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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4

       노을이 지고 달이 떠올랐다.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은 또 한 번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프란체와 못다 한 얘기를 마치기 위해 분위기 좋은 정원으로 나와 있다.

       

       마법의 힘으로 계절과 상관없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새빨간 장미들. 핀 지 얼마 되지 않은 장미들이 꽃밭으로 이어져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진.”

       

       프란체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

       “…저도입니다.”

       “그리고 너한테 엄청 화났어.”

       “알고 있습니다.”

       “원망도 많이 했어. 괴로웠다고.”

       “…면목이 없습니다.”

       

       애절한 프란체의 눈빛. 나는 차갑게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냉정함이라는 명목으로 내 심장을 얼렸다.

       

       “나를 두고 떠난 네가 너무 원망스러웠어. 나 때문에 네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서운했어.”

       

       그간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모든 것을 꺼내려는 듯, 프란체의 말이 빨라졌다.

       

       “그래도 괜찮아.”

       

       일렁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곳엔 더 이상 내가 비춰보이지 않았다.

       

       “이제라도 볼 수 있으니까.”

       

       프란체는 그간의 설움과 슬픔을 이겨내고 애써 웃음꽃을 지었다. 그녀는 막 꺾은 장미 꽃잎을 흩뿌린 듯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돌아오면 치료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어. 카자르에게도 말해뒀고. 그러니까……”

       

       말을 이어가는 프란체. 들리지 않았다. 닿지 않았다. 차마 들을 수 없어 나도 모르게 차단한 걸지도 모르겠다.

       

       더 늦기 전에 이제 말해야겠지.

       

       “공작님.”

       

       나는 프란체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응?”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갸우뚱한 프란체.

       

       “긴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니?”

       “저는 곧 사라집니다.”

       “…뭐?”

       

       내가 또 도망친다는 소리로 들린 걸까? 프란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괜한 오해를 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라드리엔과 계약을 했습니다. 원래는 죽어야만 했던 공작님을 살리는 대신에 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요. 저는 곧 사라질 겁니다. 마치 이 세계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것이 보였다.

       

       “공작님께서는 지금껏 저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이 통째로 날아갈 겁니다.”

       

       내가 사라져도 슬퍼할 사람은 없다.

       

       메마른 사막에서 유일하게 핀 꽃과도 같은 외로운 죽음.

       

       이 어찌나 안타까우면서도 후련한 죽음인가.

       

       그래도 아쉽거나 후회하는 마음은 없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모든 게 끝날 겁니다. 공작님께선 저 때문에 마음고생 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프란체가 맞이해야 했던 죽음이라는 결말을 바꿨고, 그녀를 지탱해줄 모두가 생겼다. 힘도 생겼다. 이전 생과 비교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가는 진 바렌베르크라는 존재.

       

       이거로 된 거다.

       

       “…웃기지 마.”

       

       프란체의 눈 밑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야 간신히 다시 만났는데 바로 사라지겠다고? 그리고 기억에서 잊히고 처음부터 없던 사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갈피를 잃어 떨리는, 혼란에 가득 찬 목소리.

       

       “저라는 존재가 사라지며 그 자리를 대체할 무언가가 생길 겁니다. 지금 이뤄진 모든 것들은 공작님의 능력만으로 세워진 것으로 바뀌겠죠.”

       

       나는 그리고, 하며 말을 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아…….”

       

       프란체의 표정이 무너졌다.

       

       “나를 네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너는 무책임하게 사라지겠다는 거야?”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 프란체는 내게 다가왔다.

       

       “네가 처음부터 없던 존재가 되어 기억에서 사라지면 문제없다는 거야? 우리가 함께한 삶은, 시간은 거짓이었던 거야?”

       

       그녀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를 악문 채, 덜덜 떨면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틈마다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영혼 결속이 있어. 네가 올 때를 대비해서 완성시켜 뒀는데, 그거라면 괜찮을 거야. 지금이라면 거절하지 않겠지? 내 마음 알잖아. 응?”

       

       목소리에서 간절함과 절실함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공작님. 죄송하지만, 이미 영혼 결속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제 혼은 사라졌고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이동했다. 빛은 굴절도, 가려짐도 없이 그대로 나를 관통했다.

       

       “보세요. 제겐 그림자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요. 그저 집념으로 이루어진 망령에 불과합니다.”

       

       프란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눈으로 내 발밑을 바라봤다.

       

       “이게, 이게 대체…….”

       

       이어서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지만.

       

       “…….”

       

       잡히지 않았다.

       

       “안 돼. 웃기지 마.”

       

       프란체는 고개를 저으며 뿔뿔이 흩어지는 빛 방울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녀만의 부정이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어떻게 만났는데? 기억에서 사라지면 다야?”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뿐.

       

       “제발, 제발 거짓말하지 마. 나를 두고 가지 말아줘…….”

       

       흩어지고, 또 흩어졌다.

       

       “공작님.”

       

       나는 싱긋 웃으며 프란체를 불렀다.

       

       “저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공작님께서 이리 건강하시니까요.”

       

       동기화가 진행되며 흘러들어온 기억 속의 나는 피를 토하듯 절규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지르는 나의 비명은 하늘을 울렸고 땅을 때렸으며 세상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 비명을 지를 필요도 없고 피를 토할 일도 없으며 절규할 일도 없다.

       

       그래, 이거면 된 거다.

       

       “그런, 그런 게 어딨어…….”

       

       프란체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애써 희망을 찾아 힘겹게 어둠을 들어 올리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 침전하고 있었다.

