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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3

       *

         

         

         분노는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애당초 분노의 대상이 잘못되었으니까.

         

         그의 분노는 온전히 한 사람에게 가 닿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이전까진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도 무의미하게 소모해선 안 되니까.

         

         

         “정보 고맙소.”

         “무얼.”

         

         

         이반은 눈 앞의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정보를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대공의 거취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렉산드르의 접촉을 밝힌 순간 그는 엘리자베타에게 복종한 것과 같다.

         

         

         “나도 욕심이 나더군. 드워프가 아닌가. ‘그’ 드워프. 지금의 2군단이 그러하듯, 그때의 나도 드워프의 군수물자가 썩 탐나지 않았겠나.”

         “….”

         “왕세자가 그러더군. 단지 군정을 지키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드워프의 모든 군수산업시설을 양도하겠노라고. 크라실로프를 통치할 때, 군정을 독립시켜주겠노라고.”

         “그렇다면 왜…?”

         

         

         군정 독립. 즉 식민지를 온전히 독립국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군수시설을 이양해준다면 경제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

         

         마족 군정 식민지의 생산력과 드워프 군수시설의 기술력, 그리고 1군단의 군사력이 합쳐진 독립국. 그건 크라실로프의 국체보다 뛰어날 가능성마저 있었다.

         

         

         “너무 달콤하지 않겠느냐.”

         “….”

         “상식적인 군주라면 결코 봉신에게 그런 조건을 대가로 지급하지 않는 법이다. 저 조건을 모두 들어준다고 가정한다면 둘 중 하나지.”

         

         

         아주 멍청한 놈이거나, 달콤한 함정이거나.

         

         알렉산드르는 결코 머저리가 아니다. 그가 멍청했다면 엘리자베타와의 정쟁을 십수 년간 이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엘리자베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인 중 하나였으므로.

         

         그러니 최소한 왕세자가 머저리는 아니라고 본다면, 이건 함정이다. 대공은 알렉산드르의 접촉을 인지하는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침묵했다.

         

         드워프가 정말 크라실로프의 국경선을 밟는다면 그때 출정하기로 각오하고. 군정청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2군단이 드워프와 협력한다는 것이 아닌가. 난 당연히 알렉산드르가 2군단에도 접촉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2군단은 왕녀에게 충성을 맹세하더군.”

         

         

         대공은 빙글빙글 웃으며 바싹 마른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황급히 알아보니, 그래. 자네가 복귀했다더군. ‘작은’ 이반이. 선왕의 처형인이. 조금 더 인력을 풀어보니, 왕세자파 귀족들이 바로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지 않나.”

         “….”

         “곧장 자네에게 연통을 보냈었지. 기억 나나? 드워프 놈들이 문호를 열고 난 직후의 일이었네. 자네에게 분명 한 번 만나자고 했었지?”

         

         

         그랬다. 무시했지만.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무슨 심정이었을 것 같나. 방첩사령부 놈들이 그 시절 절멸부대의 반절만 되었어도 알렉산드르의 접촉을 미리 파악했을 수 있겠고, 그렇다면 나는 중앙정계에서 ‘왕세자파’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건….”

         “밤잠을 잘 수가 없더군.”

         

         

         대공의 눈 밑이 거뭇했다.

         

         

         “내가 아는 작은 이반이라면 식민 군정 방비를 아무리 잘해두어도 내 목을 따러 들어오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테니.”

         “오해요.”

         “…그럼 대체 왜 오지 않는가. 그런 주제에 내 서신은 어째서 무시하는 건가? 2군단이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 1군단의 배후를 노리고 있는 것인가?”

         

         

         2군단의 위수범위는 북부전선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때 북부전선이었던, 국경선 인근을 방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 산맥 너머엔 1군단의 식민군정이 있다. 마족령 깊은 곳에.

         

         만일 2군단이 국경선을 차단해버린다면, 1군단은 그대로 마족령에 고립되고 만다. 물자가 끊긴 이후 1군단은 마족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 뻔했다.

         

         

         “…그럼 그냥 전하께 직접 보고하지 그랬소.”

         “중앙정부의 핵심인사는 당연히 자네일 테고, 자네가 내 서신에 답하지 않는다면 왕녀에게 무슨 말을 보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네가 중간에 탈취할텐데.”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소.”

