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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4

     

    “고위계 마법 시전에 난항을 겪고 계시다는 말씀이시군요.”

     

    아셀라의 고백을 들은 라스는 원인이 뭔지 바로 눈치챘다.

     

    그녀의 경이로운 마법에 대한 재능.

    스승인 현자 시모어에 버금갈 수도 있었던 가능성은 온전히 그녀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었다.

     

    ‘디버프인 저주를 제거하며 재능도 같이 손상된 게 분명해.’

     

    카밀라의 복제가 아셀라에게 두 번째 재능을 개화했다.

    흑마술이 기반이었기에, 라스로서는 추측만 가능했다.

     

    ‘내가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야.’

     

    재능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라스도 두 재능의 대가로 체력 감소의 디버프를 받았다. 시모어는 감각 마비, 네리아와 앰브로시아는 성장저해, 황제는 평생 쉴 수 없는 굴레에 빠져 단명하게 됐다.

     

    아셀라에게는 마법의 재능만 둘이다. 첫 재능의 대가는 어쩌면 두 번째와 함께 지불할 필연적인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법을 아예 못 쓰게 되신 건 아니죠?”

     

    “응, 5위계부터 시전이 안 돼.”

     

    ‘재능이 완전히 삭제되진 않았고.’

     

    라스의 입장에서는 현상유지가 마음 편하긴 했다.

    아셀라가 강력한 마법으로 세상을 망치는 광경을 수도 없이 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배드엔딩은 아셀라를 고치며 모두 삭제했다.

     

     

    [삭제된 엔딩은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태창이 아셀라가 마법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일은 없다고 확고하게 말해준다.

     

    라스는 조금 고민에 빠졌다.

     

    “황녀님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싶으신지요.”

     

    “응.”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 일평생 마법사의 목표는 마법의 위계를 올리는 것이라고요.”

     

    “맞아. 나는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이기도 해. 내 마법이 여기서 멈춰버리면…”

     

    아셀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황제라는 목표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태어난 태생과 환경에 의해 주어진, 대의적인 목표였다.

     

    흘러오니 어느덧 그녀는 당당히도 한 궁의 주인이자 승계권자가 되었다.

    충성을 바치는 신하, 지지를 보내는 귀족과 제국민 어느 하나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

     

    위대한 마법사는 그녀가 온전히 혼자서 품은 목표.

    이를 놓치고 좌절해버리면 다른 쪽도 무너지지 않을까, 아셀라는 그 점이 불안했다.

     

    이전이라면 오직 그 사고에 집중해 이기적인 명령을 내렸을 아셀라였으나.

     

    ‘…라스의 목표는 뭘까?’

     

    지금은 자연스레 라스를 향해 사고가 흘러버린다. 문득 그녀는 그게 궁금해졌다.

     

    “라스, 넌 뭘 하고 싶어?”

     

    “갑자기 저요?”

     

    “응. 내가 황제가 되면 어의가 되어서 내의원의 수석에 앉을 생각이니?”

     

    아셀라는 지금껏 그 그림을 어렴풋이 마음속에 그려오고 있었다.

    당연하게.

    하지만 라스와 말로 공유하지 않았기도 했었다.

     

    “하하.”

     

    라스는 살짝 곤란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그에겐 확실한 비전이 있었다.

     

    ‘당장은 배드엔딩을 지우고.’

     

    황실에서 나서서 굿엔딩에 도달한 후.

    후작가에서 개인병원을 하며 편하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한다.

     

    진료는 하루 세 시간 정도만 보고 소파에 누워 사탕이나 먹으며 놀고 싶다. 내의원에서 쌓은 유명세 덕에 제자들만 굴려도 병원은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네리아가 알아서 제약공장을 돌려 창고에 금화를 쌓아온다. 저택에는 호화로운 수영장과 스키장도 지었다. 날로 먹는 풍족한 삶이다.

     

    그를 위해선 일단은 세상이 멀쩡해야 한다. 마왕군에게 멸망해서 자신도 죽으면 당연히 이도 저도 안 된다.

