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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0

   루시의 당부를 마음 깊은 곳에 새기고서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페이비의 눈가는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허술한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항시 성녀로써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교육받았기에 어지간하면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대사가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에.

   

   ‘네가 뭘 했든 신경 안 써. 어찌되었든 간에 넌 허접 성녀니까.’

   

   처음에 허접 성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페이비는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주신 교회의 성녀인 페이비의 면전에서 대놓고 모욕을 내뱉는 이는 흔치 않았으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곤란하다 생각하기도 했고.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말처럼 들려 뜨끔하기도 했었다. 아주 약간은 화가 나기도 했었지.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페이비에게 허접성녀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감사한 단어였다.

   

   그는 페이비를 비하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긍정해주는 단어였다.

   

   왜냐하면 루시는 페이비가 그 근간부터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도,

   

   주제를 모르고 신의 자비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끝에 악신의 유혹에 흔들려 그에 손을 내미는 멍청한 행동을 했단 걸 알고도.

   

   페이비가 성녀에 걸맞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준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을 돌이켜 보던 페이비는 또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으아. 어떡하죠? 눈시울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게 터져 나오면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알른 영애의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엉엉 울게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페이비는 자신이 오열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멍청한 페이비. 당신은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아르마디의 사도께서 당신이 저지른 업을 알고도 긍정을 해주었다면 감사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사죄를 했어야 했을 텐데 거기서 눈물을 터트리다니!

   

   눈물을 흘리며, 흐어엉대는 소리를 내며, 코를 훌쩍이면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늘어놓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페이비는 감동보다 더한 수치심에 눈물이 쏙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페이비는 손부채질을 하며 벌개진 얼굴을 식히며 한숨을 내뱉었다.

   

   울음이 멈췄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아닌 것 같아요. 분명 이 치욕스러운 기억은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닐 게 분명하니까.

   

   다른. 다른 생각을 하죠. 이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그래요. 알른 영애께서 저에게 해주신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거에요.

   

   그러다보면 이 수치스러운 기억도 조금은 희미해지겠죠.

   

   그녀의 방에서 나오기 전 루시는 페이비에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했다.

   

   ‘허접 쓰레기 교회에 관해 싫은 게 많겠지. 바보인 주제에 이곳저곳 쏘다니는 허접 성녀니까 궁금한 것도 많을 거고. 그래도 아직은 아냐. 섣불리 움직이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루시는 위험해질 수 있단 말의 상세한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페이비는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섣불리 발을 움직였다가는 주신 교회에 의해 그대로 지워질 수 있다는 의미겠죠.

   

   아무래도 주신 교회는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어둠을 품은 장소였나 봐요.

   

   페이비는 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지만 그렇다 해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선인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곳에는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주신 교회의 어둠은 페이비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체계적이었다. 어쩌면 빛을 집어삼켜버릴 정도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죠.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말씀을 만들어내 아무것도 아닌 제가 성녀로써 세워질 정도니까요.

   

   분명 그 어둠은 한치 앞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겠죠.

   

   …만약 알른 영애께서 기다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페이비에게 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했다.

   

   만약에 아르마디의 사도인 루시가 없는 상황에서 그 사실을 마주했다면 페이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움직였으리라.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이 날아가게 될 지라도 그리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르마디에 의해 성녀로 간택된 이의 의무라 생각하면서.

   

   허나 지금 페이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르마디의 사도인 루시가 기다리라고 이야기했으니까.

   

   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의 사랑을 받는 그녀의 말이니 그 뜻은 주신의 뜻과 맞닿아 있을 터.

   

   드높으시며 지혜로우시며 선하신 아르마디께서는 먼미래의 풍경을 보시며 무언가를 안배해 두었을 게 분명하니 페이비는 의심하지 않고 그 뒤를 따르면 족했다.

   

   그를 다시금 생각하고 있으려니 어느 정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페이비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양 손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좋아요. 이제 기숙사에 돌아가서 씻고…

   

   “성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버릇처럼 고개를 돌린 페이비는 예전부터 자신을 잘 따르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안… 크흠. 안녕하세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네려던 페이비는 자신의 쉬어버린 목소리에 놀라 한 번 헛기침을 하고서 미소와 함께 대답을 했다.

   

   알른 영애의 앞에서 얼마나 우렁차게 울었으면 아직도 목소리가 쉬어 있는 걸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는 길에 목에 회복마법이라도 사용할 걸 그랬네요. 경황이 없어도 너무 없었어요.

   

   “…괜찮으세요?”

   “네?”

   

   괜찮냐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페이비는 지금 자신의 얼굴 꼴을 떠올리고는 여자아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이해했다.

   

   지금 제 겉모습은 무척 엉망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본다면 걱정할 만도 하네요.

   

   “물론이에요. 괜찮아요.”

