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4

       *

        이미 많은 것이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은 끔찍하게 망가진 이 세상.

        ​

        나 앨리스 골드필드 역시도 망가진 채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사실, 나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별로 큰 감흥은 없었다.

        ​

        내 감정을 불 싸지르고 그 대가로 신성력을 토해내는 이 고물 심장.

        ​

        이걸 달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나 뿐이었지만, 그런 나조차 결국 이 기괴한 실험의 희생자일 뿐이구나 하는 건조한 감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

        게다가 심장이 분노로 들끓지 않고 차분히 돌아갈 때, 그 몇 없는 차분한 순간을 틈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내겐 죽음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

        교단은 이 세상과 함께 무너져 몰락했고, 이미 가족은 모두 죽어 여신의 곁으로 돌아간 데가, 이름뿐인 약혼자마저도 새 짝을 찾았으니, 미련이 남을만한 인간관계는 모두 사라졌다.

        ​

        게다가 이 심장을 달고 난 이후에, 나는 타오르는 분노를 신성력과 함께 마구 뿜어내며 살았다.

        ​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손수 붙잡아 그 어떤 종교나 법으로도 허용하지 않을 끔찍한 방법으로 처벌했고, 우리 가문을 짓밟은 그 파렴치한 개자식들은 죄 없는 어린애들까지 모조리 씨를 말려 버렸다.

        ​

        그런데도 단 한 번의 후회나 죄책감도 가져본 적이 없다.

        ​

        악인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 순간엔 늘 상쾌한 성취감만이 남았고, 남의 자식을 굶겨가며 배를 불린 악인의 자녀들을 처단하는 일은 늘 만족스러웠으니까.

        ​

        누군가에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뇌를 달궈대는 이 지옥 불 같은 분노를 식혀주는 그 단비 같은 감정들을 싫어할 수는 없었다.

        ​

        찝찝한 미련도, 남길만한 소중한 것도 없던 내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과업이라면 마왕의 목.

        ​

        그리고 발더 스태프를 죽이는 것뿐이었다.

        ​

        그렇기에 나는 애쉬의 제안에 못이기는 척 함께했다.

        ​

        제대로 된 준비까지 하면서 말이다.

        ​

        설령 이 여정 중에 내 심장이 폭발해 낙오하거나 죽더라도 상관없었다.

        ​

        나는 끝까지 과업을 위해 움직였고, 그런 내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

        … 지금까지는.

        ​

        ​

        ​

        ​

        ​

        ​

        ​

        ​

        ​

        ​

        *

        엉성하고 요란했지만, 제힘으로 두 거인 괴물을 처단한 애쉬의 모습은 내 가슴을 달궈대기 충분했다.

        ​

        성취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무심코 땅바닥을 짚은 손바닥의 화상에 고통스러워하며 찡그린 미간은 어설픈 애교를 더한 퇴폐미가 느껴지기도 했다.

        ​

        애쉬.

        ​

        마리아의 동생.

        ​

        내 후회의 조각이자, 어린 날의 추억.

        ​

        그리고 유일한 나의 미련이자 욕망.

        ​

        빌어먹을 심장 같으니, 

        ​

        행여나 애쉬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건지, 눈치도 없이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심장이 야속했다.

        ​

        그나마 다행인 건 애쉬가 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

        ​

        두꺼운 흉갑에 갇힌 덜커덩 소리를 들을 만큼 애쉬는 예민하지 못했다.

        ​

        때론 눈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전해주기도 하는 귀가 둔하다는 것은 전사나 모험가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었지만, 지금은 애쉬의 예민하지 못한 청력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

        턱 끝을 달구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팍에서부터 넘실거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화상으로 엉망이 된 애쉬의 손을 붙잡았다.

        ​

        ​

        ​

        “아야, 아파. 누나.”

        ​

        ​

        ​

        치료하기 위해 붙잡은 애쉬의 손바닥은 그 끔찍한 화상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툭툭 튀어나온 앙증맞은 뼈들이 귀엽기도 했다.

        ​

        도무지 주체가 되지 않는 열기와 감정을 어떻게든 숨겨보려 괜히 틱틱거리는 내 타박에 멋쩍게 웃으며 변명하는 애쉬의 모습도 역시 미친 듯이 귀여웠다.

        ​

        아. 젠장.

        ​

        이미 몹시 뜨거운 심장이 석탄이라도 들이부은 듯 더욱 크게 불타오른다.

        ​

        죽을 것 같다.