     

    “뭐, 세계평화일까요.”

     

    엔딩이니 탈주니 직접적인 용어를 쓸 수 없기에 라스는 함축해서 비유했다.

     

    “…나 참.”

     

    반면 아셀라는 그가 얼마나 원대한 이상론과 현실과의 타협 끝에 그 단어를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용사를 위해 왜 그렇게 열심이었는지, 여태 내의원에서 왜 그렇게 사람들을 고쳐왔는지 제멋대로 이해했다.

     

    황녀인 나조차 그런 허황된 이상을 실현하려 진심을 다할 일은 없거늘.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그릇을 가진 남자다. 아셀라는 그에게 반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

     

    “예.”

     

    “한 가지 약조하겠어.”

     

    아셀라가 또각, 한 걸음 라스에게 다가서며 눈매에 힘을 주었다.

     

    “내가 재능을 되찾으면 마법을 포함해서 가진 모든 능력으로, 네 이상을 실현하는 데 협조해 줄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야.”

     

    라스로서는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 아셀라가 세계평화를 위하겠다니.

    호랑이가 채식주의운동에 힘쓰겠다는 것만큼이나 순간 위화감이 심했지만.

     

    ‘그래서 리셰를 그렇게 경계했나.’

     

    라스는 아셀라가 여태 질투 때문에 리셰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질투의 화신] 엔딩은 아직도 남아있기도 했고.

     

    하지만 샤를이 명백히 배드엔딩 확률을 높이는 요소라고 판명된 이상, 아셀라의 통찰력은 의외로 정확했을지도 몰랐다.

     

    아셀라도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승계전을 위한 명분이 아니라 진짜 평화를 바란다.

     

    ‘아셀라가 배드엔딩을 지우는데 협력해준다면 그것보다 든든할 순 없어.’

     

    라스에게 있어 걸림돌이 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미래의 황제 아셀라가 정말 백 퍼센트 저주 때문에 미친 인물인가, 하는 점이야.’

     

    실제로 아셀라의 행동 때문에 그녀와 연관이 없던 배드엔딩 확률도 상승한 걸 조금 전에 본 참이었다.

     

    물론 지금의 아셀라는 세상을 멸망시킬 동기도 없고, 영혼을 망가트릴 저주도 없다.

     

    하지만 혹시나 아셀라가 자신이 아는 황제가 되어버려서 악의를 가지고 일을 망치려 든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아셀라를 믿고 싶다.

     

    라스는 가장 먼저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지금은 절절히 느껴졌기에.

     

    “황녀님.”

     

    라스가 살포시 아셀라의 손을 받쳐 들어 잡았다.

     

    “황녀님의 혜안과 재원을 빌려주신다면 틀림없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라스는 아셀라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황녀님께서도 진심으로 대륙의 평화를 바라십니까?”

     

    “당연하잖아.”

     

    아셀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금일부터 황녀님의 마법 피로 현상을 복구하겠습니다.”

     

    “…응.”

     

    아셀라는 라스의 확답을 받으니 눈 녹듯 마음속 불안이 사라졌다.

     

    “아, 기세 좋게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법에 조예가 거의 없어요. 아시죠?”

     

    “그래도 방법을 찾아낼 거지?”

     

    “사실 짐작 가는 안은 있습니다.”

     

    아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현상을 해결할 확실한 사람이 대륙에 한 분 계시죠.”

     

    “…스승님.”

     

    아셀라도 깨달았다. 시모어라면 아셀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디 계신지 아무도 모르잖아. 본인의 마법을 연구하러 간다 하셨어. 정령 마법이니 인간계에 없을 수도 있고.”

     

    “그게, 사실 어디 계신지 알아요.”

     

    “뭐어? 어떻게?”

     

    라스가 시모어의 행방을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자의 무덤. 사천왕 리치와 승부를 낸 배경이었으니까.’

     

    시모어는 라스의 미래에서 퇴장하여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단순히 수명이 다했다는 기록이었어. 마지막에 살던 장소에 그대로 묻혔지. 우리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론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걸 알고 여생을 보내러 간 거야.’

