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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2

       1.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건 루드릭이 아니라 에일린의 전속 부관이었다.

       

       “대공 전하.”

       “음?”

       “잠시 귀를…….”

       

       본래였다면 당연히 허용될 리가 없는 무례다. 아무리 전속으로 에일린을 모신다고 해도 일개 부관 따위가 감히 대공에게 귀엣말을 해야 하니 잠시 귀를 빌려달라고 말하는 게 상식에 부합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상황.

       

       에일린이 눈을 찌푸리는 대신 흥미를 느끼고 부관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지금의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부관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동안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에일린은 부관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가.”

       

       중얼거린 에일린이 부관이 일러준 말과, 지금의 상황을 천천히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우선 북부 대공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부터가 그랬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대부분의 귀족들이 에일린에게 지니고 있는 인식은, 장벽을 지키고 있는 제국의 번견에 지나지 않을 테니. 중앙과 교류도 드문 까닭에 에일린에 대한 실제보다 과장된 소문이 주기적으로 돌곤 했던 까닭에.

       

       일련의 이유로 에일린은 자신이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위압적인 분위기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성에게 호의를 품은 적도, 흥미를 가진 적도 이번이 처음. 자연히 서툴 수밖에 없는 에일린에게 부관의 조언은 참으로 시의가 적절했다.

       

       “대답은 다음에 듣지.”

       “네?”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군. 그대도 생각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

       

       혼자서 납득한 에일린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 대신 전에 건넸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만.”

       “예전에 했던 제안이라고 하시면……?”

       “사심을 모두 배제하고 봤을 때, 그대의 재능은 여기에서 계속 썩기엔 아까워.”

       

       원래도 늘상 무표정한 표정이긴 했지만, 조금 더 사뭇 진지해진 표정의 에일린이 손깍지를 낀 채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과분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를 놓치게 된 용병 대장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렴 어떻냐는 듯이 에일린이 찬찬히 말을 이어갔다.

       

       “아무런 비전 따위도 없는 용병 일에 계속 몰두하는 건 그대가 지닌 재능에 대한 죄라고 생각한다. 장담하지. 그대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고.”

       “높게 평가해주시는 건 감사하긴 한데…….”

       

       면전에서 대놓고 금칠을 하는 말을 듣고도 태연할 만큼 얼굴이 두껍진 않았기에, 아하하- 하고 루드릭이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방금 부관이 해줬던 조언을 떠올린 에일린은 순순히 루드릭이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금 너무 대놓고 들이대서도 안 되지만, 여기에서 놓치면 끝- 이라고 했던가.’

       

       애초에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

       

       지나치게 자신을 어필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일말의 여지도 없이 놓쳤다가는 완전히 끝이라던 부관의 조언을 상기한 에일린이 보이지 않게 탁자 밑으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처음으로 검을 쥔 순간에도 이토록 떨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주먹을 쥔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차라리 강대한 적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고 해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을 텐데, 눈앞에 있는 남자 한 명이 천하의 북부 대공 에일린 노르드를 이렇게까지 긴장시킬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대가 원한다면 궁중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알선할 수도 있다. 마탑 쪽을 원한다면 그쪽에 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어렵지는 않은 일이지.”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에일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청산유수였다.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하자마자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집중하여, 일종의 초집중 상태가 된 에일린의 언변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특혜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대의 실력을 알아봤다면 오히려 그쪽에서도 혈안이 될 테니까. 그냥 단순한 호의라고 여겨주면 좋겠군. 이런 일로 빚을 지운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내면의 집념과는 달리 말을 내뱉은 에일린의 표정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든 성사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긴장하고 있었지만.

       

       요컨대 부관이 해준 조언의 요지는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나갈 여지를 만들라는 것.

       

       첫 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이라며 해준 부관의 조언을 머릿속에 새기며, 에일린이 차분하게 루드릭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지, 진짜 나 좋아하나? 나를? 왜?’

       

       반면 에일린의 제안을 받은 루드릭 또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용병이 된 것도 뭐 대단한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용병왕 같은 거창한 칭호를 노렸거나 실전에서 마법을 완성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용병 업계에 투신한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기 싫어 가출한 귀족 도련님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던 까닭이다.

       

       “음…….”

       “…….”

       

       루드릭이 침음하자 에일린이 루드릭을 빤히 바라보며 그 대답을 기다렸다.

       

       용병이 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게 지났던 루드릭이었다. 칼밥 먹고 사는 거친 용병들 틈바구니에서 살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느 정도는 실감한 참이었다. 특히 여자와 남자 사이에 불거진 문제라면 특히 그렇다.

