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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2

        

         역시 이 세상에는 주인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게 아니라 다소 과격한 표현일 수는 있는데, 이 개성 넘치는 인간들을 나 대신 좀 상대해 줄 총알받이…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뜻에서도.

         

         솔직히 특정할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찾아내서 성향을 분석하거나, 스토리 진행 방향을 유도할 준비를 슬슬 했으리라.

         지금은 단서가 전혀 없어서 꼼짝없이 프롤로그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지.

         

         뭐, 어차피 나중엔 같이 행동할 헬레나라도 미리 쇼우에게 소개하면 되지 않냐고? 그런 건 세상이 허락해도 내가 허락 못한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용병업계에 싸가지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소연하는 연락이 자주 온다고 하던데, 그녀의 비좁은 인간 관계에 이런 특대 폭탄을 떨어트릴 순 없었다.

         

         그리고 시나리오적으로 언젠간 만나게 되리라는 건 알지만, 그 전까지 이 망측한 변태는 모두에게서 격리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소 집착이 강하고, 잔혹한 일면이 있긴 해도 네오 헤이븐 표준으로 보면 나름 멀쩡한 상식인 축에 드는 인물이라고 칭찬한 게 무색할 지경이다.

         

         “제 약속이 신뢰를 얻기에 부족했다면, 여기 자백제를 투여한 상태로 다시 한 번 맹세를….”

         

         “저기…!? 저희 카사네 사장님을 조사하러 가는 길 아니었나요!”

         

         다짜고짜 보관고에서 약물 주사기를 꺼내 들려는 쇼우를 만류했다.

         

         지금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에 자기 몸에 자발적으로 그런 걸 꽂아 넣어서라도 진심을 증명하겠다는 발상이 바로 튀어나오는 게 참으로 대단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게임 후반부 기준으로 그를 이성적인 사람이라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애당초 내 상식이나 그릇 따위로는 갱생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거물이었거나.

         

         ……설마, 작전의 성패보다도 내 반응을 우선시한 건 아니겠지?

         

         이런 게 다 사람 휘어잡는 용병술의 일부라고 믿고 싶은데요. ‘나는 너를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니 한눈팔지 말고 충성하라.’ 같은 의미를 담은 퍼포먼스라던가.

         

         “…….”

         

         왠지 오싹해진 목덜미를 소매를 써서 쓱쓱 문질렀다.

         부드러운 옷감이 피부를 다독여주자 올라왔던 닭살도 차츰 진정하고 다시 숨어들었다.

         

         착각이나 곡해 중에서도 가장 꼴불견인 건 자의식 과잉이니, 모든 이상 현상이 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해석을 일삼는 건 과대 망상이다. 저어어얼대 잊지 말도록 하자.

         

         더군다나 당장은 코앞에 닥친 귀찮은 일거리를 무사히 완수하는 게 급선무.

         현재 쇼우 놈의 태도로 보건대, 적어도 이쪽에 해가 되는 행동을 일삼으리라는 걱정은 일단 접어놔도 괜찮겠지. ……그렇지?

         

         위잉….

         

         미끄러지듯 이동하던 리무진이 천천히 정차한다.

         이동하는 동안 상사로부터 충격적인 괴전파를 수신한 탓에 잠시 트래킹을 놓쳤지만, 내 통신 임플란트는 충실히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었다.

         

         파티가 주최되는 곳은 에나마 본사가 있는 중앙 의료 구역에서 조금 떨어진 휴양 및 재활 활동 구역에 카사네 아마기의 사저.

         

         뭐, 기획 단계부터 ‘재활’ 보다는 ‘휴양’ 쪽에 훨씬 무게를 둬서 실제로는 수도 상류층의 호화 주택이나 행사용 별장 따위가 즐비한 게 현실이라는데.

         큰 분류에서는 의료 구역에 포함된 부가 시설인 만큼 그녀가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여기를 행사장으로 잡은 것도 이해는 간다.

         

         단지… 이번에 한해서는 남사스러운 집안 싸움이 크게 벌어질 예정이었으므로 악수에 가까웠지만.

         

         달칵 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내 경호를 담당한 추적자가 내민 손을 붙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하차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복장은 다리 움직임이 굉장히 제한되어서 에스코트를 받는데 거부감 하나는 안 들었다. 특히나 좌석이 더럽게 깊은 리무진이라서 더더욱.

         

         “어떻게. 얘기는 잘 풀리셨습니까…?”

         

         “…충고를 따랐을 뿐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관대함에 응석부린 꼴이 되었다만.”

         

         ‘잠깐, 너 이 새끼…!’

         

         반대편에서 쇼우를 모시던 카이쥰이 떠드는 걸 듣자마자 머리가 팩 돌아갔다.

         어쩐지 애가 이상하리만치 들이대더라니! 부추긴 놈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자 얼추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도와달라고 빌어서 와준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나중에 보자 너는…!

         

         “……!?”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느껴진 듯,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녀석이 뒤따라오던 호위 차량들을 상대로 주변을 빈틈없이 확보하라며 재촉하는 게 보였지만.

         이제 와서 성실하게 일하는 척해도 소용없다. 이 원한은 내가 잊지 않을 거니까.

         

         “후우….”

         

         일단 심호흡을 하고 정면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밤 대대적인 사교 모임이 있는 걸 과시하는 것처럼 켜진 조명은 기본, 입구에서 안쪽까지 쭉 깔린 레드 카펫과 화려한 삼차원 홀로그램 장식들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호객 행위가 필요한 자리는 아닌 만큼 노골적으로 시선을 끄는 아이콘은 없었으나.

