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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4

    화창한 날씨.

     

    환호성이 이른 새벽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온 수도가 이어질 행사에 대비하며 태동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만이 이 공간속에서 웃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나와 연관된 사람들 모두이려나.

     

     

    나는 나를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 네르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에서 나와, 나는 네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쓰러진 그녀의 눈 주위에는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근 며칠간 울기만 했으니 당연한걸지도 모른다.

     

     

    나는 당장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조차도 형용하지 못하는 기이한 마음이었다.

     

     

    분노일까. 미련일까. 안쓰러움일까. 혐오감일까. 죄책감일까.

     

     

    모르겠다.

     

    한곳에 너무도 짙게 섞여버린 이 복합적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게 어려웠다.

     

     

    기딘이 이런 내 옆에서 나를 보았다.

     

    블랙우드의 토벌전 이후로 내게 그나마 공손한 태도를 취하던 그였다.

     

     

    “…밤새 네르가 이곳에 있던겁니까.”

     

    “…”

     

    나는 대답 대신, 기딘을 바라보며 말했다.

     

    “…데려가시죠.”

     

    “…”

     

    기딘도 내가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딱히 블랙우드와 가깝게 지내고자 이러는 건 아니었다.

     

    아직 기딘을 포함해 블랙우드 가문에게는 받아내야할 빚이 있다.

     

    홍염단을 배신하려 해놓고 대가없이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 이야기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네르를 부축하는 기딘을 바라보았다.

     

    “….베르그…”

     

    지쳐 기절한 네르는 내 이름을 속삭였다.

     

     

    기딘은 그런 네르의 중얼거림을 듣다 내게 말했다.

     

    “…우리가 저지른 죄는 압니다.”

     

    “…”

     

    “…하지만…네르 또한 당신을 정말 사랑하는 듯 하군요.”

     

     

    나는 우리의 갈등에 끼어드는 기딘에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네르에게 신경을 썼다고.”

     

    “…여동생부터 챙기라고 말한건 당신 아닙니까?”

     

    “…”

     

    나는 기딘에게 업힌 네르를 보았다.

     

    축 쳐진 두 쫑긋한 귀와 꼬리.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한숨을 내쉬었다.

     

     

    떠나가는 기딘의 등을 보며 말한다.

     

    “…행사에는 늦지 않게 데려와 주시죠.”

     

    기딘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준비를 끝마친 내게 아르윈이 다가온다.

     

    구슬퍼 보이는 표정과 달리 아름답게 스스로를 치장한 아르윈.

     

     

    아르윈은 어떻게든 우리의 망가져버린 관계를 이어보려는 것처럼 속삭였다.

     

    “…오늘도 멋져요, 베르그.”

     

    “…”

     

    나는 그 흔한 칭찬 하나 돌려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억지로 굳혀두었던 아르윈의 표정은 더더욱 망가져갔다.

     

    이틀 전보다 어제가. 어제보다 오늘이 표정이 나빴다.

     

    우리의 관계가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힘들어하는 듯 했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내 모든 노력과 마음이 짓밟힌 상황속에서…다시 미소를 지으며 모르는척 살기에는 아직 감정이 생생했다.

     

    시간이 흐르면 이조차도 무뎌질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당장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속에서는…특히나 말을 아끼고 싶었다.

     

     

    어쩌면 몇 달 후에는 그녀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정일 뿐이지만…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노력 뒤에서 칼을 갈던 그녀들의 모습은 잊고.

     

    진실된 마음을 보여주는 그녀들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꼈던 배신감보다 더한 행복으로 아픔을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이랬던 게 미련해 보일 정도로 잘못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당장은 이럴 수 밖에 없다.

     

    미래의 모습은 모르겠으나, 지금의 난 이럴 수 밖에 없다.

     

    미소가 나오질 않는다.

     

    흔한 칭찬 하나 흘리지 못하겠다.

     

    마음의 여유가 당장에는 없었다.

     

    혹독한 상황이 연달아 터지니 나도 지치게 된다.

     

     

     

    아르윈도 차가운 나의 대응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어떠한 말로도 상황이 풀리지 않는다는걸 깨달았기에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대신 그녀는 천천히 곁으로 다가와 내 손에 깍지를 끼우려 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이 내 손틈을 파고든다.

