쪽 안구를 이물질이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그냥 감아버린 카이쥰이 대꾸했다. 물론 명령받은 대로 방금 했던 말을 충실히 되풀이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렇게 안에서 애지중지 감싸고 돌아봐야. 현재 이사님께 부여된 감찰사 권한과 가용 병력을 고려하면 회장님은커녕 소스케(蒼甫) 사장님이 인사 재배치만 요청하셔도 거절하기 곤란한 상황이시지 않습니까?”

         

         “…!!”

         

         ‘뭐, 이번 초청 사교회는 딱 카사네님 수준에서 교류할 법한 인물들만 오실 예정이니 상관은 없지만요.’

         

         머리속으로는 입수한 참석 명단의 면면을 되새기면서도.

         입으로는 대담하게 최고 상사의 신경을 긁어대는 행동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즉흥적인 애드리브라거나 내친 김에 지르는 폭언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철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심리전인 만큼 마음은 찻잔에 담긴 물처럼 평온했다. 단지….

         

         달칵…!

         

         ‘이런.’

         

         회장에 이어 장남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격분한 에다마츠가 아예 등잔을 거꾸로 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 개인 공간이나 다름없는 침실에 방문한 탓에 주변에 흉기로 쓸 물건이 널리고 널렸단 점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두들겨 맞는다고 이 자리에서 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의식을 잃어 변명할 기회조차 없이 내쫓기고 제명당하는 건 그다지 예쁜 그림이 아니었다. 야심가의 추한 말로에 가까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공식적인 석상에서 함께한 모습을 남겨놓는 게, 아나스타샤 연구원님의 신상을 보호하는데 더 이롭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갑작스레 저희 쪽에서 참석을 통지한 만큼 의심을 누그러트리는데는 파트너가 있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뚝! 하고 내려쳐지기 직전의 둔기가 카이쥰의 머리 바로 위쪽에서 멈췄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번들거리는 황동 빛깔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게 잘못 직격했으면 의식이 날아가기 전에 뇌가 곤죽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누구나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혀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맞아 죽을 위기를 넘긴 사람이라기엔 그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왜? 애당초 여기 올 때부터 각오했던 과정이래서? 어느 정도는 맞다.

         가혹하지만 찬란한 미래 인생 계획을 위해서는 참는 게 맞으니까? 그럴지도.

         우습게도, 정답은 진짜 두려운 걸 겪어봤기에.

         

         얼굴 위에 덧쓴 가식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은 오히려 다루기 쉽다. 반면 허락한 적도 없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추고 심장을 틀어쥐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이 방패막이로 쓸 예정이었던 상임 이사까지 홀려버린 솜씨는….

         

         거기까지 생각한 카이쥰은 조용히 고개를 털었다.

         쾌락이라면 역치가 천장을 뚫을 정도로 지겹게 경험해봤을 인간의 혼을 어떻게 빼냈는지는 궁금했지만 때가 아니다.

         

         지금은 카사네 아마기를 잡아먹는데 전력을 다해 집중할 시간.

         아나스타샤의 솜씨와 비법,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는 몰라도 적어도 이번에 한해서는 돕겠다는 약속을 지켜줄 터이니. 일단은 그녀가 움직일 여건을 만들어줘야 할 터이다.

         

         “…손을 멈추셨으니, 제 건방진 말을 들어주실 의향이 있으시다 믿고 계속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에다마츠 이사님의 도량이 넓고, 저 같은 녀석에게도 기회를 주실만큼 개방적인 분이신 건 감사하나…… 이대로는 회장님의 휘두르기 좋은 지팡이. 딱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흥…! 입에 발린 말은 치워라. 그리고… 그렇게까지 충실하게 행동한 적은 없다.”

         

         “단순히 짓궂게 반항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모시는 보스의 성격이 괴팍한 건 문제가 아니다. 외려 문제가 터져 나오지 않는 이상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따지고 들지 않는 대범한 태도를 가진 게 그에게는 더 형편 좋았으니까.

         

         허나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수심? 반감만 있을 뿐, 그것보다 중요한 향상심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는 절대 좋지 않았다.

         

         결국 아마기 형제 자매들의 성장을 괴롭히고 방해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찍어 누르지 않으면 패배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기에, 슬슬 자신과 보조를 맞춰 사냥에 나서 주겠다는 보증이 필요했다.

         

         “델타 연구소 붕괴의 책임을 모조리 카사네님께 전가하겠다는 계획에 변함은 없습니다. 단지… 그렇게 해서 공백이 발생한 사업체들을 삼키기 위해서는 이사님께서 적극적으로 회장님과 담판을 지어 주셔야 합니다.”

         

         아나스타샤를 만나고 나서 이상하게 오츠게 회장과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질겁하는 걸 몇 번이고 봤으나, 카이쥰은 구태여 그 얘기를 꺼냈다.

         

         비공식적인 라인은 몇 개고 있겠지만 현재 공공연하게 ‘별장’을 방문할 수 있는 인원은 에나마 내부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아직 자신이 겪어본 적이 없어서 쉽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금 카이쥰이 보기엔 그 막대한 권리를 내다버리는 건 바보짓에 불과했다.

         

         “……벌써 누님이 순순히 몰락한 것처럼 얘기하는군. 자신감은 높게 산다만.”