       

       루드릭 앞에서야 거친 용병들도 명색이 귀족 출신인데다 남자고 하니 조심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용병들이 음담패설을 내뱉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까.

       

       게다가 사고방식이 아직 전생의 그것에 머물러 있는 루드릭은 타인들에게 머리가 꽃밭인 귀족 영식으로 비치기 일쑤였고, 험한 꼴을 당할 뻔한 경험도 서너 번 정도는 있었다. 실제로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시도했던 상대방이 전부 마법에 당해 역으로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하지만 그런 루드릭도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부딪치고 보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북부 대공의 투박한 방식은 전혀 새로운 종류였다.

       

       지금껏 접한 적이 없던 방식이라 오히려 더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지금 당장 사귀자는 것보단 나은 거 아닌가?’

       

       장고 끝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드릭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루드릭의 승낙이 떨어지고 나서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에일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정도. 하지만 벌써 몇 년째 지근거리에서 에일린을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본 적 없던 부관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2.

       

       “그렇단 말이지.”

       

       톡톡.

       

       이 집무실의 주인이 생각에 잠겼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다.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던 금발의 여인이, 이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방첩대가 할 일이 어지간히 없는 모양이군. 내가 왜 내 사촌의 시시콜콜한 연애사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지?”

       “…….”

       

       엘레나 에스겔란트.

       

       길게 웨이브져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경의 생각은 어떻지?”

       “……황녀 전하께서 관심을 가질 부분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경도 잘 알고 있군. 그런데도 경이 이 보고서를 내게 가져온 이유는? 방첩대에 예산이 부족하다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노르드 대공 전하께서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비친 적이 없으시기에.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방첩대장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자, 언제 심기 불편한 얼굴을 했냐는 듯이 엘레나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번 정도는 관대하게 넘길 수 있지. 하지만 경도 명심하도록. 두 번은 곤란해.”

       “명심하겠습니다.”

       

       엘레나가 축객령을 내리자, 고개를 숙이며 사죄한 방첩대장이 문 밖을 나서자마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방첩대에 속한 이후 방첩대장이 경질된 건 전부 여섯 번이었다. 그녀가 모시는 2황녀는 제 기준에 차지 않는 이들을 경질하는데 있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었으니.

       

       자리를 보전한 것에 안심하고 황급히 2황녀의 집무실에서 멀어지는 걸 선택한 방첩대장이 사라지자, 집무실의 주인인 엘레나는 남겨진 채로 보고서를 재차 가볍게 훑고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녀의 사촌이자, 제국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한 에일린 노르드, 통칭 북부 대공이 고용한 용병단에 있던 마법사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가진 것 같다는 내용.

       

       “그렇다면…….”

       

       내용을 확인한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정치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못된 짓을 포함해서 지금의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계책이 네댓 가지 정도는 즉석에서 떠올랐으니.

       

       사적으로는 사촌이지만, 공적으로는 황위를 두고 황태녀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엘레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우군.

       

       “사촌의 마음에 들었을 정도라면…… 나도 어느 정도는 흥미가 생기는데.”

       

       중얼거린 엘레나가 입술을 훑었다.

       

       서로 무기만 뽑지 않았다 뿐이지, 제위를 두고 황태녀와 내전에 가까운 혈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에일린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그 먼 북부로 몸소 찾아가는 수고를 감내할 필요도 있을 터.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그리고 겸사겸사 아직 스탠스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에일린을 확실히 끌어들이기 위해.

       

       “그럼 북부로 가 볼까.”

       

       엘레나가 밝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 딱딱한 사촌을 어떤 남자가 홀렸는지도 궁금하니까.”

       

       짧게 덧붙인 엘레나의 표정이, 어느 순간 무서우리만치 무표정하게 변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제는 자취 생활을 때려치고 본가로 돌아오느라 연재가 지연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if

    에일린(쑥맥아님)
    엘레나(하라구로)
    아르웬(?)
    실피아(?)
    라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I Don’t Want To Be the Protagonist of a Romance Novel

I Don’t Want To Be the Protagonist of a Romance Novel

로판 주인공 하기 싫습니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reincarnated as the eldest son of a noble family with nothing to do.

Even if I put aside the fact that the world I was reincarnated into is a little strange.

– Northern Grand Duchess Eileen is confused after realizing she has regressed.

– Admiral Lassiel realizes she has regressed and immediately turns the fleet around.

– Princess Elena prepares to inspect the Weiss County, chewing over the past.

What is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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