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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0

   하덴하르츠에서 생겨난 세계 침식.

   거기에 맞서게 된 크라슈는 정작 할 일이 그다지 없었다.

     

   “괜히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러자 크라슈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시체 쥐가 경고했다.

   크라슈도 그 말대로 딱히 손대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하덴하르츠 산맥에 퍼진 에벨아스크의 백골 군단이 침식종들을 죄다 박살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벨아스크는 네크로맨서의 저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백골 군단은 에벨아스크의 힘이 떨어지기 전까지 죽지 않는 불사의 군단이다.

     

   그러니 침식종이라고 해도 백골 군단 앞에 별수 없었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움직이는 에벨아스크의 시체들은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었다.

     

   제각기 다른 특성이 있는 그들은 저마다의 팀을 이루며 침식종들을 철저하게 사냥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멀리서 보고 있던 크라슈는 왜 제국이 에벨아스크의 뒤를 그토록 집요하게 밟았는지 깨달았다.

   이건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아서도 에벨아스크는 유용하게 다뤘었으니까.’

     

   시그린 입장에서는 에벨아스크를 잃은 것에 화가 나 손수건을 뜯고 있으리라.

   그러는 사이, 산 저 너머에 8호가 비추었다.

     

   그녀는 크라슈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금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부탁대로 에벨아스크에게 기댈 벽이 되어 주었으니 그런 것이다.

     

   참, 자기 의지가 강한 시체였다.

     

   “크라슈 님.”

     

   그러는 순간 크라슈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펠레이가 서 있었다.

     

   그는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양 주먹을 꽉 쥐고는 그 입을 열었다.

     

   “……저번 제국 무투 대회에 밤까마귀가 참가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펠레이는 결심한 표정이었다.

   크라슈가 방금전에 한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눈치챘겠지.

     

   “펠레이.”

     

   크라슈는 그를 돌아보며 말을 툭 던졌다.

     

   “무투 대회 우승 못 한 건 네가 약한 게 아니라 상대가 강한 거였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챈 펠레이의 눈이 한차례 커다랗게 커졌다.

   그러고는 이내 그의 입가에 천천히 웃음이 그려졌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크라슈는 그 말을 마치며 고개를 들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황색 빛이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식종들이 바스라 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동시에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을 여명 빛으로 물들어 갔다.

     

   “크라슈.”

     

   어느새 다가온 하링이 크라슈의 이름을 불렀다.

   옷 여기저기에 침식종의 피가 튀어 있는 그녀는 그녀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래.”

     

   하링이 비수를 쥔 손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 쌓이고 싸였던 오랜 트라우마를 해결해 주기라도 한 듯 하늘은 선명하게 빛났다.

     

   “세계 침식이 닫혔다.”

     

   광도제가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덴하르츠의 거리는 사실상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세계 침식 등급은 크라슈의 예상대로 무려 8성급.

   만약, 라이의 전투가 더 길어졌다면 9성급까지도 성장할 수 있었던 세계 침식이었다.

     

   덕분에 일검은 8성급 세계 침식의 주인과 맞서느라 전력을 쏟았다.

   아무리 그들이 발하임이 자랑하는 일검이라 할지라도 민가의 피해 없이 주인과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결국 그들은 주인을 억지로 민가 쪽에서 끌어내어 산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8성급 세계 침식인 것치고는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하덴하르츠의 북해빙관 같은 경우에는 거의 멀쩡하게 보존되어 있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이쪽에는 4황녀와 1왕자까지 있었으니 최우선으로 지킨 결과였다.

     

   ‘결국 사람에 우선순위라는 건 존재하는 거겠지.’

     

   크라슈는 시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평민이었다.

     

   “으흐흑, 아빠, 아빠.”

   “내일 산에 놀러 가자며. 그렇게 말해놓고 가면 어떡해.”

   “엄마, 제발, 저희 엄마 괜찮죠! 괜찮은 거 맞죠!”

     

   사실 준귀족이라 칭해지는 기사들도 죽은 수가 적지 않았다.