     

    -스윽.

     

    나는 자연스레 팔을 빼냈다.

     

    “…”

     

    잠시 이어진 그녀의 침묵.

     

     

    “….르그…제발…”

     

    아르윈은 끝내 내 등 뒤에 서서, 눈을 나의 어깨에 묻었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아르윈이 내 표정을 보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까지 아픈걸까.

     

    아픈걸 알면서도 왜 달리 행동할 수 없는걸까.

     

     

    “…베르그.”

     

    이렇게 있다보니 이내 네르가 다가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선잠밖에 자지 못했을 그녀는 힘들어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보며 그녀는 활짝 미소부터 지어보였다.

     

    당연하게도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지난 몇 달간 그녀의 미소는 많이도 보았으니 나는 알 수 있었다.

     

     

    “…”

     

    나는 그녀의 등장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을 보며 말했다.

     

     

    “…….가자.”

     

     

    *****

     

     

    네르는 공기중에 느껴지는 긴장감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불안한 공기가 하늘에 맴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 불안감은 가속했다.

     

     

    베르그 곁에 붙어있는 아르윈이 더더욱 미워보인다.

     

    네르는 이 모든게 본인의 불안감에서 파생된거라는 걸 알았다.

     

     

    결국 아르윈 대신 자신이 베르그에게 선택된다면 해소될 아픔이었다.

     

    물론 이후로도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나…베르그와 헤어지는 것보다는 수만배 나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자꾸만 그녀를 감쌌다.

     

    아직 최악의 고통은 찾아오지 못한 것 같은 느낌.

     

    그 두려움에 움직이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였다.

     

     

    끝없는 사람들이 펼쳐진 공간속에서, 박수갈채가 이어진다.

     

    승전했음에 기뻐하는 사람들이, 전쟁이 끝났음에 안도하는 병사들이, 자식들을 먹여살릴 수 있을거라 희망하는 부모들이 하나 같이 기쁨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모든 환호성이 고점에 도달했을 즈음에, 국왕이 천천히 걸어나와 등장한다.

     

    모든 환호성이 그런 국왕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전투는 용사 일행이 이어나갔으나, 전쟁을 한 것은 바로 국왕이었다.

     

    적절한 시기에 다양한 가문들을 원조해, 왕국이 버티도록 조정한 그였다.

     

     

    한참이나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아들이던 국왕은 이내 손을 들었다.

     

    그 작은 행위에 수도에는 침묵이 잦아든다.

     

     

    “끝없이 행복한 날이다.”

     

    그가 운을 뗀다.

     

    네르는 그 속에서 베르그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베르그는 국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용사 펠릭스가 마왕의 목을 잘라내어, 길었던 전쟁이 끝났다. 종족 구분 없이 모두가 힘들었던 7년이었다. 누구는 부모를, 누구는 자식을, 누구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겠지. 이 길었던 전쟁에서….”

     

     

    네르는 국왕의 그 어떤 이야기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간절한 마음만 가득할 뿐이었다.

     

     

    베르그의 첫인상이 좋지 못했다는 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무뚝뚝한 인족 용병.

     

    그게 다였으니.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본 결과, 베르그는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냥했고, 따스했으며, 배려심이 너무도 깊은 사람이었다.

     

    강인했고, 포기를 모르는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적이 강력해도 겁을 먹지 않았고. 희망이 없더라도 제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 소중한 사람을 우선시 할 줄 알아…남편으로서 그보다 좋은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네르는 베르그에게 그냥 사랑에 빠진게 아니었다.

     

    거부하고 거부하려 했음에도…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자신에게 실망하여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평생을 살아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존재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느껴져 눈물이 나온다.

     

    그가 자신의 것이었음에 감사한 날을 셀 수 도 없을 정도였다.

    평생을 그와 살아가면 행복하리라는게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와의 관계가 커다란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두 번 다시 사랑 받지 못할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지난 며칠간 끝없이 눈물을 흘렸던만큼 이제는 어느정도 절제할 수 있었지만…자칫 방심하면 똑같이 눈물이 흐르는 건 바꿀 수 없었다.