         

         

         대공은 이반의 항변을 무시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금이라도 군사를 일으켜 최소한 방어를 시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알렉산드르와 다시 접촉해야 하는가. 알렉산드르의 시도가 실패한 이상 내게 무슨 수가 있을 수 있나.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틸레스에서 변고가 들려오더군.”

         “아.”

         “왕녀가 직접 2군단을 이끌고 틸레스의 내전을 정벌했다고. 하필이면 2군단일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수도사령부도 아니고, 북방군단을 서부 끝까지 출정시킬 이유가.”

         “수도사령부에 군사력이 부족….”

         “충성을 확인하고, 군사 동원력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듣자하니 명을 내린 후 열흘 안에 출정을 끝냈다 하더군. 2군단은 왕녀의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지?”

         

         

         그래서 그가 군세를 몰아 들이친 것이다. 북방 저 너머에서 출병해서 2군단의 주둔지를 통과하면서도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의 병력은 국경의 끝에서 수도까지 고작 며칠 안에, 심지어 방첩사령부의 정보전달보다도 빠르게 프리첸카야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라고.

         

         이건 그 나름의 생존전략이었다. 군세를 과시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유용성을 왕녀에게 직접적으로 알리기 위함이다.

         

         이걸 그저 서신으로 전달하면 눈 앞의 사내에게 모두 가로막힐 것이 뻔했으니까. 도저히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하게 들이쳐야 했다.

         

         

         “하….”

         

         

         이반은 깊은 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일단 사과를 하고 싶었다. 이 늙은 군인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는가. 크라실로프의 겨울은 지독하다. 그 겨울, 심지어 가장 매서운 북방에서부터 기병으로 잠도 아껴가며 돌파해온 것이다.

         

         

         “그…전하께는 잘 말씀 드리겠소.”

         “그래야지.”

         “조만간 알현하실 수 있을 거요. 함께 온 병력의 무장을 해제한다면 수도 입성을 허하겠소.”

         “그러겠다.”

         “그리고 그… 미안하오.”

         

         

         이반은 상식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노인을 학대하지 않는다. 그는 전근대 판타지 세상과 달리, 효와 도덕이 초등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지구 출신이었다.

         

         별생각 없이 편지 하나를 무시한 탓에, 일흔 넘은 노인이 겨울철에 말 한 필에 매달려 나라의 절반을 횡단해야 했던 이 상황에서 책임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눈 앞의 사내는, 그가 은퇴를 결심했을 때 그의 퇴역을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엘리자베타의 힘만으로는 그를 군적에서 완전히 빼돌리고, 사회에서 온전히 죽은 사람으로 처리하기엔 모자람이 있었으니까.

         

         알렉산드르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심지어 절멸부대의 생존자들조차도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이반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자, 대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텐가. 칼리온으로 갈건가? 쉽지 않을 텐데.”

         “공식 외교 절차를 거친다면 어려울 일이 없소. 엘프들은 나를 알지 못할 테니.”

         “뭐, 그거야 그렇지. 이미 사 년 전에 죽은 ‘인간’을 기억하기엔 엘프들은 너무 오만하니까.”

         

         

         대공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잠시 여기에서 지내겠네. 자네가 열심히 키운 훈련병들이나 구경해야겠군.”

         “고아들이오.”

         “나도 눈은 있네.”

         

         

        *

         

         

         “절대.”

         

         

         침묵 속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짧게 울렸다.

         

         

         “불가.”

         

         

         쾅. 작은 손이 테이블을 거칠게 두드려, 위에 놓인 잔이 덜그럭거렸다.

         

         

         “불가! 불가! 불가!!”

         “전하.”

         “안 돼! 본인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아니! 흙이 들어가도! 본인이 흙이불을 덮어도 그건 안 돼!!”

         

         

         엘리자베타는 거의 발작을 하고 있었다. 이반은 짧게 한탄했다. 그녀는 군왕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었으나, 잔걱정이 너무 많았다.

         

         

         “또 가서 무슨 짓을 하려고! 어딜 다쳐서 어떻게 실려 오려고! 다리는 나았나? 움직일 수는 있나?”

         “예, 전하.”

         “팔은?!”

         “멀쩡합니다.”

         “성능은?”

         “3할가량 돌아왔습니다.”

         “거 보아라!!”

