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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3

        저녁 시간.

       

        산 너머로 달빛이 올라오고, 상가에는 하나둘씩 불이 켜진다. 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수도는 여전히 활력을 띠었다.

       

        그만큼 제국의 경제 규모가 크다는 방증이었다. 물가가 비싸졌다고는 해도 생필품에 대한 수요는 여전했다.

       

        식품도 그런 생필품의 일종이다. 부자, 서민 할 것 없이 대중식당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소였다.

       

        이곳은 ‘엘 카르티야’, 엘프식 파스타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다.

       

        목에 착착 넘어가는 크림과, 파스타에 곁들인 허브가 내는 풍미가 일품인 곳.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가격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엘 카르티야를 찾는 손님은 여전히 많았다.

       

        오늘은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여태 카르보나라는 학식으로만 먹어본 나였다. 전문 음식점이 요리하는 곳은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웬 블루베리 하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언니,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로즈마리는 나를 샐쭉 바라보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졸업하면 저랑 살 거예요, 아니면 살리에르 영애님이랑 살 거예요?”

       

        제법 큰 목소리로 말한 탓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파스타를 잘 먹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벼락을 맞아버렸다. 나는 난감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보드랍고 잘 손질된 머리였다. 로테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머릿결은 평생 가져보지 못했겠지.

       

        하지만 잘 정돈된 겉머리와는 달리, 머릿속은 한껏 거칠어진 뒤였다.

       

        이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에테르는 저와 먼저 약속했어요, 공녀님. 죄송하지만 양보해 드릴 수는 없어요.”

        “아뇨, 우리 논지는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구요. 중요한 건 시간순이 아니죠.”

       

        이젠 둘 다 적의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로즈마리와 로테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수면 위로 올라온 상태였다.

       

        “왜 시간순이 안 중요해요? 약속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그렇게 치면 처음 관계를 맺은 날부터 세 보는 게 어때요? 거기까지 따지면 제가 훨씬 유리할걸요?”

       

        양보할 수 없다느니, 처음 관계를 맺은 날이 어쨌느니. 남들이 보면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어째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머지않아 그 감각이 버멜과의 스캔들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간 다음 주 교내 신문에 이상한 기사가 실릴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등골이 시릿하다.

       

        신문부 부장인 안젤리카 토츠펠의 머리를 깨버린 지 겨우 한 달이 된 시점이다. 다시 한번 같은 일로 스태프를 꺼내 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거, 버멜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그럼 언니보고 결정하자고 해요. 난 몰라.”

        “에테르, 들었지?”

       

        두 사람의 불꽃 튀기는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됐다. 내 입에서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게 된다.

       

        이게 차라리 연애 때문에 벌어진 삼각관계였으면 좋겠다. 딱 한 명만 골라버리고 말게.

       

        그러나 이건 이야기의 매듭이 다르다. 치정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니를 마왕성으로 데려가야 인간 새끼들을 다 잡아 족칠 수 있어.’

       

        이 파란 블루베리 덩어리는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겨울 방학을 빌려 궁극의 화계마도를 완성하는 거야. 그러면 마수와의 전쟁도 더는 없겠지. 모든 게 끝나면 이 친구와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어.’

       

        기본 심성이 착한 내 친구는 그런 생각으로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겠지.

       

        내 선택에 따라 ‘에테르’의 타락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모든 선택지는 조심해서 고를 필요가 있었다.

       

        “나랑 살 거야, 아니면 공녀님이랑 살 거야?”

       

        인간을 절멸하고 지구로 귀환하느냐. 아니면 마수를 절멸하고 지구로 귀환하느냐.

       

        누구하고 살 거느냐, 그렇게만 묻는다면 답은 뻔했다. 나는 지구로 귀환할 거고, 그 때문에 어느 쪽하고도 남아서 여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본래 로테와의 관계도 지구로의 귀환을 상정하고 맺은 것이었다. 서로 이득을 보다가 적당한 시기에 갈라지는, 이상적인 비즈니스 관계.

       

        그러나 흑사병 창궐을 기점으로 그 거리조절에 실패했다. 로테에겐 너무 정을 붙여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땐 아무리 친하게 지낸 친구라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어째 이 몸이 된 이후로 감정선이 세심해졌다. 소녀의 몸이라서 그런지, 에테르의 본래 성격이 이래서 그런 건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로테에게 일말의 죄의식을 가졌다. 그런데도 그 당시 ‘너와 끝까지는 함께 못 하겠다’라고 솔직하게 답하려고 하니 당장의 관계가 파탄 날까 봐 두려웠다.

       

        그저, 친한 친구끼리 지나가는 말로 ‘우리 우정 영원하자’ 했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로테는 진심이었다. 번갯불처럼 맹렬히 타오르는 저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

       

        저건,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자만이 가지는 진취적인 눈빛이다.