     

     

    국왕이 그런 상황속에서 이어갔다.

     

    “…그리하여 그 공에 알맞은 보상을 내리고자 한다. 전쟁의 신, 다이안에게 선택 받은…아크란. 앞으로 나오거라.”

     

    ‘와아아아아!!’

    켄타우로스 아크란이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단상에 올랐다.

     

    하지만 네르는 그런 켄타우로스에게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채 베르그를 올려다본다.

     

    호흡이 가빠져 어떠한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불안감이 피어난다.

     

     

    “…베르그.”

     

    지난 며칠간 얼마나 그의 이름을 많이 불렀을까.

     

    그 동안 베르그가 자신을 무시한건 또 얼마나 될까.

     

     

    “펠릭스의 가장 가까운 친우로서 그 공이 깊다. 언제나 전쟁의 중심에서 흐름을 읽고,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진두지휘했지. 전쟁의 투사에게는….”

     

     

    베르그가 자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을때마다 심장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픔을 계속해서 맛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르그를 부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멀어지는 건 참아낼 수 없었으니.

     

     

    “…베르그, 제발 한 번 만 나를 봐줘.”

     

    “…”

     

    베르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천천히 네르를 바라보았다.

     

    “…”

     

    “…”

     

    얼마만일까.

     

    네르가 그토록 사랑했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한다.

     

    자신의 흰꼬리와 정반대의 색.

     

    새삼 그와의 차이가 느껴지는 네르였다.

     

     

    그 차이를 줄이고자 베르그가 어찌나 노력했는지도…네르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와아아아아아!!!’

     

    네르가 속삭임을 이어가려는 순간, 우레와도 같은 박수갈채가 터진다.

     

     

    아크란이 내려서고, 실프리엔이 단상에 올랐다.

     

    다양한 새들이 그녀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마찬가지로 기쁨을 표했다.

     

     

    “조화의 신, 니칼에게 선택받은 실프리엔. 당신의 희생 덕분에…”

     

     

    모두가 기뻐하는 상황속에서 네르는 혼자 눈물을 닦아내며 집요히 베르그를 보았다.

     

    박수갈채가 잦아든 순간 그녀가 다시금 그에게 속삭였다.

     

    베르그의 눈동자도 당장은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

     

    “알잖아…나 언제나…외톨이었던거…”

     

    그녀는 베르그에게 점점 기대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바라보든 신경쓰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어 그의 얼굴에 더 가까이 밀착한다.

     

    속삭임이 보다 선명히 들릴 수 있게 노력한다.

     

     

    “그때 할머니의 예언이 내게 도움이 됐었어…오라버니, 언니들이 날 밀어낼 때…할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단 말이야…내 편이 생길거라고. 내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거라고.”

     

    “…”

     

    베르그는 이번만큼은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네르는 그 관심에 희망을 걸며 계속해서 간절히 속삭인다.

     

    그녀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눈물도 억지로 참아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베르그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그에게 말한다.

     

     

    “…그 예언만을 기다리며 버텨왔어, 베르그. 괴롭힘을 당할 때도…내가 쉴 수 있는 무리가 없어도…할머니가 돌아가셔도…패륜아의 낙인같은 이 꼬리를 손가락질 받아도… 내 편이 나타날 거라는 생각 하나로 버텼던 거야…죽고 싶은 날도 많았는데…흐윽… 할머니의 말 한마디만 믿고 버텨왔어…”

     

     

    ‘와아아아아아!!!’

     

    국왕이 이어나가고 있었다.

     

    “…에게 선택받은 성녀님. 앞으로 나와주시죠.”

     

    성녀의 호명이 이어졌음에도 베르그의 눈은 네르를 떠나지 않았다.

     

     

    네르는 베르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그 상대를 놓치면 후회할거라 이야기했어. 그게 너무나 마음에 걸려서…그래서…그게 너무 두려워서…”

     

    그녀의 말을 이해해준 걸까.

     

    베르그의 차가웠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과거에 상냥했던 베르그의 모습이 얼핏 나타난다.

     

     

    동시에 베르그가 어렵게 말했다.

     

    아픈 마음 사이로 쥐어짜낸 이야기였다.