     

    즉 미래에 무덤이 있던 장소에서 지금 시모어가 살고 있을 확률은 아주 높았다.

     

    “현자님께 가면 해결책을 알려주시리라 생각하는데, 어떠신지요.”

     

    “위치는?”

     

    “대륙 남부, 대수해 중앙 입구 근처입니다.”

     

    “멀구나. 제국 남부 게이트를 써도 여정에 한 달은 걸리겠어.”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발하자.”

     

    “바로요? 일정은 어쩌시고요.”

     

    “조정하면 어떻게든 돼. 너도 준비해.”

     

    “저도 말이죠. 흠, 용사가 걸리는데요.”

     

    “라스, 용사가 성검과 공명하고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설명 드리긴 복잡합니다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격 통합에 의해 사고방식이 변화해서…”

     

    “아냐, 너야.”

     

    아셀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용사는 너랑 있으면 망가져.”

     

    “흠.”

     

    라스도 이번엔 아셀라의 의견에 동의했다.

     

    본래 리셰는 이상적인 용사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 그녀는 검술 실력도 좋아지고 있고, 자신감도 차오르며 금방 리더십도 보였다.

     

    오히려 샤를이 있어서 성장이 빨랐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경험이 있으니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도 많았을 터.

     

    문제가 발생한 건 라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스스로 다쳤던 점.

     

    그 일만 없었다면 다른 시간대보다 빨리 제국에 발견된 만큼 더 강한 용사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용사는 너랑 떨어져야 해.”

     

    아셀라의 의견이 통찰력에서 나온 최선의 판단일까, 아니면 질투에 의해 흐려진 억지일까.

     

    라스가 스킬을 발동했다.

     

    ‘카운슬링.’

     

     

    ―――――――――――

    대상 :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스트레스  안정   ■■□□□□□□ 긴장

    자율신경 부교감 ■■■■■□□□ 교감

    피 로 도   건강   ■□□□□□□□ 피로

     

    A : 대신 황녀님과 붙을까요 (교감 +1)

    B : 안아준다 (스트레스 –2)

    ―――――――――――

     

     

    낮은 스트레스 수치를 보고 라스가 결론을 내렸다.

     

    “냉정하게 내리신 판단 같군요.”

     

    “당연하지.”

     

    “아까 굉장히 화내시지 않으셨어요?”

     

    “아니 뭐, 지금은 너랑 있으니까…”

     

    아셀라가 말을 흐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라스는 그런 아셀라를 보고 피식 웃고는 능글거리며 그녀의 얼굴 아래로 고개를 슥 들이밀었다.

     

    “제가 그렇게 좋아요?”

     

    “시끄러.”

     

    “1에서 10으로 나타내면요.”

     

    “그런 소리 할 때 진짜 싫어.”

     

    아셀라가 찰싹, 라스의 어깨를 때렸다.

     

    “알겠습니다. 저도 용사 치료는 플랜만 짜고 대면은 팀원들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이 드네요. 현자님을 찾으러 궁을 당분간 떠나면 좋은 데이터도 쌓이겠고요.”

     

    라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약조하신 거 잊지 마세요.”

     

    “알았어. 그리고…”

     

    아셀라가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끝에 그녀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라스가 시선을 보내니 벽에 한 장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백미호군요. 환상수로 분류된 마물이네요. 백 개의 꼬리 중 하나만 있어도 아주 신비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죠. 그런데 왜요?”

     

    “…아냐,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가는 길에 백미호가 나온다고요?”

     

    “잊어버려.”

     

    “왜요, 뭔데요.”

     

    아셀라는 날파리처럼 집요하게 달라붙는 라스를 떼어내려 손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비공개 독자님 400코인 후원! 큰 후원 감사해요…! 건강 걱정은 항상 도움이 되네요! 사실 지난 주말에도 연속 28시간?쯤 일을 하다 기절했습니다! 최근엔 계속 이런 스케줄이라 상당하네요. 완결까지 쭉쭉 달려보고 싶습니다. 아직 보여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꽤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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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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