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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2

    네르와 아르윈, 그리고 게일이 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집단을 향해 다가간다.

     

     

    왕가 사람들. 전쟁의 주역들. 수많은 귀족들.

     

     

    홍염단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우리가 마왕의 오른팔을 막아선만큼, 홍염단도 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수많은 날들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모였다.

     

    물론 이마저도 모두가 급히 모인 것일 터였다.

     

    따지고 본다면 우리 홍염단도 뒷수습을 하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국왕이 우리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미약한 안타까움도 감지할 수 있었다.

     

    연기일지, 혹은 진심일지 나는 알지 못하겠으나…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던 아담 형을 위해 지어주는 표정임이 분명했다.

     

     

    게일이 무릎을 꿇었고, 나도 그를 따라 무릎을 꿇는다. 네르와 아르윈도 마찬가지로 자세를 낮추었다.

     

     

    국왕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출정을 결정한건 아담 형이었으니까.

     

    따지고 본다면 내가 원망하고 있는 사람은 내 자신이었다.

     

    아담 형은 날 구하다 죽음을 맞이했으니.

     

     

    “…일어나게, 베르그.”

     

    국왕이 명한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어. 보상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리고…”

     

    잠시 멈칫한 국왕이 말했다.

     

    “…아담의 일은 유감이야.”

     

    “…”

     

    승전의 기쁨을 만끽해야할 순간에 애도의 물결이 흐른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의 말은 내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

     

     

    국왕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이 말을 하고자 우리를 마중나온 듯 했다.

     

     

    왕가 사람들이 우리를 떠나갔다.

     

    남은 건 용사 일행과 블랙우드 가문, 그리고 셀레브리엔 가문의 일원들이었다.

     

     

    블랙우드의 가주, 깁슨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수고했네, 베르그. 아담 단장일은…정말 유감이야.”

     

    “………”

     

     

    나는 깁슨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놈이었을까?

     

    이 놈이 처음부터 우리를 배신할 생각을 한걸까?

     

     

    네르 독단으로 배신을 꿈 꿀 순 없었을 거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었어야지만 홍염단에 대한 정보도 유용한 것이니.

     

     

    자신의 딸을 구해내고자 우리를 무너트릴 생각을 해왔던 걸까?

     

     

    “…아버지.”

     

    네르가 그런 내 뒤에서 어렵게 나타나 깁슨의 팔을 잡았다.

     

    울먹이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깁슨이 내 눈치를 살폈다.

     

    “…”

     

    “….네르.”

     

    깁슨의 표정에 걱정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그 동안 내가 네르를 학대하기라도 했을것처럼.

     

    네르를 하대하고, 노리개처럼 이용했을 것 마냥.

     

     

    그 누구보다 소중히 대해주었는데 말이다.

     

    그랬기에 더 아픈 것이다.

     

     

    “…힘들었느냐.”

     

    깁슨이 속삭이듯 네르에게 물었다.

     

    네르에게만 들릴거라 생각했나보다.

     

    네르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게 아니라…”

     

    “…?”

     

     

    블랙우드 가문의 장남, 기딘 블랙우드가 걸어와 우리의 사이에 끼어든다.

     

    그나마 블랙우드 영지를 떠날 때 네르와 화해를 했던 기딘이었다.

     

     

    “…베르그 단장. 수고하셨습니다.”

     

    첫 만남때처럼 말을 다시 높이는 기딘.

     

    사무적인 태도로 그가 시간을 번다.

     

     

    “잠시 네르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데려가도 괜찮을지요.”

     

    “…”

     

    남편인 내게 받아내려는 허락.

     

    나는 딱히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마음대로.”

     

    그 정없는 말에 네르가 또 몸을 떤다.

     

    사소한 것에 놀라는 모습이 그녀답다면 그녀다웠다.

     

     

    그렁그렁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그녀였지만, 깁슨과 블랙우드 가문의 호위를 받아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녀는 멀어져가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했다.

     

    다음은 엘프 장로, 아스칼이 다가왔다.

     

    제 이마에 손을 올려 인사를 건네온 아스칼이 말한다.

     

    “…아담 일은 유감일세.”

     

    “…”

     

    “멋진 청년이었지. 좋은 곳으로 갔을게 분명해.”

     

     

    이제는 엘프의 이런 말들이 더더욱 빈말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단명종의 생명을 경시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한 차례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안에 생긴 변화 때문에 모든걸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됐든,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동안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는다.

     

     

    아르윈은 내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스칼은 그녀의 눈치를 가만히 보다,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나중에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겠나?”

     

    “…”

     

    그의 눈빛에서 난,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애초에 아르윈을 생각하던 아스칼이었다.

     

    어쩌면 자유를 그토록 갈망했던 딸을 위해 나를 설득하려 드는걸지도 몰랐다.

     

     

    아르윈도 마찬가지로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불안히 손톱을 틱틱대며 뜯었다.

     

     

    아스칼을 그 모습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해했지만…나는 그의 말에 긍정하는 걸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정리만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아르윈.”

     

    내 호명에 아르윈이 고개를 들었다.

     

     

    “…..네?”

     

    “…아버님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어. 그 동안 쌓인 이야기가 있을테니.”