     

    “…그 상대가…”

     

    “….”

     

    “……나였을지도 모르는 거였잖아.”

     

     

    “상대는 귀족이라 말씀하셔서 그랬어…!”

     

    네르는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너와의 생활이 고통스러울거라 생각해서…그래서….”

     

    ‘와아아아아아아!!’

     

    “용사 펠릭스! 앞으로 나와라!”

     

    용사가 호명되는 순간 목소리가 관중들의 환호에 묻혀 사라진다.

     

    네르는 간절한 마음에 베르그의 팔을 더 강하게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서로의 이야기는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짧은 시간 두 사람은 눈만을 마주했다.

     

     

    말로도 전달이 안되는 이야기를 눈으로 하고 있었다.

     

     

    네르는 베르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보다 선명히 보이는 모습.

     

    강인했던 그 남자가 너무나도 아파하고 있었다.

     

    굳건한 태도에 숨겨져 보이지 않던 아픔이었다.

     

     

     

    마왕의 목을 잘라낸 용사를 향한 환호성이 줄어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그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눈을 서로에게서 떼어내지 못했다.

     

     

    한참이고 서로는 아무 말 없이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네르는 왜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것 같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가정에 숨이 자꾸만 쉬어지지 않았다.

     

     

    “…베르그.”

     

    그 불안함에 네르가 그를 불러보았다.

     

    ‘…내 남편…’

     

    속으로마저 그를 생각한다.

     

     

    그녀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게 된 유일한 자신의 편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사랑해본 적 없는 존재가 바로 베르그였다.

     

    그가 뿜어내는 빛에 네르는 눈이 부셔 눈물이 흘렀다.

     

     

    네르의 손이 덜덜 떨린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기만 한 행동으로…그녀는 베르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베르그도 어째서인지 눈가가 젖어드는 듯 했다.

     

    펠릭스가 단상을 내려가고, 국왕이 손을 든다.

     

    다시금 침묵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침묵속에서, 네르가 말했다.

     

    “…이제는 그 상대가 누구였든지간에 상관없어…베르그. 난 너만이…너만을…”

     

     

    베르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는 어렵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하자, 우리.”

     

     

     

     

    -쿵.

     

    네르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망치가 가슴팍을 치고 지나간 듯 했다.

     

     

    국왕이 그 고요속에서 말한다.

     

    “아직 한 명의 영웅이 남아있다. 고독의 신, 린에게 선택받은….”

     

     

    베르그는 눈을 꾹 감으며, 힘들게 네르의 손을 떼어냈다.

     

    “…그만하자, 네르.”

     

     

    네르는 눈 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멍하니 뜬 눈으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베르그. 단상으로 올라오거라.”

     

     

    모든 이목이 베르그에게 쏠렸다.

     

    베르그는 네르를 밀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어…?”

     

     

    어느새 멀어져가고 있는 베르그를 보며 네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의 등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당장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홍염단이 지대한 공을 쌓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만…보수에 대한 협상은 다른 곳에서 하는 걸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베르그가 다른 영웅들처럼 저 앞으로 나가고 있는 걸까.

     

     

     

    네르는 천천히 아르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르윈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엘프의 눈에서조차 눈물이 흘러나왔다.

     

    네르와 마찬가지로 불안함을 감지한것처럼.

     

     

    베르그가 국왕 앞에서 한 무릎을 꿇는다.

     

    국왕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홍염단의 피해가 크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용병집단이었음에도, 그대 인족들이 보여준 끝없는 용기와 희생정신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었어. 마왕을 향한 기습 공격이 성공한것도 전부 자네들이 있었기 때문이야.”

     

    베르그는 무표정하게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자네가 형제처럼 따랐던 ‘아담’이 전사했다는 걸 들었네. 거짓 하나 없는 애도를 보내네. 최고전사 게일조차도 그의 마지막은 영웅적이었다 하더군.”

     

    잔잔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마왕의 오른팔은 죽이지 못했지만…전쟁은 분명 이긴 것이지. 그리고 베르그. 난 자네의 형제 아담에게 약속한게 하나 있었어. 지대한 공을 세우면 주기로 한 보수가 있었지. 그 보수를 아담이 직접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그가 없는 이상, 그의 유지를 지키는 자네에게 주는게 옳다고 생각하네.”

