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2

        귀족은 약속을 중요시한다.

       

        그야 당연했다. 약속 또한 가문의 명예에 직결되는 변수 중 하나였으니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귀족으로서의 됨됨이가 없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필리우트 제국의 고위 계층 사이에서는 그러한 인식이 만연했다.

       

        이는 살리에르 백작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로테의 집안은 어려서부터 선(善)을 가훈으로 삼아왔다. 그 가훈에는 타인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로테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소녀였다. 

       

        “에테르.”

       

        로테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에게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싸늘한 어조였다.

       

        친하게 지낸 이후로 툴툴거린 적이 몇 번 있기는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에테르를 걱정해서 하는 핀잔이었다. 옷 좀 똑바로 입어라, 머리 제대로 말려라, 기숙사에 일찍 좀 돌아와라 등등.

       

        단순한 잔소리였다. 그런 잔소리를 들은 에테르는 대부분의 경우 귀찮아하면서도 로테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공녀님과 나중에 둘이 살 거라니, 그게 무슨 얘기야?”

       

        미간을 한데 모은 로테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에테르를 바라보았다.

       

        “아, 맞다. 이거, 저랑 언니만의 비밀이었어요.”

       

        그 질문에 대신 대답한 건 로즈마리였다. 로즈마리는 오른손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며 키득거렸다.

       

        “이번 겨울 방학 때 언니는 제 집에서 묵을 거예요. 가서 집안 사람들에게도 인사시키려고 해요.”

       

        장난기 가득한 어조였다. 아니, 장난기보다는 고양감과 희망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가까울까.

       

        어쨌거나 로즈마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리 판단한 로테의 시선이 에테르를 향했다.

       

        “아, 겨울방학 때만 잠깐.”

       

        로테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낌새를 눈치 챈 에테르는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여기 계신 공녀님이 뭐 선물 하나 주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방학 때 잠깐 얹혀살기로 했어.”

        “그럼 우리 영지에는…?”

        “어…. 못 갈 것 같은데.”

        “못 온다고?”

       

        순간 로테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하나는 아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도감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번 겨울방학에도 에테르를 영지에서 묵게 할 계획이었다. 그도 그럴게, 수도에서 월세 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요즘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하루 숙박비도 장난 없다. 그런 짐을 들게 할 바에야, 살리에르 저택에서 같이 보내는 편이 나았다. 왜, 연구도 같이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블랜튼 공작의 저택에서 묵는다니.

       

        아쉬웠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생각해 둔 게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못 해본 걸 해보려고 계획을 조금씩 짜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중에는 연구 활동이 아닌 것도 많았다. 이를테면, 파자마 파티나 다과회 같은 일들.

       

        “정말로 이번 겨울방학에는 안 되는 거야?”

        “미안해.”

        “내년 여름방학이랑,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는 괜찮은 거지?”

        “문제없을 거야.”

       

        로테의 입에서 아, 하고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완전히 빼앗기는 건 아니야.

       

        그리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언니. 졸업하고 연구도 다 끝내면 우리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야죠.”

       

        에테르와 로테의 시선이 로즈마리를 향했다. 로즈마리는 도리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 로테를 향해 샐쭉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눈매를 틀은 모양새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표정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로테는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전 로즈마리가 한 말을 되짚어 물었다.

       

        “공녀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못해도 아카데미 졸업하면 우리 집에서 계속 살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로즈마리의 표정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반대로, 로테는 그런 로즈마리를 보며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이때부터였다. 에테르의 표정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무언가 기류가 이상하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인간군상을 봐 오며 누적된 빅데이터가 에테르의 머릿속에서 기기묘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일종의 경종이었다.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

       

        이럴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일단 관망하는 것. 아직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기 전이었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만 했다.

       

        “저, 공녀님. 공녀님은 에테르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어요?”

        “꽤 오래됐어요. 왜요, 무슨 일 있나요?”

        “아뇨, 그게. 이상하잖아요. 공녀님은 그런 신분이시고, 에테르는 평민 출신이잖아요. 심지어 이복 자매도 아니라고 하시고, 종족도 다른데 어떻게 그리 친할 수 있나 궁금했죠.”

        “아하….”

       

        로즈마리의 손이 일회용 텀블러를 향했다. 빨대로 탄산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던 로즈마리는, 곧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에테르는 로즈마리의 표정으로부터 그녀의 심리상태를 단번에 읽어냈다. 금안족을 최고의 종족으로 여기는 이 막무가내 동생의 머릿속에는 분명 ‘인간 주제에 나와 언니 사이를 캐고 들려고 해?’ 따위의 생각이 막 떠올랐을 것이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요.”

