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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2

       [기억의 파편 조합 완료.]

         

       [모든 기억이 복원되었습니다.]

         

       [동화의 마법진이 소멸합니다.]

         

       사아아악-

         

       “허억…!”

         

       기나긴 여행에서 깨어나 정신이 들었다.

         

       너무나도 오래되어 사람이 마모될 정도로 아득한, 수천 년이 넘는 기억이 단번에 돌아왔다. 보통이라면 정신이 무너져 내리 거나 미쳐버릴 테지만, 나는 그렇게 되진 않았다.

         

       그보다 집념과 갈망이 깊었으니…….

         

       “킬킬, 돌아왔남?”

         

       라드리엔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떤 방법을 써봐도 바꿀 수 없었던 프란체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토록 바랐던 목적을 이뤘다.

         

       남은 건 이에 대한 대가로 내 존재와 생명. 그리고 혼을 제물로 바치는 것뿐.

         

       “여신에게 한 초월자의 맹세이니 이행해야겠지. 가져가라.”

         

       라드리엔은 킬킬,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도 이득을 본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감? 원한다면 세상도 가질 수 있는 초월자의 힘을 모두 그 여자에게 바친 것인데.”

         

       나는 픽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당연히 후회는 없다. 프란체가 내 세상이었으니까.”

         

       대답을 들은 라드리엔은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눈을 끔뻑였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구먼.”

         

       고개를 휘휘 젓는 라드리엔.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줄이야.

         

       “거짓말을 하는군.”

       “뭐…?”

       “그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는 게 너다.”

         

       라드리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본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어째서 시공간의 마법을 익혔는지 기억해라. 왜 저주를 받을 걸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미 나와 같은 선택을 해봤고, 그로 인해 죽지 못해 살게 된 사람. 그게 라드리엔이다.

         

       “내가 돌아옴과 동시에 너의 기억이 조금 들어왔다. 아마도 영혼에 새겨진 마법진의 마력과 내 오러가 공명했기 때문이겠지. 꽤 외롭게 기다리고 있더군.”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마법을 만든 네 목적은 모르겠더군. 운명을 바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지, 과거로 돌아가 그라시아 왕국을 재건하는 것인지.”

         

       라드리엔이 살아왔던 삶 전체를 보진 못했다. 그저 그녀가 회상했던 과거와 내가 세계를 넘어간 이후만 들어왔으니.

         

       “마지막으로 묻지. 네가 원하는 건 뭐지?”

       “…….”

         

       여전히 답이 없다.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

         

       “세계를 넘어가 평범한 생을 살고 싶구먼.”

       “…….”

       “이 지독한 윤회를 끊고 싶을 뿐이여.”

         

       하긴, 이 할멈의 인생은 인간과의 삶과 거리가 멀었다.

         

       이 세계에서 단 한 번만 태어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압도적인 마법 재능. 나와 같은 초월자의 반열에 오른 자.

         

       인과율을 어긋 낸 반동으로 끝없이 윤회하여 불멸에 가까운 존재. 끝내고 싶어도 끝나지 않고, 원하지 않아도 깨우치는 지식의 저주까지.

         

       “그런가.”

         

       수천 년의 삶을 반복해본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답은 얻었다. 이제 나를 유지하고 있는 이 마법진을 회수해라. 계약을 이행하지.”

         

       라드리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선배로서 말하는 건디, 부디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우웅!!!

         

       영혼에 새겨졌던 마법진이 라드리엔에게 회수되기 시작한다. 전신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느낌.

         

       “흐읍…….”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이 세계에서의 내 존재가 점점 흐릿해지는 게 느껴졌다.

         

       “끝이여. 천체 마법은 회수했고 다른 마법진은 소멸했구먼.”

         

       이제 정말 끝이군.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라드리엔은 대신 말을 이었다.

         

       “네 영혼은 수천 번의 회귀로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으. 거기에 세계를 두 번이나 넘어 갈기갈기 찢어지기까지 했지. 지금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여.”

         

       그런 거 같다. 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어려우니.

         

       “…네 말이 맞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 여기서 눈을 감을 순 없다.

         

       “아무튼, 내가 해줄 말은 이게 끝이여.”

       “소미레는 어찌할 거지?”

       “그 여자 말인감?”

       “그래.”