        ​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

        불행 중 다행으로, 마구 작동하는 심장이 신성력을 사방으로 흩뿌려대기에, 애쉬의 화상은 내 손바닥을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자, 이제 안 아프지?”

        ​

        “헤헤, 누나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무리한 거기도 해.”

        ​

        ​

        ​

        쿵 쿵쿵.

        ​

        아, 

        ​

        제발, 이 빌어먹을 심장아.

        ​

        눈치 좀 챙기란 말이야.

        ​

        나는 평소와 다르게 거의 애원하듯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

        물론, 이 고철은 단 한 번도 내 의도대로 움직여 준 적이 없지만 말이다.

        ​

        아아, 애쉬.

        ​

        나를 믿고 무리했다는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하고 유혹적인지,

        ​

        너는 알고나 있는 거니?

        ​

        어릴 땐 철없고 순진한 꼬맹이였으면서,

        ​

        몰래 내 등에 도마뱀붙이를 올려두고 도망치던 그 말괄량이가, 언제 이렇게 여자를 홀리는 몹쓸 남자가 되었는지.

        ​

        ​

        ​

        “…”

        ​

        ​

        ​

        알고있다.

        ​

        나에겐 기회가 없다는 거.

        ​

        물리적인 시간이, 그와 함께할 미래가 내게는 없다는 거.

        ​

        실비아 같은 여자를 고른 게 흠이지만, 그래도 정략결혼이 아닌 직접 고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애쉬에게 혼란을 주지 않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거.

        ​

        나는 전부 알고 있었다.

        ​

        그렇기에, 나는 애쉬에게 다시 한번 설명하려 했다.

        ​

        나를 의지해선 안 돼.

        ​

        내 존재에 익숙해지면 안 돼.

        ​

        ​

        ​

        “애쉬… 나는,”

        ​

        ​

        ​

        무엇보다, 이 심장은 당장이라도 작동을 멈출지 모른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그 순간, 애쉬는 말한다.

        ​

        ​

        ​

        “그, 그러고 보니! 실비아는 어디 있어?”

        ​

        “…”

        ​

        ​

        ​

        아, 알아.

        ​

        씨발, 안다고, 안다니까.

        ​

        그래, 네가 좋아하는 여자는 내가 아니지, 알아. 안다고,

        ​

        그렇게 몇번이고 상기시키지 않아도 됀단 말이야.

        ​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

        더, 더, 더더더더더.

        ​

        너무, 너무 뜨겁게,

        ​

        그 비린내 나는 개 좆만 한 마을에 숨어있던 발더 그 개자식을 만났을 때 보다 더욱더 뜨겁게, 

        ​

        내가 죽는 게 지금, 이 순간인가 싶은 정도로 뜨거웠다.

        ​

        아니, 아니지.

        ​

        나는 바보가 아니다.

        ​

        안다.

        ​

        이건 내가 화가 났다는 뜻이다.

        ​

        아주 화가 난 거지.

        ​

        왜?

        ​

        애쉬의 곁에 있을 여자가 내가 아니라 실비아라는 걸 알아서?

        ​

        아니,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

        내가 옆에 있는데도, 실비아만 찾는 애쉬가 야속해서?

        ​

        그럴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 씨발, 실비아는 애쉬의 연인이니까.

        ​

        애쉬가 사랑하는 건… 개 씨발 실비아니까.

        ​

        나는 억지로 분노를 내리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

        순간적으로 기도와 식도가 익어버렸다가 회복될 만큼 뜨거운 한숨이었다.

        ​

        ​

        ​

        “저 괴물들 무리를 찾아 토벌하러 갔어.”

        ​

        “어? 언제?”

        ​

        “애쉬 네가 공격했던 녀석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때쯤.”

        ​

        “아…”

        ​

        ​

        ​

        뭔데, 그 반응.

        ​

        그렇게 실비아가 좋아?

        ​

        나와 함께하는 이 잠깐을 못 견딜 만큼?

        ​

        아니, 진정해.

        ​

        앨리스, 이 미친년아. 제발.

        ​

        냉정해, 냉정하자

        ​

        애쉬를 봐.

        ​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애쉬를 잘 보라고.

        ​

        멋쩍은 표정과 긴장한 듯 움츠러든 어꺠, 그리고 불안하면서도 슬픈 듯한 눈빛.

        ​

        애쉬는 나를 걱정하는 거야.