         

         

         엘리자베타는 눈 앞의 사내와 대화하는 법을 익힌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정량적인 수치로 질문할 때, 이반은 결코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움직일 수 있나? 라는 질문은 사실 무의미했다. 사지가 붙어만 있으면 일단 움직이는 사내였으니까.

         

         따라서 묻는다면 육체의 기능을 정량적으로 질문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것이 3할이라. 이반 정도의 초인이 갖는 회복력을 고려할 때, 한 달이나 정양했음에도 온전한 컨디션이 아니란 의미다.

         

         성녀의 치유로도 완전 수복이 어려울 정도의 부상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그 정도로 누더기가 되면, 고작 4주 정도의 치료로는 결코 부상에서 회복할 수 없으니.

         

         심지어 저 사내는 힐링 포션과 같은 의약 처치를 단호하게 거절하기까지 했다. 미련하게도. (이반은 결코 아군에게 힐링 포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엘리자베타의 폭거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3할이다. 그리고 칼리온의 귀 큰 족속들의 음험함은 틸레스의 말 탄 개들보다 열 배는… 아니, 백 배는 더하다! 줄어든 전력으로 더 강대한 군세에 도전하는 것은 대체 어느 군략에 적힌 병법이더냐!”

         “하오나 전하. 알렉산드르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후환이 무궁합니다.”

         “내 오라비가 칼리온에 기어 들어간 이유를 모르겠느냐?”

         

         

         엘리자베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 작자는 이미 내륙에서 기반을 모두 상실한 것이다! 드로안의 허스칼을 충동질한 계책, 실패했지. 드워프의 내전? 실패했다! 그리고 틸레스의 반정마저도 실패했어! 국가 전복이 가능할 계획을 세 번 연달아 실패만 한 놈에게 대체 누가 선뜻 후원을 하겠느냐?”

         

         

         그 정도라면 지지기반이 아예 송두리째 무너져야 정상이다. 엘프들이 그를 도운 이유? 그야 뻔했다. 그게 엘프니까.

         

         엘프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싫어하는 족속이다. (사실이다.)

         

         평화, 그리고 안정된 정세에선 그 어떤 이득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혼란이 심해질수록 엘프들의 외교는 더욱 예리해지기 마련.

         

         어쩌면 저들이 연합 왕국을 도운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연합이 너무나 빠르게 마족들에게 절멸하리란 판단이 아니었을까.

         

         엘리자베타는 거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족속들이니, 실패만 거듭하는 알렉산드르를 기물로 사용하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알게 뭔가. 훗날 알렉산드르를 이용해 크라실로프에 다시 충동질을 시도할지.

         

         

         “그러니 그대는 결코, 절대, 절대로 이 나라를 벗어나지 말아라. 이것은 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틸레스는 차라리 군세를 몰아 침범할 방법이라도 있었다. 그것조차도 이반이 죽은 줄 알고 벌였던 외교적 무리수였다.

         

         한번이면 족했다. 이 사내를 잃는 것은.

         

         칼리온은 뱃길로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크라실로프엔 수군이 없다. 심지어 부동항마저 없어서, 겨울철엔 바닷길이 모두 막힌다.

         

         그녀가 칼리온에 접촉할 유일한 수단은 틸레스를 통한 무역로뿐이었다. 그 길로 군사를 이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칼리온은 정말 다른 세상이나 다름없다.

         

         결코 윤허할 수 없는 노릇이다.

         

         

         “…명을 받듭니다.”

         

         

         이반은 가만히 고개를 조아렸다.

         

         엘리자베타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건넸으나, 이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그는 훈련 받은 요원이었으므로, 한번 겪은 실패를 두 번 겪지 않는다.

         

         한번이면 족했다. 적을 눈앞에서 놓치는 것도, 추억을 공유하는 오랜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도.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고집을 부리는 20대 중후반의 어린 여자를 굳이 설득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구 시절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지구 시절 단 한 차례도 연애에 성공한 적이 없었으므로, 여자를 설득하는 법 따윈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절멸부대는 설득 따위 하지 않는다.

         

         언젠가 회고했듯이. 오직 증명할 뿐.

         

         

        *

         

         

         “칼리온으로 향하는 밀항선을 준비해야겠다.”

         “그건 또 제 전문이죠!”

         

         

         엘피헤라는 마침내 밝게 웃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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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의 장점 : 우리 함바집 이모님 알배추무침을 먹을 수 있다.

    이번 주도 화이팅입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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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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