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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3

    터벅터벅. 

    서아 언니의 사무실에서 시달리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아, 벌써 밤이네.”

    서아 언니 사무실 앞 복도에 뚫린 창문에서 보이는 안뜰은 어느새 태양 빛은 흔적도 남지 않은 완연한 밤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몇 가지 사소한 문제로 이렇게까지 지적하다니!

    서아 언니는 너무 깐깐하단 말이지.

    ‘검은 사신이’ 최초 발견 보고 누락 건을 시작으로 이제까지 보고를 빠뜨렸던 온갖 사례들이 튀어나왔다.

    특히 ‘설탕 플라밍고’는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내가 발견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그래도 오늘 서아 언니의 지적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세희 언니가 말하길, 서아 언니가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웃음도 많아져서 착해졌다고 했었는데 확실히 그랬다.

    뭔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끄으응.”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풀어주고 있을 때, 연구소 복도에 귀여운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뚜방뚜방.

    겨우 성인의 절반 정도의 크기를 가진 그림자는 비틀거리면서도 특유의 걸음걸이로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사신이가 돌아온 건가? 

    걸음걸이는 조금 이상했지만, 그림자의 실루엣이 사신이랑 똑 닮아있었다.

    “사신아?”

    발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복도를 뛰어나가자, 그곳에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아이가 있었다.

    검은 사신이!

    은은한 달빛을 배경으로 안뜰에서 퍼져나온 검은 사신이들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뚜방뚜방 걸어 다니고 있었다.

    “와!”

    다양한 크기의 검은 사신이들이 해맑게 웃으면서 걸어 다니고, 부딪치고, 데굴데굴 굴렀다.

    검은 사신이들이 콜로세움에서처럼 크고 작은 크기로 뭉쳐서 돌아다녔다.

    작게는 두 마리가 합쳐진 두 배 크기의 검은 사신이부터.

    크게는 회색 사신이만 한 커다란 검은 사신까지 다양한 크기의 검은 사신이들까지!

    가장 인기가 많은 크기는 회색 사신이의 크기인 1m 정도였는데, 콜로세움에서와 달리 목적이 없어서 의견 통일이 잘 안되는지, 넘어지고 구르기 십상이었다.

    넘어지면 검은 사신이들은 뭉쳐있던 형태를 잃어버리고 손바닥만 한 크기로 흩어져 버렸다.

    흩어져서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사신이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서로 투닥이며 해맑게 웃었다.

    그런 즐거워 보이는 웃음에 이끌려서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웃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휴대전화로 안뜰에서부터 이어지는 검은 사신이들의 뚜방뚜방 행렬을 찍고 있었는데, 한 검은 사신이가 나를 보더니 뚜방뚜방 걸어서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보통 검은 사신이의 두 배 정도 크기로 뭉쳐있는 검은 사신이가 나를 바라보며 양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손바닥을 활짝 열고, 잼잼.

    안아달라는 듯한 그 제스처를 보고, 나는 그 검은 사신이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따뜻하다.

    그리고 원래 쪼그마한 미니 사신이들보다 중량감이 있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손안이 가득 차고, 무게가 느껴져서 더욱 그 귀여운 크기를 실감할 수 있는 검은 사신이였다.

    손바닥 위에 검은 사신이를 올려두고 볼을 문지르자, 귀여운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검은 사신이는 즐거워했다.

    검은 사신이는 내 손가락을 잡고 자기 뺨에 문지르거나, 귀여운 상어 이빨로 약하게 앙 물면서 애교를 부렸다.

    삐-.

    검은 사신이를 쓰다듬다 보니, 사신이가 아기 새처럼 만족스러움이 느껴지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들어보니, 복도에서 놀던 검은 사신이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자, 모두 이리 와!”

    그러자, 검은 사신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검은 사신이 고치로 만들어버렸다.

    ***

    주황색 달이 인도해 준 지하 신전 내부.

    화로 근처로 다가가자, 화로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주황색 진주는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진주에서 뿜어내는 빛과 천장을 장식한 모자이크에서 내려오는 빛이 어우러져 어두운 지하 신전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신전 내부를 밝히는 빛이 강해질수록 촘촘하게 배치된 두꺼운 신전 기둥이 더욱 짙은 그림자를 사방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미 불이 꺼진 지 오래된 쓸쓸한 화로와 그 위에 떠오른 주황색 진주를 보니, 이상하게 원래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얀 불길이 천장을 집어삼킬 기세로 솟아오르고, 그 불길 속에서 고고히 주변을 내려보는 주황색 진주의 모습.

    하지만 현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차갑게 식은 화로와 원래 모습을 잃어버린 주황색 진주.

    화로 위에 둥실둥실 떠오른 진주는 그 표면이 콘크리트처럼 거칠어져 있었고, 검게 오염되어 있었다.

    오염된 진주에서는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점점이 검은 점액이 화로 속으로 떨어졌다.

