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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것이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은 끔찍하게 망가진 이 세상.
나 앨리스 골드필드 역시도 망가진 채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별로 큰 감흥은 없었다.
내 감정을 불 싸지르고 그 대가로 신성력을 토해내는 이 고물 심장.
이걸 달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나 뿐이었지만, 그런 나조차 결국 이 기괴한 실험의 희생자일 뿐이구나 하는 건조한 감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심장이 분노로 들끓지 않고 차분히 돌아갈 때, 그 몇 없는 차분한 순간을 틈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겐 죽음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교단은 이 세상과 함께 무너져 몰락했고, 이미 가족은 모두 죽어 여신의 곁으로 돌아간 데가, 이름뿐인 약혼자마저도 새 짝을 찾았으니, 미련이 남을만한 인간관계는 모두 사라졌다.
게다가 이 심장을 달고 난 이후에, 나는 타오르는 분노를 신성력과 함께 마구 뿜어내며 살았다.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손수 붙잡아 그 어떤 종교나 법으로도 허용하지 않을 끔찍한 방법으로 처벌했고, 우리 가문을 짓밟은 그 파렴치한 개자식들은 죄 없는 어린애들까지 모조리 씨를 말려 버렸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후회나 죄책감도 가져본 적이 없다.
악인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 순간엔 늘 상쾌한 성취감만이 남았고, 남의 자식을 굶겨가며 배를 불린 악인의 자녀들을 처단하는 일은 늘 만족스러웠으니까.
누군가에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뇌를 달궈대는 이 지옥 불 같은 분노를 식혀주는 그 단비 같은 감정들을 싫어할 수는 없었다.
찝찝한 미련도, 남길만한 소중한 것도 없던 내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과업이라면 마왕의 목.
그리고 발더 스태프를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애쉬의 제안에 못이기는 척 함께했다.
제대로 된 준비까지 하면서 말이다.
설령 이 여정 중에 내 심장이 폭발해 낙오하거나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끝까지 과업을 위해 움직였고, 그런 내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 지금까지는.
*
엉성하고 요란했지만, 제힘으로 두 거인 괴물을 처단한 애쉬의 모습은 내 가슴을 달궈대기 충분했다.
성취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무심코 땅바닥을 짚은 손바닥의 화상에 고통스러워하며 찡그린 미간은 어설픈 애교를 더한 퇴폐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애쉬.
마리아의 동생.
내 후회의 조각이자, 어린 날의 추억.
그리고 유일한 나의 미련이자 욕망.
빌어먹을 심장 같으니,
행여나 애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건지, 눈치도 없이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심장이 야속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쉬가 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
두꺼운 흉갑에 갇힌 덜커덩 소리를 들을 만큼 애쉬는 예민하지 못했다.
때론 눈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전해주기도 하는 귀가 둔하다는 것은 전사나 모험가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었지만, 지금은 애쉬의 예민하지 못한 청력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턱 끝을 달구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팍에서부터 넘실거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화상으로 엉망이 된 애쉬의 손을 붙잡았다.
“아야, 아파. 누나.”
치료하기 위해 붙잡은 애쉬의 손바닥은 그 끔찍한 화상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툭툭 튀어나온 앙증맞은 뼈들이 귀엽기도 했다.
도무지 주체가 되지 않는 열기와 감정을 어떻게든 숨겨보려 괜히 틱틱거리는 내 타박에 멋쩍게 웃으며 변명하는 애쉬의 모습도 역시 미친 듯이 귀여웠다.
아. 젠장.
이미 몹시 뜨거운 심장이 석탄이라도 들이부은 듯 더욱 크게 불타오른다.
죽을 것 같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구 작동하는 심장이 신성력을 사방으로 흩뿌려대기에, 애쉬의 화상은 내 손바닥을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 이제 안 아프지?”
“헤헤, 누나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무리한 거기도 해.”
쿵 쿵쿵.
아,
제발, 이 빌어먹을 심장아.
눈치 좀 챙기란 말이야.
나는 평소와 다르게 거의 애원하듯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물론, 이 고철은 단 한 번도 내 의도대로 움직여 준 적이 없지만 말이다.
아아, 애쉬.
나를 믿고 무리했다는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하고 유혹적인지,
너는 알고나 있는 거니?
어릴 땐 철없고 순진한 꼬맹이였으면서,
몰래 내 등에 도마뱀붙이를 올려두고 도망치던 그 말괄량이가, 언제 이렇게 여자를 홀리는 몹쓸 남자가 되었는지.
“…”
알고있다.
나에겐 기회가 없다는 거.
물리적인 시간이, 그와 함께할 미래가 내게는 없다는 거.
실비아 같은 여자를 고른 게 흠이지만, 그래도 정략결혼이 아닌 직접 고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애쉬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거.
나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애쉬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려 했다.
나를 의지해선 안 돼.
내 존재에 익숙해지면 안 돼.
“애쉬… 나는,”
무엇보다, 이 심장은 당장이라도 작동을 멈출지 모른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애쉬는 말한다.