        ​

        조금 전, 내가 제 죽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고 하니까 억지로 화제를 돌린 거라고,

        ​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잖아.

        ​

        그 정도 눈치도 없는 년 아니었잖아.

        ​

        분노에 눈깔이 돌아가는 것 좀 제발 멈춰.

        ​

        평생 모든 걸 조졌으면서 애쉬와의 마지막 순간조차 조지고 싶지 않으면!

        ​

        ​

        ​

        “도와주러 가야 하지 않을까?”

        ​

        “왜?”

        ​

        “왜냐니? 몇 마리나 있을 줄 알고,”

        ​

        ​

        ​

        도움?

        ​

        그년이 도움이 필요하긴 할까?

        ​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

        ​

        “아마 백 마리가 있어도 상관없을걸.”

        ​

        ​

        ​

        애쉬는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

        ​

        ​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

        “아니, 누나가 실비아 칭찬을 하는 게 어색해서.”

        ​

        “… 하,”

        ​

        ​

        ​

        그렇네,

        ​

        애쉬 앞에서 나는 제 연인을 모욕하는 미친년에 불과하겠구나.

        ​

        정식으로 성사되지도 않은, 옛 약혼녀.

        ​

        누나의 절친이자 어린 시절 같이 놀던 소꿉친구 주제에.

        ​

        그렇지.

        ​

        이제야 주제 파악이 좀 되는군.

        ​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애쉬에게 말했다.

        ​

        ​

        ​

        “뭐… 무력만큼은 인정해야지. 그러니까 애쉬를 맡길 수 있는 거고,”

        ​

        ​

        ​

        나는 덜컹거리는 심장이 뱉고 싶어 하는 말과 정반대인 칭찬을 간신히 짜내 읊었다.

        ​

        거의 억지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

        모든 법과 사회질서가 무너진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애쉬를 지켜줄 사람으로 실비아 이상의 인간은 없을 테니까.

        ​

        애쉬는 내 말에 감탄하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

        그 모습에 괜히 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면, 나 역시 어지간히 쉬운 여자였다.

        ​

        ​

        ​

        “음, 좋네.”

        ​

        “뭐가?”

        ​

        “누나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왠지 가족한테 결혼 허락받은 기분이야.”

        ​

        “… 뭐?”

        ​

        ​

        ​

        뭐?

        ​

        뭐, 시발?

        ​

        ​

        ​

        “아니, 실제로도 그렇지. 지금 나에겐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

        ​

        ​

        아, 

        ​

        아하.

        ​

        아하 시발 그렇구나.

        ​

        하하하하,

        ​

        나는 깨달았다.

        ​

        공교롭게도 알아차려 버렸다. 

        ​

        가족,

        ​

        이미 다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하하, 시발 여기 있었네?

        ​

        그렇구나.

        ​

        애쉬에겐 내가 이미 가족이었구나.

        ​

        나는 처음부터, 그의 연인 후보조차 되지 못한 거구나.

        ​

        너무 친근해서, 너무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기에,

        ​

        몇 년 만에 만나 서로 성인이 된 모습은 인제야 보게 되었음에도, 조금도 설레지 않을 만큼, 너한테는 내가 이미 가족이었구나.

        ​

        나는 설렜는데.

        ​

        ​

        ​

        “… 애쉬,”

        ​

        “응,”

        ​

        ​

        ​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애쉬의 눈빛은 저주로 인해 붉게 빛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티 없이 맑았다.

        ​

        그래서 더욱 잔인했다.

        ​

        실비아 따위가 그렇게 좋아?

        ​

        뭐가? 

        ​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

        왜 그년만 용사고 나는 끼지도 못해?

        ​

        왜 그년만이 마리아의 최후를 보고, 나는 보지도 못했어?

        ​

        왜 그년만 애쉬의 연인이고 나한테는 기회조차 없어?

        ​

        왜? 왜, 왜왜, 왜, 나만?

        ​

        ​

        ​

        “…”

        ​

        ​

        ​

        진짜,

        ​

        기분 나빠.

        ​

        ​

        ​

        “내가 왜, 네 가족이야?”

        ​

        “… 어?”

        ​

        ​

        ​

        애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때 흙속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돌아와요 참치캔 님 50코인 감사합니다.

    그때 괴물이 나타났다…

    애쉬 입장에서 서술되었던 전편이랑 비교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 타이밍에 등장했던 괴물은 애쉬를 죽일뻔한게 아니라 거의 구해준거나 다름 없죠.

    다음화 보기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