       

        “언니, 빨리 답해줘요. 저 황궁으로 빨리 돌아가 봐야 하니까….”

       

        반면에, 로즈마리의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싸늘하다. 그녀에게선 격류와도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녀의 눈동자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제 언니에 대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래. 분명히 하자. 졸업하면 뭐 할지 편하게 얘기해 보는 거야.“

        “졸업하고 뭘 하냐니….”

       

        나도 모르게 빨대에 입가를 가져갔다. 솟구치는 갈증이 머리와 위장을 점점 짓누르던 참이었다.

       

        로즈마리는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했다. 이것 하라고 하면 하고, 말라고 하면 말았다. 필요한 게 있다고 하면 툴툴거리면서도 가져왔다. 기억이 섞인 뒤로는 친한 동생처럼 여기던 존재였다.

       

        반면, 로테는 짧은 시간에 계속 붙어 다니면서 정을 쌓았다. 주고받기를 반복하며 자갈탑을 세우는 것처럼 신뢰와 친분을 다져온 사이였다. 그러면서도 로테에게는 받은 것 대비 준 게 모자라다고 느끼던 와중이었다.

       

        “졸업 안 할 수도 있는데.”

       

        내 입에서 대뜸 정치적 수사를 동반한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변명이라기보다는 진실에 가까웠다. 어차피 공계마도를 제외한 나머지를 다 익히고 나면 학년 상관없이 엘프 나라로 도망칠 심산이었다. 

       

        거기서 남은 마법을 익히고 지구로 귀환한다. 딱 좋은 계획이다. 물론, 이건 나만 아는 그림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로테는 명백하게 당황한 투로 되물었다. 그녀의 진홍색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언니? 혹시 졸업장 없이 저희 집에 얹혀살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반면에 로즈마리의 입꼬리는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야 그렇겠지. 제 언니가 졸업조차 안 하고 집에 돌아오면 마왕군에게는 큰 이득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못 할 수도 있겠다’는 표현이 맞겠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지금 그런 걸 상정하는 게 아니잖아.”

       

        나는 음료를 빨아마시며 로테의 두덜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아마 머릿속에는 ‘얘가 왜 기만을 하지?’ 같은 생각을 막 들었을 것이다.

       

        이럴 땐 우물쭈물해 하지 말고 진중하게 답변해야 한다.

       

        “진짜로. 여기 졸업 못할 수도 있어.”

        “뭐? 말도 안 돼. 넌 나보다 공부도 잘하잖아.”

        “학업부진이나 그런 게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이나 자금 부족 때문에.”

       

        내가 괴물의 몸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고민했던 내용이다. 만약 들키면, 학업과 연구를 이어 나갈 수 없게 된다.

       

        수많은 인간군상을 만나본 나였다. 정체를 들켰을 때 인간 대부분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다. 사람은 그다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그때 가면 제아무리 해명하려 해도 늦겠지.

       

        이 생각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탓에 다소 말이 모호하게 변했다. 당연히 로테는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다. 저걸 불만 가득한 표정이라고 봐야 하나?

       

        “언니… 뭣하면 대출이라도 받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곧 귀족이 될 텐데 무슨 돈 때문에 학교를 못 다녀요?”

        “인플레이션 때문에 나라에서 대출 상한을 내려버린 걸로 기억하는데….”

        “에테르, 대출 받을 필요는 없어. 학비라면 우리 집에서 내줄 수도 있어!”

        “아? 자,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까 저희 가문에서 장학재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거기 지원 대상자 목록에 언니 이름도 올려놓으면 되겠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하이고야. 이러다간 종일 한숨만 내쉬다가 끝나게 생겼다.

       

        잠깐 사이에 둘이 또 기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서로 공녀에다가 백작 영애니까 ‘겉으로는’ 상황이 험악해지지 않을 뿐이지.

       

        이거, 대놓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다면 더 난감할 뻔했다.

       

        그리 생각하던 찰나였다.

       

        “에테르.”

        “으, 응?”

       

        “난 지키지도 못할 약속 만드는 사람이 제일 싫어.”

       

        내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었다.

       

        진짜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소한 것 하나로 로테가 이렇게 변해버리냐.

       

        버멜은 알고 있었을까? 빙의자니까 꿰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새끼, 가기 전에 공략 노트라도 하나 만들어주고 떠나지.

       

        로테의 눈동자는 반쯤 죽어있었다. 그 한기를 마주친 내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필사적으로 계책을 짜내야 한다. 어떻게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이 이상 선택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줘야 할 때였다. 

       

        나는 잠시간의 신음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로즈마리.”

        “네, 언니.”

        “미안하다.”

        “아, 네…. 네에?”

        “학사모 쓰게 되면 로테랑 살 거야.”

       

        블루베리가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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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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