“그, 그러고 보니! 실비아는 어디 있어?”
“…”
아, 알아.
씨발, 안다고, 안다니까.
그래, 네가 좋아하는 여자는 내가 아니지, 알아. 안다고,
그렇게 몇번이고 상기시키지 않아도 됀단 말이야.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더, 더, 더더더더더.
너무, 너무 뜨겁게,
그 비린내 나는 개 좆만 한 마을에 숨어있던 발더 그 개자식을 만났을 때 보다 더욱더 뜨겁게,
내가 죽는 게 지금, 이 순간인가 싶은 정도로 뜨거웠다.
아니, 아니지.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안다.
이건 내가 화가 났다는 뜻이다.
아주 화가 난 거지.
왜?
애쉬의 곁에 있을 여자가 내가 아니라 실비아라는 걸 알아서?
아니,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내가 옆에 있는데도, 실비아만 찾는 애쉬가 야속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씨발, 실비아는 애쉬의 연인이니까.
애쉬가 사랑하는 건… 개 씨발 실비아니까.
나는 억지로 분노를 내리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기도와 식도가 익어버렸다가 회복될 만큼 뜨거운 한숨이었다.
“저 괴물들 무리를 찾아 토벌하러 갔어.”
“어? 언제?”
“애쉬 네가 공격했던 녀석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때쯤.”
“아…”
뭔데, 그 반응.
그렇게 실비아가 좋아?
나와 함께하는 이 잠깐을 못 견딜 만큼?
아니, 진정해.
앨리스, 이 미친년아. 제발.
냉정해, 냉정하자
애쉬를 봐.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애쉬를 잘 보라고.
멋쩍은 표정과 긴장한 듯 움츠러든 어꺠, 그리고 불안하면서도 슬픈 듯한 눈빛.
애쉬는 나를 걱정하는 거야.
조금 전, 내가 제 죽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고 하니까 억지로 화제를 돌린 거라고,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잖아.
그 정도 눈치도 없는 년 아니었잖아.
분노에 눈깔이 돌아가는 것 좀 제발 멈춰.
평생 모든 걸 조졌으면서 애쉬와의 마지막 순간조차 조지고 싶지 않으면!
“도와주러 가야 하지 않을까?”
“왜?”
“왜냐니? 몇 마리나 있을 줄 알고,”
도움?
그년이 도움이 필요하긴 할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 백 마리가 있어도 상관없을걸.”
애쉬는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누나가 실비아 칭찬을 하는 게 어색해서.”
“… 하,”
그렇네,
애쉬 앞에서 나는 제 연인을 모욕하는 미친년에 불과하겠구나.
정식으로 성사되지도 않은, 옛 약혼녀.
누나의 절친이자 어린 시절 같이 놀던 소꿉친구 주제에.
그렇지.
이제야 주제 파악이 좀 되는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애쉬에게 말했다.
“뭐… 무력만큼은 인정해야지. 그러니까 애쉬를 맡길 수 있는 거고,”
나는 덜컹거리는 심장이 뱉고 싶어 하는 말과 정반대인 칭찬을 간신히 짜내 읊었다.
거의 억지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모든 법과 사회질서가 무너진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애쉬를 지켜줄 사람으로 실비아 이상의 인간은 없을 테니까.
애쉬는 내 말에 감탄하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모습에 괜히 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면, 나 역시 어지간히 쉬운 여자였다.
“음, 좋네.”
“뭐가?”
“누나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왠지 가족한테 결혼 허락받은 기분이야.”
“… 뭐?”
뭐?
뭐, 시발?
“아니, 실제로도 그렇지. 지금 나에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아,
아하.
아하 시발 그렇구나.
하하하하,
나는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알아차려 버렸다.
가족,
이미 다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하하, 시발 여기 있었네?
그렇구나.
애쉬에겐 내가 이미 가족이었구나.
나는 처음부터, 그의 연인 후보조차 되지 못한 거구나.
너무 친근해서, 너무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기에,
몇 년 만에 만나 서로 성인이 된 모습은 인제야 보게 되었음에도, 조금도 설레지 않을 만큼, 너한테는 내가 이미 가족이었구나.
나는 설렜는데.
“… 애쉬,”
“응,”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애쉬의 눈빛은 저주로 인해 붉게 빛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티 없이 맑았다.
그래서 더욱 잔인했다.
실비아 따위가 그렇게 좋아?
뭐가?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왜 그년만 용사고 나는 끼지도 못해?
왜 그년만이 마리아의 최후를 보고, 나는 보지도 못했어?
왜 그년만 애쉬의 연인이고 나한테는 기회조차 없어?
왜? 왜, 왜왜, 왜, 나만?
“…”
진짜,
기분 나빠.
“내가 왜, 네 가족이야?”
“… 어?”
애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때 흙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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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요 참치캔 님 50코인 감사합니다.
–
그때 괴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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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 입장에서 서술되었던 전편이랑 비교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 타이밍에 등장했던 괴물은 애쉬를 죽일뻔한게 아니라 거의 구해준거나 다름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