         

       라드리엔은 고개를 꺾곤 턱을 어루만졌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구먼.”

       “…너의 실수가 만들어낸 피해자인데?”

       “그것도 그 여자의 운명이여. 방법도 없고.”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라드리엔. 한참 전에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린 이자에게 동정을 바란 것이 문제였다.

         

       “…알겠다.”

         

       되도록 소미레도 돌려 보내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정 돌려 보내주고 싶으면 네 영혼에 새겨졌던 마법진의 잔재를 이용하든가. 나와 같은 지식의 저주를 받은 마녀라면 연결점을 여는 것도 가능하것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너와 같은 마녀?”하고 물었다.

         

       “카자르 유플레인이라는 마법사. 나와 비슷한 재능을 가지고 있더구먼. 그 여자라면 잔재를 따라할 수 있을 것이여. 연결점은 네가 매개체가 되면 문제없고.”

         

       다행히 소미레를 돌려 보낼 방법은 있군.

         

       “그럼 그리 알고 있겠다.”

       “그려. 인제 끝이여.”

         

       라드리엔은 눈을 감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여신이 정한 운명을 바꾼 초월자에게 경의를.”

         

       딱!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역장이 사라졌다.

         

         

       * * *

         

         

       눈을 뜨자 청록색의 역장이 사라져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평화롭다. 이질감이 들 정도로. 기억 속의 내가 봤던 세상은 온통 붉은색이었는데 말이다.

         

       “진!”

         

       나를 발견한 프란체가 서둘러 달려왔다.

         

       “어떻게 됐니? 초월 마법사는?”

       “떠났습니다.”

       “떠났다고…?”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길.”

         

       모든 걸 설명해줄 순 없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고 혼란스러울 테니까. 슬픈 과거는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소미레는 어딨습니까?”

       “그 성녀라면 저기에…….”

         

       프란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마력 감옥에 갇혀 온몸이 구속당한 소미레가 보였다.

         

       “…….”

         

       나는 소미레에게 향했다.

         

       “진…?”

         

       프란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지막이 불렀다.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하다. 나는 싱긋 웃어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으니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의 내게 나중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소미레.”

       “…뭐야?”

       

       산발이 된 머리카락. 눈을 치켜세우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라드리엔이 널 속였다.”

       “뭐…?”

       “그저 도구로 이용했다는 거다.”

         

       단순히 내 복귀와 동기화를 위한 도구. 소미레의 얼굴이 한없이 무너져 안색이 바뀌어 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그럼, 그럼 나는 못 돌아가는 거야…?”

         

       울먹이는 목소리. 프란체의 목숨을 노린 건 괘씸하지만, 얘는 라드리엔이 만들어낸 피해자다. 나도 과실이 있고.

         

       “돌아갈 방법은 있으니 안심해라.”

       “저,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나는 그래,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소미레의 얼굴이 다시 회복됐다.

         

       “하지만 프란체를 죽이려 한 너를 쉽게 용서할 수 없지.”

         

       애석하게도 다시 무너지는 소미레의 얼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절박함.

         

       소미레는 지구에서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이다. 이래 생각하니 여태껏 버틴 게 대단하다.

         

       “내가,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돌려 보내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제발…!”

         

       절실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목소리.

         

       “너의 얘기를 듣겠다. 이 세계로 넘어와 살아오고 느꼈던 감정을 말해라. 이후 네가 한 행동에 납득이 간다면 돌려 보내주지.”

         

       소미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아니지, 그냥 다 말해줄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힘들었나 보다.

         

       “그럼 시작하겠다.”

         

       나는 구속된 소미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 소미레에게 내 오러를 흘려보낸다.

         

       “받아들여라. 공명해라.”

       “으으…….”

         

       기억을 되찾아 새까맣게 변한 오러. 그 불길함에 소미레는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다.

         

       “아파도 참아라. 돌아가는 것만 생각해.”

       “아, 알겠어…….”

         

       소미레의 마력과 내 오러가 공명했다. 이것으로 신성력은 발휘할 수 없다.

         

       “공녀… 아니, 공작님. 소미레에게 자백의 저주를 걸어주시길.”

         

       옆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프란체는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프란체의 손바닥 위에 생겨난 새까만 구체에서 연기가 피어나와 소미레를 구속했다.

         

       “지금부터 질문을 시작하지. 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왔지?”