     

     

    네르는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부터 모든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하는 듯 했다.

     

     

    “홍염단의 단장이자, 고독의 투사인 베르그! 자네에게 스탁핀과 그 일대의 땅을!”

     

     

    네르가 자신도 모르게 속삭인다.

     

    “…안…돼.”

     

    네르는 지금 들려오는 이야기를 믿을수가 없었다.

     

    베르그가 작위를 받으면 안된다.

     

    그가 귀족이 되면 안된다.

     

     

    베르그가 귀족이 된다면…블랙우드도 필요가 없어진다.

     

    그가 자신들과의 혼인을 이어나가던 유일한 이유가 사라져버린다.

     

     

    왜인지 이 순간, 네르는 할머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와 정말로 잘 맞는 아이가 하나 있구나. 용맹하고, 따스하고, 상냥해.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받을 남자야. 그럼에도 이 남자는 네게 깊이 빠지겠어. 너도 자연스럽게 이 아이에게 빠질거고.’

     

    용맹하고, 따스하고, 상냥했던. 수많은 여인들에게 사랑 받았던 베르그.

     

    ‘저…정말?’

    ‘그렇고 말고. 그 누가 오더라도 네 편이 되어주겠구나. 누구보다 든든하게 널 지켜줄거고.’

    ‘언니…오빠들한테서도?’

    ‘더 무서운 사람들에게서도 지켜줄거란다. 세상이 다 돌아서도, 그는 네 편이 되어줄거야. 온 세상에 둘만 남겨져도 행복하게 살 정도인걸?’

     

    그 누가 상대가 되어도 맞서 싸워주던 베르그.

     

     

    ‘…이 아이가 나타나면, 잘해줄 수 있지?’

     

     

    순진했던 네르가 맺었던 약속.

    ‘다, 당연하지. 파이도 맨날 만들어줄거야.’

     

    ‘정말 잘해줄 수 있겠지? 너처럼, 상처가 좀 있는 아이 같아 보이는구나.’

     

    베르그가 지녔던 상처.

     

     

    국왕이 큰 소리로 공표한다.

     

    “그리고 그 지역의 주인이 된 네게… ‘라이커’라는 성을 부여하겠다! 초대 가주로서…가문을 잘 이끌길 바라겠다.”

     

     

    환호성이 터져나와 베르그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그런 축복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로 네르는 멍하니 베르그를 바라보았다.

     

    “…아….아…아…”

     

    -투두둑…

     

    네르의 눈에서 마르지 않는 눈물이 쏟아진다.

     

    “…처음부터….”

     

    블랙우드의 힘이 더 이상은 필요로 하지 않을 베르그.

     

     

    네르가 맹세했던 약속이 다시금 머리에서 울려퍼졌다.

     

    ‘응…! 네르가 아픈거 다 없애줄게! 상처도 다 핥아줄거야…! 엄청 소중히 대할거야!’

     

    그 약속과는 반대로, 비견할 수 없는 아픔을 그에게 선물하기만 했던 네르였다.

     

    그를 절대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고. 마음이 없는 척 밀어내고. 배신을 준비하고…

     

    ‘그래. 그러면 걱정 없겠다. 네르, 웬만해서는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응?’

     

    ‘그 아이를 놓치면 안된단다.’

     

     

    네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부터 너였구나.”

     

    마지막 조각이 맞아들자…갑작스레 모든게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나 베르그가 사랑스러웠는지.

     

    왜 그렇게나 그의 곁이 편안했는지.

     

    …그녀가 한 평생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저기 있는 베르그였던 것이다.

     

       

    허탈한 실소를 흘리며…네르는 천천히 속삭였다.

     

    “…처음부터….너였던 거야…”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늦은 깨달음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성을 ‘다스’에서 ‘라이커’로 수정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공지에 올려뒀습니다.

    임경택_918님! 5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모코박스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힘내서 써보겠습니다.

    편식금지님! 2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ㅋㅋㅋ이모티콘 귀엽네요. 저도 감사드려요!

    프흐흐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저도 슈슉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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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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