   하덴하르츠의 기사들도 세계 침식과 맞서느라 피를 쏟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평민의 수가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대피를 위해 동굴에서 일반 시민들을 데려온 펠레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같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펠레이의 얼굴에 스친 것이다.

     

   하지만 크라슈의 표정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지독하고, 토악질이 나올 만큼 이런 상황들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런 것에도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들이밀어진 현실은 늘 누군가에게 죽음을 강요한다.

   세상 모든 사람을 지키겠다는 꿈과 같은 이야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광도제를 놓아주었다면 사상자가 줄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놓아주면 세계 침식의 난이도가 이만큼 올라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를 놓아주었다간 이와 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상자들이 나왔을 것이다.

     

   ‘역겹네.’

     

   어째선가 크라슈는 한차례 헛웃음을 삼켰다.

   결국 자신도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 하는 처지라는 것을 되새긴 것이다.

     

   [ 죄책감이라도 가지느냐. ]

   “아쉽게도.”

     

   미약한 자기혐오를 할 뿐, 크라슈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은 슬퍼할 역할이 아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고, 당장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지휘를 내려야 할 귀족의 위치였다.

     

   그게 이 세계에서 귀족의 역할이었다.

   슬픔을 짊어지기보다 슬퍼하는 이들이 일어날 수 있게 길을 다지는 역할 말이다.

     

   “크라슈.”

     

   크라슈가 부름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검푸른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저벅저벅 걸어온 그녀의 옷은 여기저기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위용을 낮추지는 못했다.

     

   검성, 샬롯 발하임.

     

   크라슈의 누이 되는 자였다.

   그녀는 복귀한 크라슈를 힐끗 보았다.

     

   “다친 곳은.”

   “여기저기 다 쑤십니다.”

     

   그녀가 질문하자 크라슈는 자기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크라슈는 지금 꽤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당장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크라슈가 대답하자 샬롯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됐어.”

     

   당당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북해빙관 문 쪽이 덜컥 열렸다.

   거기에는 바다 빛에 빛나는 머리색과 만두 모양으로 머리를 땋은 시즐리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샬롯을 힐끗 보곤 이내 크라슈에게로 달려왔다.

     

   “4황녀님!”

     

   당황한 그녀의 호위인 광검이 따라오는 사이 시즐리는 크라슈의 앞에 섰다.

   짧은 다리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였다.

     

   “……구했구나.”

     

   크라슈의 얼굴을 마주한 시즐리는 기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라슈를 본 그녀는 그가 에벨아스크를 구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녀 또한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

   그러니 북해빙관 안에서 내내 크라슈와 에벨아스크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후우, 쓰려고 했던 건 안 써도 되겠구나.”

   “……뭘 쓰려했던 거냐?”

   “들어서 좋을 건 없을 게다.”

     

   시즐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샬롯이 들어간 방향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괴물 같은 누이를 뒀구나. 대충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크라슈도 시즐리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누님이 뭘 했지.”

   “민가를 덮치려던 8성급 주인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혼자서 버텼다더구나. 그 뒤에는 일검과 합류해서 기어코 쓰러트린 모양이고.”

     

   뒤따라오던 하링과 펠레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이 고전했던 침식종과는 차원이 다른 급인 침식종을 샬롯이 단독으로 버텨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지나간 샬롯의 모습은 고생하긴 했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잘 벼려진 칼날과 같이 아직까지도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 과연, 난 녀석은 난 녀석이야. 죽어라 굴러 겨우겨우 8성급을 쓰러트린 동생이랑은 완전히 다른 꼴이구나. ]

     

   크라슈가 헛웃음을 지었다.

   크라슈 또한 아가레스 때에 비하면 분명 훨씬 더 강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샬롯과 같이 멀쩡한 상태로 쓰러트리라고 하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물론 상황만 따지면 크라슈가 더 열악한 환경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크라슈의 경우에는 사전 지식이라는 가장 큰 카드가 있었다.