         

         “이미 과분한 조력을 많이 얻어서, 실패하는 미래 따위는 보이지가 않는군요.”

         

         포위망 형성에 동원되는 차세대 추적자만 해도 수십. 경비 인력을 가장해 사교회장 주변을 에워쌀 무장 병사는 기백幾百.

         

         그 뿐만이랴?

         주최자인 카사네는 에다마츠가 직접 억제할 테고, 경비 체계는 카이쥰 본인이 여러모로 휘저어 놓을 예정이며,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추출자(Extractor) 역할을 바닥 모를 요녀가 친히 맡아 주기까지.

         

         잘만 풀린다면 파티 분위기가 미처 무르익기도 전에 찬물을 끼얹고 끝낼 수 있으리라.

         측근 참모로서의 데뷔전이나 마찬가지인 걸 고려하면 과분한 기반을 가진 채 시작하는 셈이었다.

         

         “뭐, 그건 됐다. 그렇지만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게 있군.”

         

         “……무엇입니까?”

         

         ‘저는 이만큼 진심입니다!’ 라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취하고자 지혈은커녕 목을 타고 흘러내린 피에 양복이 엉망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렸지만… 슬슬 출혈량이 위험한 수준에 도달하기 직전이라 초조해진 그가 되물었다.

         

         앞으로의 방향성도, 포부도, 먼저 행동해야 할 필요성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나? 혹시 자신이 중간에 빼먹은 게 있었나? 여기까지 와서 얼빠진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남겨서는 안 되는데….

         

         참 불쌍하게도.

         맹렬하게 돌아가던 카이쥰의 두뇌는, 이어진 상사의 말을 듣고 일시적 사고 정지 상태에 빠졌다.

         

         “난 아나스타샤를 알리바이용 파트너로 취급할 생각도. 사진 몇 장 남기겠다고 공식 석상에 노출시킬 마음도 없다. 데려가야 할 구실이 그것뿐이라면 여기 남겨두는 게 낫겠군.”

         

         “…………허?”

         

         ‘이런 개떡 같은…!!’

         

         잠시간, 말문이 막힌 그가 속으로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손 좀 빌려달라고 머리를 숙이러 갔을 때, 그 마녀가 상임 이사를 설득해오는 걸 조건으로 내건 이유를 이제 알아챘다. 사람을 얼마나 매료해 놨길래, 밖에 내보이기도 싫어할 만큼 싸고 도는 것일까.

         

         심지어 방금 막 에나마 코퍼레이션의 총수가 되는 기나긴 여정을 함께 가자고 설득한 참인데.

         

         이럴 거라면 거래 조건으로 본인을 퇴직시켜줄 건 왜 요구한 건지… 중간에 끼인 자신이 개고생하는 모습을 보고자 가지고 노는 거였나?

         

         ……도대체 얼마나 악질인 걸까, 이 여자는…!

         

         카이쥰의 부동 자세가 휘청이며 무너졌다.

         찌릿… 하고 머리가 울리고 눈앞이 흐려지는 게 진짜 한계였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남자를 망치는 건 여자라더니.

         

         오냐, 누구는 모가지를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걸었는데.

         배부른 도련님의 최대 걱정이 겨우 저거라면, 이쪽도 대의니 뭐니 지껄일 게 아니라 수준에 맞는 원초적인 충언을 돌려주겠다는. 이판사판 순도 100% 본심을 그 또한 여과없이 털어놓았다.

         

         “그… 여인을 진심으로 배필로 맞이하고 싶으신 거라면, 그런 식으로 무작정 속박하시는 것보다는 ‘동등한 반려자’로 대우한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상대가 뭐 크레딧 써서 산 창녀도 아니고….’ ‘이게 진짜 떠들어야 할 대화 주제냐.’ 라고 독하게 몇 마디 덧붙이려다가, 에다마츠가 눈살을 찌푸린 채 고민하기 시작한 걸 본 카이쥰이 냉큼 입을 다물었다.

         

         과연 이딴 논리가 통하겠냐 싶었는데, 외려 진지하게 먹힌 게 그의 마음을 한층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쉬운 쪽이 아양을 떠는 건 당연하지만… 왠지 억울했다. 그것도 더럽게, 많이.

         

         침묵, 고요, 그리고 누군가에겐 한없이 무거운 고뇌.

         어찌 보면 앞서 지나간 메가 코프 임원들을 차례차례 담가버리자는 제안을 들은 것보다도 더 심각한 저울질이 지나가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 이만 나가보도록.”

         

         “……예, 늦은 시간까지 이사님의 수면을 방해해서 송구합니다.”

         

         이윽고, 간신히 원하던 대답을 얻어낸 흑막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퇴장했다.

         

         원래는 작전을 검토할 예정이었지만, 이 거지 같은 위기를 무사히 넘긴 자신에 대한 상으로 오늘은 그냥 얌전히 밀린 수면이나 취하겠다는 애잔한 결심과 함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악질 분탕(의도하지 않음).

    뒷얘기, 외전에 가깝지만 꼭 필요한 내용이었기에 이 타이밍에 나와버렸습니다.
    미녀 스파이(?) 아나스타샤의 얘기는 다음편부터 다시.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