     

    아르윈은 불안히 입술을 깨물다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귀에다 속삭이는 그녀.

     

     

    “…베…베르그. 저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

     

    “…..”

     

     

    나는 아르윈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게 부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아르윈은 이내 눈을 깜빡이며 입을 다문다.

     

    하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많음에도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의 표정이었다.

     

     

    엘프들도 그렇게 떠나갔다.

     

    남은 건 몇몇 귀족과, 용사 일행이었다.

     

     

    용사 펠릭스가 내게 다가와 악수를 제안한다.

     

    “…인족은 이렇게 인사한다 했지?”

     

    내게 들어 올려진 왼팔.

     

    오른팔 소매는 텅 빈채, 바람에 날려 펄럭이고 있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도 불구가 되었나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동안 정신이 너무 없었다.

     

    “…”

     

    그에 따라 나는 왼손으로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펠릭스가 자리를 비우자, 켄타우로스 아크란이 다가와 악수를 제안했다.

     

     

    “홍염단의 희생 덕에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감사를 전하지. 과거 우리를 구해내준 것 까지 말이야.”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악수마저도 받아냈다.

     

    실프리엔과는 눈인사로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시엔과 마주한다.

     

     

    “…”

     

    “…”

     

    이렇게나 서로를 금방 만나게 될거라 예상이나 했을까.

     

    지난번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당시 그녀를 매몰차게 버려둔채, 애원하는 그녀를 내버려둔채 나는 걸음을 옮겼었다.

     

    하지만 시엔은 그 당시의 일은 이미 잊어버린 것처럼, 시엔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내게는 익숙하기만 한 그 미소를.

     

    “…벨.”

     

    시엔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른다.

     

    그녀의 눈에 대체 내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나도 알지 못했다.

     

     

    주위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그녀와 나만이 남은 것 같다.

     

    우리를 포장하던 모든 것들이 벗겨져가는 느낌이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많이 힘들었지, 벨…?”

     

    시엔이 물었다.

     

    끝없는 고난을 홀로 이겨냈을 그녀는 나를 향한 걱정부터 던졌다.

     

    “…”

     

    나는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질문에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닌척 연기를 해보아도, 그녀 앞에 설 때마다 감정이 일렁인다.

     

    이미 그 사실을 시엔 또한 알고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렇게 자리에 굳어 한참을 멈춰 있다…걸음을 옮겼다.

     

    시엔도 눈물을 닦아내며 스스로를 다듬었다.

     

     

    당장은 이렇게 거리를 벌리는게, 어째서인지 서로에게도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

     

     

    “…잘 지냈느냐, 아르윈.”

     

    아스칼은 오랜만에 만나는 딸에게 안부를 물었다.

     

     

    아스칼은 아르윈을 용병에게 팔아넘기고… 그 동안 편히 쉰 날이 많지 않았다.

     

    모든건 아르윈의 선택으로 인해 결정되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르윈이 진실로 원해 팔려간건 아니라는 걸 아스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르윈은 차악을 선택한 것이었다. 세계수에게 수명을 나눠주며 받는 통증에 지쳤으니.

     

     

    아스칼은 그 동안 아르윈에 대한 정보를 그리 많이 공유받지 못했다.

     

    기껏해봐야 홍염단에 대한 정보들만이 들려왔을 뿐이다.

     

     

    특히나 아르윈의 남편이었을 베르그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게나 많이 울려퍼졌다.

     

    그가 전장에서 보여주는 괴력은 모두에게 퍼지는 소문이었으니.

     

     

    그나마 홍염단이 착실히 성장하는 모습에 아스칼은 안도감을 얻으려 했다.

     

    속이 썩어가는 집단이었다면 실수로라도 그렇게 성장하지 못했을테니.

     

    물론 그게 아르윈에 대한 대우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망가져가는 용병단에 아르윈이 속해있는 것보단, 명망이 높아지는 용병단에 속해있는게 아스칼으로서도 마음이 편했다.

     

    거기다 더해 베르그가 한 순간이나마 아르윈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모습을 본만큼, 다 잘 풀릴거라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만큼 또 한가지 조마조마했던 것은…혹여나 베르그의 사망소식이 들려올까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르윈이 정말 그 독을 사용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르윈이 독을 쓰지 못할거라 자부했던 아스칼이었지만…혹시나 하는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게 아르윈이 내리는 선택이라면, 그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바르디 술도 내어줬던 거다.

     

    쓰지 않길 원했지만, 아스칼은 단명종보다 자신의 딸의 안위가 더욱 중요했다.

     

    그녀의 품에 단검이라도 쥐어주는게 아스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딸이 살인자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도 없을 것이다.

     

    그런 복합적인 마음으로 그 동안 시간을 흘려왔다.

     

     

    아스칼은 안부와 함께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털썩.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르윈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스칼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르윈이 저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본적 없었으니.

     

    세계수가 전달하는 통증에 아무리 고통받아도, 다시금 일어나던 아르윈이었다.

     

    끝까지 제 할 몫은 다하고자 버텨내던 그녀였다.

     

     

    그런 아르윈이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주저앉은 것이다.

     

    “아, 아르윈.”

     

    아스칼은 본인답지 않게 잰걸음으로 아르윈에게 달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르윈은 멍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도와주세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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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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