     

   ‘회귀자도 아닌 올해 고작해야 16살의 소녀가 8성급 침식종과 맞섰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는 상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로 샬롯의 이름은 더더욱 드높아지겠지.

     

   그 결과 샬롯이 회귀자라 판단한 시그린은 더더욱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표정이 음침하구나.”

   “음침한 게 아니라…….”

     

   크라슈는 시즐리의 말에 대답하려다가 눈앞이 흐려짐을 느꼈다.

   옘병, 늘 오던 패턴이다.

     

   “크라슈!”

     

   뒤에서 소스라치게 놀란 하링의 목소리와 함께 크라슈의 몸은 그대로 기울었다.

     

     

   * * *

     

     

   익숙한 천장이다.

     

   그야, 당연했다.

   크라슈는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천장이었으니까 말이다.

     

   “…….”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몸이 허전했다.

   원래라면 보였어야 할 백색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째선가 아쉬운 느낌을 받은 크라슈가 잠시 뒤에 목을 매만졌다.

     

   “일어났네.”

     

   그 순간 크라슈의 위에 시체 쥐 한 마리가 올라왔다.

   에벨아스크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쥐는 찍찍 소리를 내었다.

     

   “아주 영원히 잘 줄 알았는데.”

   “그야, 이런 건 재깍재깍 일어나는 놈이지 않으냐.”

     

   동시에 이번에는 크림슨가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까마귀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보는 까마귀였다.

   원래도 까마귀로 따라오고 있었나.

     

   쥐와 까마귀라.

     

   여러모로 불길한 조합이긴 했다.

     

   “에벨아스크, 크림슨가든, 바깥 상황은.”

   “이리저리 정리되고 있다. 독왕을 상처 입힌 건 알고 보니 광도제였다는 걸로 흘러가고 있지. 네가 데려온 하링이라는 아이의 존재가 컸다.”

     

   광도제는 라그렌 사건의 범인이다.

   그런 마당에 라그렌 가문의 유일한 직계인 하링이 이번 원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 결과 가문의 복수를 해낸 후기지수로 화두에 오르며 에벨아스크의 존재가 한순간에 묻혀 버린 것이다.

     

   “스타론 쪽에서도 일부러 더 불을 지폈던 모양이구나.”

     

   괜히 에벨아스크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타론 국경에 제국인들이 발 들이는 걸 원치 않았으니.

   스타론 입장에서도 이참에 제국이 잘못 판단했다며 몰아붙였다.

     

   그 결과 제국 쪽에서도 웬일로 조용히 넘어가려 했다.

     

   “그건 광도제 때문이겠지.”

     

   크라슈는 그 이유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세나 교수는 황궁과 광도제 사이에 무언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크라슈는 그 거래 대상이 정확히 광도제가 아니라 세계 침식자 집단 익시온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말인데. 에벨아스크, 광도제 녀석의 시신 회수한 거 있지.”

   “아, 응, 데리고 있어.”

     

   쥐가 번뜩 고개를 들며 반응했다.

     

   “그 녀석, 시체로 되살릴 수 있겠냐.”

   “좀 걸릴 텐데?”

   “괜찮아. 부탁 좀 하자.”

   “흐, 으흠, 부탁이라면야. 금방 해줄게.”

     

   쥐가 자그마한 양 팔을 허리춤에 올린 채 살짝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쥐 너머에 있을 에벨아스크의 표정이라 생각하니 살짝 짜증 났다.

     

   “정보라도 캐낼 작정이느냐?”

   “그래, 그거랑 별개로 익시온의 동태를 살필 방법이 하나 있잖냐.”

     

   그 말을 들은 순간 까마귀의 눈이 살짝 떠졌다.

     

   “그 방법이라는 거 설마 시체를 이용해 익시온의 회의에 참여할 생각이느냐?”

     

   역시 크림슨가든답게 눈치가 빠르다.

     

   “뭐, 뭐어? 회의가 뭔데?”