       

        툭, 하고 힘없이 내던져진 말. 로테의 눈썹이 잠시나마 꿈틀거렸다.

       

        얼핏 보면 예의를 차린 말이지만, 그 실체는 정치적 수사였다. 귀족의 딸로서 온갖 완곡어법을 어릴 때부터 접해 온 로테는 로즈마리의 말뜻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조금 전 로즈마리의 말에는 이런 함의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따로 여쭤보지는 않을게요.”

       

        로테는 숨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는 노골적인 가시가 박혀있었다.

       

        ‘나중에 에테르에게 물어보면 될 일인데 왜 굳이 객기를 부리시나요.’

       

        분명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로즈마리도 완곡어법이라면 얼마든지 안다. 마수가 되기 훨씬 오래전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화법으로 받아칠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살리에르 영애께서 제 언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흥미로울 따름이에요. 두 분이선 어떻게 친해지셨나요?”

       

        로즈마리는 이 시점에서 눈빛을 달리했다. 절멸급 마수 공통의 특성, 위압을 켠다.

       

        위압은 자신보다 정신적 서열이 낮은 상대를 제압할 때 유효한 방법. 그 실체는 금안족 특유의 카리스마로부터 나온다. 즉, 로테가 조금이라도 로즈마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 공포감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제 덜덜 떨면서 이실직고하겠지? 생각을 마친 로즈마리의 입가가 씩 호선을 그렸다.

       

        언니가 살리에르 영애와 친해진 경위를 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 둘의 사이를 자연스레 끊어버리고, 가출했던 언니를 이곳 아카데미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라 하나 멸망시킨 것 이상의 업적이 될 터였다. 로즈마리의 입매가 절로 비틀렸다.

       

        “어…. 잠깐만요, 살리에르 영애님. 갑자기 춥지 않아요?”

        “아뇨? 안이 따뜻해서 딱히 오한 같은 건 안 드는데요.”

       

        어라, 이상하다. 로즈마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위압을 걸었는데, 얼굴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있다. 아무리 못해도 수축되는 기미가 있어야 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로테는 로즈마리를 은근히 두려워했다. 이는 마수를 어렴풋이 식별해내는 그녀의 타고난 직감 탓이었다. 이때 위압을 걸었더라면 먹혔겠지.

       

        “아, 죄송해요. 조금 전 질문이 뭐였죠?”

        “두 분이서 어떻게 친해지셨냐고….”

        “별다른 거 없었어요. 그렇지, 에테르? 파스타 그만 먹고 너도 얘기 좀 해봐.”

        “어, 응? 으응….”

       

        어느새 면을 다 먹었는지 포크만 쪽쪽 빨고 있던 에테르였다. 그녀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접시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중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두고 둘 사이에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막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부터 막아야 하지?

       

       비록 지금은 소녀의 몸이었지만, 본래는 남자였다.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명확했다. 

       

        에테르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로테를 살폈다. 공극을 뚫고 올라온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이다. 저런 얼굴은 친구가 된 이후로 거의 못 봤던 것 같은데.

       

        뭔진 몰라도, 로테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공녀님, 저와 에테르는 짧지만 오래 알고 지냈어요. 생각해 보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친구 관계예요. 같이 밥 먹고, 공부도 같이하는, 그런 친구요.”

        “아, 예…….”

        “몇 달 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계속 함께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지?”

       

        에테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로테의 시선이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왠지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으면 데일 것 같아. 에테르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하스펠트 교수 밑에서 굴려질 때도 ‘무섭다’라는 감정을 별로 느껴본 적 없는 소녀가 바로 에테르였다. 이는 그녀가 그 교수의 패턴을 줄줄이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테는 그 반대였다. 여태껏 패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면을 보여주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에테르는 저와 앞으로도 쭉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친구예요. 그래서 같이 이야기도 나눠봤어요, 공녀님. 세상에서 모든 마수를 몰아내고 나면, 그땐 한 영지에서 같이 살자고요.”

        “아, 그렇군요.”

       

        로즈마리의 입매가 기묘하게 뒤틀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눈치채기 쉽지 않은 미미한 변화였지만, 로테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짚어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는 약속도 했는데…. 그러면 언니?”

       

        두 사람의 시선이 금안족 소녀를 향한다. 한쪽은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고, 다른 한쪽은 해명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절교할 것처럼 냉담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제야 에테르도 사건의 얼개를 짜올릴 수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좆됐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