         

       나는 소미레와 눈을 마주했다.

         

       “저는…….”

         

         

       * * *

         

         

       『1년 하고도 몇 개월 전.

         

       백아연은 학교에 가기 전에 잠시 접속한 ‘로판소’에 빙의되었다.

         

       들어온 인물은 게임의 주인공이자 성녀, 소미레.

         

       원치 않게 성녀의 몸을 빼앗았다.

         

       처음에는 받아들이려 했다. 왜 들어온지 알 방법도 없고, 나갈 수 있는지도 모르니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가자고.

         

       그러나 이 세계는 불순물인 백아연에게 잔혹했다.

         

       [제 몸을 돌려주세요…….]

         

       꿈속에서 나온 소미레는 빠져버린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소미레의 팔이 무참하게 뜯겨나갔다. 피가 홍수처럼 터져나와 꿈 속의 세상이 피로 물들었다.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지 않아요… 돌려주세요….]

         

       악몽에서 등장한 성녀의 목이 기괴하게 꺾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데구르르…….

         

       바닥으로 떨어진 소미레의 머리는 백아연을 바라봤다.

         

       [돌려줘!!!]

         

       머리를 잃은 소미레는 백아연에게 달려들어 이젠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목을 졸랐다.

       

       「커헉, 컥!」

       

       호흡을, 숨을 쉴 수가 없다. 백아연은 소미레의 한쪽 팔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서 나가!!!]

         

       「허억!」

         

       악몽에서 깬 백아연은 크게 숨을 삼켰다.

         

       꿈이란 걸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던 찰나.

         

       「아아아악!!!」

         

       전신이 불타는 듯했다. 악몽에서 나왔던 소미레처럼 눈알이 뽑히는 것 같았다. 한쪽 팔의 뼈가 으스러지고 찢겨나간 고통이 몰려들었다.

         

       백아연의 혼은 조금씩, 천천히 죽어갔다.

         

       「무서워…….」

         

       두려웠다.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원래의 생활을 되찾고 싶었다.

         

       「왜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해? 내가 뭘 했다고…? 왜, 도대체 왜!!!」

         

       결국, 백아연은 정줄을 놓고 그대로 미쳐버렸다. 이제는 잿빛으로 변한 금발을 쥐어뜯고, 손톱으로 살을 찢으며 자해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 않아… 이젠 악몽을 꾸고 싶지도 않고 아픔을 느끼는 것도 싫어…….」

         

       그러한 행동이 계속되자 황실은 성녀가 전쟁으로 인해 미쳤다고 판단해 백아연을 초월 마법사에게 보냈다.

         

       「킬킬, 나 때문에 미안하게 됐구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내 실수로 인해 여기로 온 거여.」

         

       이렇게 된 게 당신 때문이라고? 분노한 백아연은 당장이라도 초월 마법사 라드리엔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힘도, 기운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방법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구먼.」

         

       초월 마법사는 협력을 약속하고 백아연이 돌아갈 방법을 알려줬다.

         

       「성녀의 대적자인 프란체 데카르트를 죽이면 되는 것이여. 그럼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돌아가지.」

         

       절박했던 백아연은 라드리엔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의지할 사람도 없고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정말 돌아갈 수 있는 거지?」

       「그려. 나만 믿으라.」

       「…알겠어.」

         

       매일 밤 찾아오는 두 눈과 한쪽 팔이 뽑힌 성녀. 눈알이 뽑히고 팔이 찢겨나가는 아픔. 전신이 불타는 듯한 고통.

         

       이 모든 걸 잊기 위해 프란체 데카르트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백아연은 성녀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을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 걱정 덕분에 제가 무사히 정신을 차릴 수 있던 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대충 급조해서 떠들은 이야기. 백아연도 자신이 한 말에 위선이 느껴져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아- 성녀님…!」

       「소미레, 정말 다행이야…!」

         

       성녀가 하는 말이라면 주변에선 의심도 하지 않고 찰떡같이 믿었다. 멍청한 NPC들 같으니라고.

         

       그렇게 진실된 자신마저 뒤로한 채. 백아연은 창작물 속의 인물인 소미레로 살아왔고, 온갖 스트레스를 견뎌냈다.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을 품은 채…….』

         

       소미레는. 아니, 백아연은 푹 숙인 채 말을 끝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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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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