     

   그러자 유일하게 뭔지 모르는 에벨아스크가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익시온에는 세계 침식자끼리 정기적인 회의가 있다. 흑마녀가 만들어둔 독립공간이 그 장소고, 초청되지 못한 이들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너와 난 익시온의 회의에서 제명되어 있겠지.”

     

   에벨아스크가 뒤늦게 무슨 소리인지 눈치챘다.

     

   “설마 그 회의에 광도제를 시체로 해서 보낼 생각이야?”

   “그래, 너희 세계 침식자끼리도 서로가 무슨 능력이 있는지 다 알지는 못하잖냐. 광도제에게 숨겨둔 부활 수단 하나쯤 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

   “하, 하지만 내가 있단 걸 알잖아? 시체로 되살릴 수 있는 것도 알 텐데…….”

     

   크라슈의 손이 크림슨가든을 가리켰다.

     

   “저 녀석이 있잖냐.”

     

   크림슨가든이 혀를 찼다.

   크림슨가든의 불사는 나눠줄 수 있다.

     

   정확하게는 수명을 대가로 육체를 살아 있을 때로 복구시키는 형태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네가 영혼을 불러들이고, 크림슨가든이 살린 뒤 에벨아스크가 심장을 뽑아내 버리면 끝이잖냐.”

     

   크라슈의 계획을 들은 에벨아스크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골수까지 빼먹어 버릴 작정이구나.”

   “리스크는 없어. 들키면 아쉬울 뿐이니까.”

     

   그래도 들키지 않는다면 최고의 수가 되어줄 것이다.

     

   “잔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크림슨가든이 짧게 감탄사를 내뱉어줬다.

     

   덜컹!

     

   그 순간 대뜸 방문이 열렸다.

   푸드덕 소리와 함께 크림슨가든이 날아가고 에벨아스크의 시체 쥐가 냉큼 이불 속으로 숨었다.

     

   크라슈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익숙한 백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러나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크라슈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이 담겼다.

     

   “……일어났었네. 그보다 사람 얼굴 보고 그렇게 실망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비앙카의 언니인 제니카 하덴하르츠였다.

   하지만 크라슈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마침 잘됐어.”

     

   크라슈가 묻자 그녀는 바깥을 살핀 뒤 끼익하니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대뜸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백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린 그녀는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곤 살짝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만 좀 묻고 싶어서.”

     

   크라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너 말이야. 비앙카의 약혼자라는 자각은 있지?”

     

   크라슈가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쓰러지자마자 다 난리가 났으니까.”

     

   그녀는 입구 앞에서 한바탕 소란이 났던 것을 기억한다.

   라그렌 가문의 직계인 하링 라그렌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망가져 울며 난리가 났고, 그의 옆에 있던 쥐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찍찍거렸다.

     

   게다가 무려 제 4황녀 시즐리 에파니아마저도 굳은 표정으로 당장 의료원을 불러오라며 소리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그건 보통 사이는 아니잖아.”

     

   그 격한 반응들은 제니카가 보기에도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적어도 보통의 감정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작 크라슈는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냥 쓰러진 걸로 놀란 거겠지.”

     

   제니카는 순간 욱하는 기분을 느꼈다.

   절대로 그 정도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크라슈는 자신이 쓰러진 뒤 타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가 쓰러지는 것 하나로 한순간에 패닉이 일어지는 그 상황을 말이다.

     

   “그리고 비앙카의 약혼자인 건 잘 자각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딴짓할 일도 없을 테니까. 비앙카가 15살이 되면 결혼도 생각 중이고.”

   “그, 그래?”

     

   크라슈가 정색하며 대답하자 제니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게 크라슈의 표정은 진심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니카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크라슈가 저렇게 단언하고 있었지만, 주변 상황은 영락없이 그를 중심으로 무언가 뒤틀려 가고 있었다.

     

   여자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건 수라장이라고.

     

   ‘……그 애, 지금 이 상황 알고 있기나 한 거야?’