       

       “프란체.”

       “…….”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는 프란체를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비록 국가가 멸망하고 노예로 잡혀 좋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힘들고 절망적인 와중에 주인으로 당신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오직 진실만을 전했다.

       

       “당신의 삶을 알고 그걸 바꿀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 저이기에 좋았습니다.”

       

       내 모든 건 프란체와 함께 흐르고 멈췄다.

       

       “프란체와 저의 인연은 끝이 아닐 겁니다. 제 존재가 사라져도 언젠가,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은 저였고, 제 모든 순간이 당신이었으니까.”

       

       손을 내밀었다. 프란체도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닿을 수 없었다.

       

       내가 흐릿해지면서, 사라지면서 우리의 인연이 끝이 나고 있다.

       

       영원한 이별을 알리고 있었다.

       

       “진 바렌베르크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되더라도, 저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프란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달빛에 비친 눈물이 반짝였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프란체.”

       

       처음으로 전했다.

       

       2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처음으로 말했다.

       

       내 가슴 속에 있는 붉은 심장의 온도를 그녀에게 바쳤다.

       

       “사랑하는데 왜…?”

       

       프란체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왜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거냐고!!”

       

       그녀는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한없이 울었다.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부정했다.

       

       “…방법은 없는 거니?”

       “없습니다.”

       “정말 이렇게 끝이라고…?”

       

       나는 눈을 감는 거로 대신 대답했다.

       

       “…그렇구나.”

       

       때가 되었다.

       

       “시간이 된 거 같습니다.”

       

       손끝과 발끝부터 시작해 몸이 점점 흩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싱긋 웃어보였다.

       

       “제가 없어도 공작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이 순간 느껴지는 아픔은 찰나에 불과하니까요.”

       

       프란체는 붉게 부르튼 눈을 질끈 감고,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울먹이며 말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정원의 풀밭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나는 네가 전부란 말이야!”

       

       프란체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울먹였다.

       

       “제발 떠나지 말아줘…….”

         

       두렵다.

       

       이별의 순간이 두렵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도 떠나고 싶지 않다.

       

       좀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내며 함께하고 싶다. 당장이라도 저 정원의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을 맞잡고 싶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바친 내게 그러한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

       

       나는 미어터질 듯한 가슴을 옥죄이며 감정을 얼렸다.

       

       “제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잃어도 이 기억만은 꼭 간직하여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 이상으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끝이 다가왔다.

       

       “명령대로 평생 내 곁에 있으란 말이야! 제발 가지 말아줘…!”

       

       달빛이 비치는 밤하늘 아래 프란체가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내게 닿지 않는 것처럼 애원도 닿지 않았다.

       

       눈을 감고 운명을 받아들이려던 순간.

       

       “정말 이대로 포기하실 건가요?”

       

       소미레가 뒤에서 걸어왔다.

       

       “수천 년을 버티며 운명까지 바꾸신 분이 너무 쉽게 포기하시네요.”

       

       나라고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줄 아나. 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잖나.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방법이 있어요.”

       “뭐?”

       

       그 말에 프란체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미레의 팔을 붙잡았다.

       

       “그, 그게 정말이야? 어떻게 하면 되는데? 빨리, 시간이 없어!”

       

       소미레는 슬픔에 잠긴 프란체를 한 번 바라보곤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성녀가 여신님의 대리인인 건 아시겠지요?”

       

       나는 그렇다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성녀가 가진 힘의 원천도 여신님인 것도 알고 계실 테죠.”

       

       눈이 얕게 뜨였다. 의심이 먼저 들었다.

       

       “성녀의 힘을 대가로 강림을 사용할 거예요. 여신님이라면 방법이 있으시겠죠.”

       

       그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림? 그거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백아연은 왜 강림을 사용하지 않은 거지? 그랬다면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소미레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꺾었다.

       

       “그녀는 그저 몸을 빌렸을 뿐인 이 세계의 불순물. 진짜 주인이 아니니까요. 여신님과 직접 이어진 저라면 가능해요.”

       

       대신, 하면서 소미레는 말을 이었다.

       

       “이걸 사용하면 저는 성녀의 힘을 잃어요. 이전처럼 기적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하고요. 신성 마법이라 해봤자 가벼운 치료가 전부겠죠. 일종의 대가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러고는 프란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럼에도 염원을 이뤄드릴게요. 어차피 남은 것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저를 데카르트 공작저에 머물게 해주세요. 정확히는 저를 숨겨주고 남은 생을 책임지는 거네요.”

       

       프란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줄 테니 제발 부탁해…….”

       

       간절한 애원에 소미레는 좋아요, 하곤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여신님, 이건 정해진 운명을 바꾼 어느 한 초월자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그 순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력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걸 불사 질렀던 초월자는 그녀를 구해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작은 황금빛 마력은 모이고 모여서 내 전신을 감싸 안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둘은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끝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와 그는 염원했습니다.”

       

       점점 흐릿해지며 존재가 사라지던 내게 따뜻한 온기가 깃들었다.

       

       “제발 우리가 헤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형태를 잃었던 신체가, 손끝이, 발끝이 돌아오고 있다.

       

       “두 사람의 염원은 기적을 만들어내기엔 충분했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마력이 하늘에서 별가루처럼 떨어졌다. 땅에서 올라와 반딧불이처럼 돌아다녔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이 두 사람이 영원을 맹세할 수 있게 도와주시길.”

       

       소미레의 기도문이 끝나자 하늘에서 황금이 드리웠다.

       

       기적을 대가로 한, 새로운 기적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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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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