         꽃이나 술잔, 구두라던가… 뒤엉킨 한 쌍의 나비 등 여러 이미지가 허공을 수놓으며 안에서 어떤 즐길 거리가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는지 어렴풋이 암시하고 있었다.

         

         음, 순수하게 즐기러 온 거였다면 궁금했을지도 모르겠네.

         

         우리가 입장적으로 약간 저의를 의심받는 불청객인지라 도착 시간을 늦게 잡았다 하더니, 정말 웬만한 손님들은 벌써 다 입장한 듯 1층 입구에는 안내를 담당한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손님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위쪽에 난 테라스 발코니로부터 들리는 인기척과 웃음소리는 슬슬 사교회가 진행 중임을 알리고 있었으니….

         

         “…이만 움직이지. 길게 끌어 봤자 이로울 게 없다.”

         

         “숙지했습니다.”

         

         뒤늦은 고위 인사의 내방에 당황한 직원들이 달려오는 걸 눈빛만으로 물리치며.

         능숙한 자연체로, 회장을 구경하느라 바쁜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쇼우가 일행을 이끌었다.

         

         “아니….”

         

         물론 또 다시 동의 없는 막돼먹은 스킨십에 노출된 나는 미약한 항의를 던지려다가… 그냥 말을 삼켰다.

         

         하, 그래. 허리에 손을 안 올린 게 어디냐. 분별은 하되 그럴싸한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는 거겠지.

         참자. 어느 현자께서 설명하지 않았나? 돈 받고 하는 일은 다들 하기 싫어하는 일이기에 돈을 주고서라도 시키는 거라고.

         

         …문제라면 오늘의 나는 무보수 노동이라는 거지만!

         

         참담한 현실을 부정하듯, 허리를 곧게 피고 정면을 바라본다. 생글거리는 표정은 무리여도 적어도 싫은 티는 나지 않도록 무표정한 철판을 얼굴에 깔았고.

         내 짐이야 어차피 수행원이 들고 있었기에, 이 참에 양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는 조심조심 발을 놀려서 그와 보조를 맞췄다.

         

         어쨌거나 내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별 것 없다.

         상임 이사의 소심한 파트너인 척 눈도장만 찍으며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호위를 대동한 채 빠져나와서 이 별장에 있는 카사네 아마기의 사실에 침입하는 것.

         

         거기까지 길을 뚫어주는 건 수행하는 추적자가 담당하기로 했고, 정작 가장 중요한 해킹 파트를 완전히 담당자의 개인 기량에 맡겨 놨다는 게 조금 우스웠지만… 괜찮다.

         

         여러 번의 실전을 거치면서 자신감도 좀 붙었으니까.

         전생에 봤던 수상한 광고들 마냥 ‘비전공자도 조금만 공부하면 개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느낌이긴 해도, 내 작업물과 실력이 통한다면 불만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나중에 벌일 탈출 플랜에 앞서 에나마의 보안 레벨을 시험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긴장이 풀어졌다.

         

         “음? 저건…?”

         “이거 이거, 카사네님도 참. 저런 드문 귀빈분도 초청한 행사였다면 미리 귀띔 좀 해주시지.”

         “글쎄요… 에나마의 일부 상임 이사는 일반 임원과 상당히 ‘궤가 다른 업무’를 맡고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카사네 사장과 에다마츠 이사 간의 공식적인 회동 기록은 1년 3개월 전이 마지막. 뜻밖의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 약 38.79%로 매우 유력합니다.”

         “…회장 내부 녹화는 매너 위반, 최대한 텍스트 위주로 서술 기록을 남긴다.”

         

         “이상하군요. 이렇게 꽌시(关系) 예의에 어긋나게, 성의 표시도 없이 새로운 손님을 데려올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

         

         그리고 애써 긴장을 푼 게 무색하게.

         층계참을 올라 사교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따로 안내 방송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중의 시선이 이쪽으로. 정확히는 쇼우를 향해 미친듯이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그 곁에 선 나에게도 호기심 반 흥미 반의 뒤섞인 관심이 마구잡이로 투하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출신이나 신분이 불분명한 관객들을 제외하고도, 엑사테크나 헤이롱 소속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무리마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작당 모의를 하는 광경이 얼핏 보였다.

         

         ‘아, 제발. 그러지 마’

         

         자, 같이 생각해보자.

         평소에 이런 석상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인간이, 그것도 여러모로 커넥션을 만들어서 나쁠 것 없는 에나마의 고위 임원이 어슬렁어슬렁 사교회에 나타났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이런 행사에 따로 초청받을 정도로 자산이든 신분이든, 뭐던 내세울 거리가 있으면서도. 온갖 귀찮음을 감수하고 인맥을 넓히러 찾아온 인간들이 취할 적절한 행동은 무엇일까요.

         

         “크흠…! 아마기 이사님. 이거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TMG(Trinity Media Group)에서 근무하는….”

         

         제발 망할 도화선을 끊지 말아달라는 내면의 바램이 부질없게, 용기 있는 바보가 기회를 잡는다는 믿음이라도 실천하려는 듯 한 참석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명함을 들이밀었고.

         

         그를 기점으로 몰려든 인파에 우리 일행은 무자비하게 둘러싸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살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마구마구 질문 공세에 시달릴 예정인 두 사람! 과연 급발진을 안 하고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Glacia샤샤 님의 11코인 후원! 아나스타샤의 개인 지갑에 정당한(?) 환전 과정을 거쳐 넣어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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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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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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