     

   비앙카의 편지가 떠올랐던 제니카가 옆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자신의 약혼자가 지금 수라장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비앙카가 알고 있을지 걱정이 된 것이다.

     

   왜인지 욱한 제니카가 크라슈에게 몇 마디 더 붙이려다가 말았다.

     

   뭔가 할 말이 없어졌다.

   인제 와서 비앙카를 위해 자신이 나설 자격이 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

   “더 할 말은?”

     

   제니카가 침묵하자 크라슈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아, 아니면 됐으니까.”

     

   제니카는 그대로 할 말을 잃은 듯 방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몰라. 그래도 이건 알려야겠어.’

     

   최소한 비앙카가 지금 크라슈의 상황만은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문이나 닫고 갈 것이지.’

     

   그렇게 크라슈가 제니카가 가버린 열린 문을 보고 있으니.

   누군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멀쩡해 보이는구나.”

     

   그건 다름 아닌 4황녀인 시즐리 에파니아였다.

   그녀는 크라슈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원, 사람 앞에서 무리하게 있다가 휙휙 쓰러지지 좀 말거라. 괜히 가슴만 졸이지 않았느냐.”

   “내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럼 됐다. 그보다 이번 일로 제국이 꽤 시끄럽겠구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잠시동안 생각에 빠졌다.

   명석한 두뇌를 지닌 시즐리다.

     

   재빠르게 굴러가던 그녀의 머리는 잠시 후 해답을 내놓았는지 크라슈를 바라보았다.

     

   “나는 제국으로 잠시 돌아가마.”

     

   크라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쩌려고.”

   “네가 기절한 사이, 세나 마이어 교수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었다. 제국 내에서 묘한 움직임이 한둘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국을 오히려 갉아 먹을 느낌이야.”

     

   시즐리가 제국을 아낀다는 것은 크라슈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방관자였던 그녀가 더 이상 보다 못해 칼을 빼어 든 것이었다.

     

   “깊숙이 손대려 하면 위험할 거다.”

     

   크라슈도 제국에 관해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얼핏 아는 바로 제국의 내부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니 크라슈가 경고하자 시즐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 보여도 어여쁜 막내 황녀지 않더냐. 웬만한 이들보다야 안전한 편이지.”

     

   그녀는 그리 말하면서 잔망스러운 웃음을 거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위험하면 짜잔 하고 나타나 줄 이가 한 명 있지 않더냐.”

     

   누굴 말하는 건지.

   크라슈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좋은 소식 들고 오마.”

     

   시즐리는 살랑거리는 손짓과 함께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떠나갔다.

   그 뒤에 호위인 광검은 크라슈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를 뒤따랐다.

     

   여러모로 폭풍 같은 여자였다.

     

   그렇게 시즐리가 떠나간 순간 또 다른 인기척이 문에 자리했다.

   연달아 잘도 나타난다.

     

   “크라슈.”

     

   그녀는 다름 아닌 하링이었다.

   제니카와 시즐리가 가니까 하링인가.

     

   어제 일이 있었던 만큼 그녀는 하도 울어서인지 눈가가 무척이나 붉었다.

     

   “……몸은 괜찮아?”

     

   하지만 크라슈를 보자마자 하링의 얼굴에는 화색이 번졌다.

     

   크라슈만큼은 아니어도 하링도 꽤나 무리한 상태였던 만큼.

   그녀는 크라슈가 쓰러지자 울다가 지쳐 그대로 그녀도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뒤 일어났던 그녀는 크라슈를 찾아오기 전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표정에는 깊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뭔 일 났냐?”

   “그게…….”

     

   하링은 머뭇거리다가 쭈뼛거리며 문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크라슈를 만나고 싶다는데…….”

     

   갑자기 독왕을 만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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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I Became A Thief Who Steals Overpowered Skills

Became a Munchkin skill thief meonchikin seukil dodug-i doeeossda 먼치킨 스킬 도둑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used to think that my stealing skill only worked on what was worthless to a person.

But just before I died, I realized that I could also steal the skills.

So I stole the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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