   

   그래서 페이비는 최대한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페이비는 최근의 그 어떤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으니 이는 분명한 진실이었다.

   

   허나 여자아이의 걱정 어린 얼굴은 쉬이 풀릴 줄을 몰랐다.

   

   제가 억지로 강한 체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저 진짜로 괜찮은데.

   

   페이비는 혹여나 여자아이가 오해를 할까 싶어 최대한 설득을 해보았지만 쉬어버린 목소리로 내뱉는 모든 이야기는 여자아이의 오해를 더 할 뿐이었다.

   

   *

   

   ‘억울해요.’

   

   내가 평소에도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내뱉기는 하지만 이번에 한해서는 억지가 아니었다.

   

   난 정말로 억울했다.

   

   아니. 대체 왜 내가 페이비를 괴롭혔다는 소문이 아카데미 전체에 퍼진 거야?!

   

   나 진짜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이건. 이건 뭔가 이상하잖아! 내가 페이비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자신이 가짜 성녀라는 사실을 알고 상심할 뻔한 애한테 자신감 채워줬고.

   

   거기에다 혹시나 먼저 나서서 사고를 저지를까봐 앞서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 조언까지 해줬어.

   

   어느 하나 페이비를 위하지 않은 게 없는데 왜 내가 페이비를 괴롭혔단 이야기가 도는 거냐고오오오!

   

   내가 이 소문에 알게 된 경위는 비시였다.

   

   오늘 아침에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녀석이 찾아와서는 ‘알른 영애. 성녀님께 뭔갈 하셨나요?’ 라고 물어봤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했다 그랬더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이 들은 걸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페이비를 방으로 데려가서 괴롭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처음에 들었을 때는 너무도 황당해서 아무런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추측가는 부분이 있었다.

   

   어제 내 방에서 빠져나갈 때에 페이비의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까.

   

   내 방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던 페이비가 방에서 나올 때는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있고 머리는 산발인 데다가 목소리는 쉰 상태다?

   

   충분히 의심할 여지가 있지.

   

   이런 내 추측은 애버리를 추궁함에 따라 현실이 됐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내 평판은 유능한데다 예전에 비하면 성격도 순해진 썅년에서 유능하긴 하지만 망나니 버릇은 버리지 못한 희대의 개썅년으로 퇴화했다는 모양이었다.

   

   겁에 질려서 더듬거리며 그리 이야기하는 애버리를 보고 있자니 절로 짜증이 차올라서 난 그녀에게 무어라 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너는 그걸 듣고만 있었던 거야?♡ 정말로?♡ 어떡하지이♡ 좆밥 영애가 너무 무능해서 내 입이 가벼워 질 것 같은데♡”

   “아뇨! 저도 나름 최선을 다해 알른 영애를 옹호했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렇지만 이 소문이 시작된 건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어서 한계가! 제발 믿어주세요!”

   

   애버리가 필사적으로 날 옹호했건 아님 남들이 날 욕하는 걸 들으면서 속으로 웃었건 간에 이 소문은 아카데미 내부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막 수업이 시작 되었을 무렵에는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아는 것이었던 이 소문이 수업이 진행 됨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고,

   

   이윽고 아카데미의 점심 시간이 되었을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소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지금 나는 아카데미 내외부를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주신 교회의 성녀님을 괴롭힌 희대의 쓰레기가 되어 있단 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하네요.’

   

   루시의 몸에 들어오고 난 후로 타인의 적의어린 시선에 익숙해진 나지만 지금은 좀 심각했다.

   

   그나마 조이가 한 마디를 해 준 건지 그녀를 중심으로한 영애 무리는 날 비난하지 않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페이비라는 아이돌을 괴롭혔다는 것은 그만한 문제였던 것이다.

   

   정작 나는 페이비에게 나쁜 일 하나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겠느냐? 페이비 그 아이가 해명한다면 해결될 일이니.>

   ‘페이비가 해명한다고 될까요.’

   

   제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시나리오가 떠오르는데요?

   

   내가 아무 일 안했다고 페이비가 설명하더라도 분명 다른 사람들은 성녀님께서는 자신에게 죄를 범한 자조차 용서하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날 욕하는 시나리오가

   

   성녀님을 대신해서 저 쓰레기 같은 년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있단 말이에요!

   

   으으으. 이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모습을 추스른 후에 페이비를 돌려보낼 걸.

   

   이제 와서 후회한다 한들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은 바뀌지 않았다.

   

   하아. 어쩌겠냐. 익숙해져야지.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눈살 찌푸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말야.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도 날 향한 시선이 그치지 않아서 체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 스테이크는 부드럽고 소스는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고기를 씹을 때마다 텐션이 떨어지는 걸까.

   

   “알른 영애.”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미안함이 잔뜩 담긴 페이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같이 식사를 해도 될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애당하는 메수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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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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