    고통스러운 것처럼 천천히 진동하는 진주를 바라보며,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재생력을 고갈시킨다.>

    아귀 아종이랑 똑같은 파괴 조건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검은 점액에 오염된 녀석들은 파괴 조건이 단순해져 버리네.

    철벅 철벅.

    내가 파괴 조건을 확인하기 무섭게, 질척질척한 진흙의 소리가 신전 내부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신전 기둥의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기어 오는 검은 고기들은 이미 비행 능력을 잃어버렸는지, 추악한 다리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다리 모양은 마치 털이 숭숭 나고 익사체처럼 불어 터진 인간의 다리처럼 생겼다.

    귀여운 구름 고기에 지저분한 다리를 붙여놓으니 두 배는 추악한 모습이었다.

    그으윽.

    입에서는 검은 점액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구름 고기들을 바라보며 한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 오른손이 까맣게 물든 순간, 뀩 하고 공간을 움켜쥐었다.

    검은 구체가 허공에 만들어져 신전 내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붙은 모자이크 그림.

    두꺼운 신전 기둥.

    망가진 검은 사신의 석상.

    불이 꺼진 화로.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구름 고기들.

    그리고 검은 점액을 흘리는 진주까지.

    뀩 쥐었던 손을 펼치자, 검은 구체가 사라졌고 신전 내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천장마저 검은 구체 속으로 빨려들어 뻥 뚫린 하늘로부터 지하 신전으로 은은한 달빛이 내려왔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지하 신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자, 은색으로 빛나는 빛줄기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하늘 위에는 다양한 달들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색 달, 붉은 달, 푸른 달, 남색 달 그리고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주황색 달.

    주변을 성벽처럼 둘러싼 안개의 장벽은 빠른 속도로 힘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점점 흩어지자, 안개 속에서 살아가던 구름 고기들이 하늘의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은하수처럼 수놓던 구름 고기들도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구름 고기 사태의 끝이었다.

    ***

    늦은 밤, 트리니티 제1 연구소 부지로 수많은 자재가 운송되어 오기 시작했다. 

    오브젝트 격리용으로 설계된 두터운 격벽들과 건설 자재들이었다.

    제1 연구소장은 소장실의 높은 사무실 창문으로 트럭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장님. 예정대로 자재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들어온 자재들은 준비해 둔 컨테이너에 실어둬라. 그리고 오대산의 안개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는 대로 출발해야 하니, 철저히 준비해 둬.”

    [네, 소장님.]

    제1 연구소장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소장실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계획을 점검했다.

    ‘불안하군. 불안해.’

    분명 계획은 완벽했고, 회색 사신도 배제된 상태였지만 불안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제대로 된 실험과 검증도 없이, 무작정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불안한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회색 사신이 달을 수집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된 연구로 진화액이 인류의 희망으로 밝혀져도, 달이 없다면 인류는 끝장이었으니까.

    이미 오대산에 비밀 연구소를 세울 준비는 마친 상태였다.

    아무도 모르게, 언론은 물론 세계 각국의 협회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뉴스를 보는 ‘회색 사신’에게 눈치 채여선 안됐다.

    다른 연구소에서는 ‘회색 사신’을 단순한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1 연구소장은 제3 연구소장의 노트를 바탕으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회색 사신은 인간 수준의 사고 능력을 가진 인류의 대적자다.’

    회색 사신은 그 사고 능력을 가지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달’과 ‘진화액’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니, 절대로 회색 사신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그래서 최대한 외부 노출을 줄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진화액’에 유효한 재질로 만들어진 격벽으로 진화액의 외부 누출을 막고, 비밀 연구소에서 최대한 빠르게 연구한다는 계획이었다.

    주황색 달의 무력화가 확인되는 대로 달려들어서 연구소를 세울 것이다.

    검은 점액의 유해성만 제거한다면, 인류는 오브젝트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업적은 자기 것이 될 것이라며, 제1 연구소장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과실을 떠올리니, 소장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연구소장님. 오대산 안개의 제거,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장의 마음속이 안정되는 순간, 무전을 통해 기다리던 순간이 전해졌다.

    “바로 출발해라.”

    무전으로 명령을 내린 소장은 창문가에 서서 빠져나가는 차량을 내려다보았다.

    “날씨가 좋군.”

    빠져나가는 컨테이너들에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소장의 눈에 아름다운 밤하늘이 보였다.

    마치 인류가 새로운 분기점에 들어선 것을 축하하는 것만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름답게 유영하는 몇 마리의 구름 고기.

    그리고 창문에 비친 노랗게 타오르는 불꽃.

    “!”

    연구소장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에 놓인 제3 연구소장의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회색 사신이 보였다.

    그 순간 회색 사신은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소장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약간의 귀찮음, 그리고 분노가 담겨 있었다.

    짝짝.

    박수 두 번.

    콩콩콩.

    그리고 발 구름 세 번.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건물도, 트리니티 연구소도, 제1 연구소장의 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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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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