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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4

    오예린 연구원이 지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부소장실에 마련된 창문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태양은 지고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키득키득. 

    어깨 위로 고개를 돌려보니, 새싹이가 어깨 위에 앉아 즐거운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세희 연구소장을 닦달해서 구매한 영체 카메라가 도착하면 이 새싹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겠지.

    잠이 든 채 영체로 돌아다니는 새싹이일지, 아니면 환각 같은 정신 오염일지 말이다.

    사실 오늘이 오기 전까지는 10중 8, 9는 환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게, 새싹이는 나도 모르는 정보를 넌지시 전달해 준 것이다.

    처음에는 웃음소리에 섞여서 들려온 희미한 소리 같았다.

    하지만 오예린 연구원의 보고 누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점점 새싹이의 말이 분명해지더니, 어떤 감정이나 의지와 비슷한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언어와는 확연하게 다른 소통 방법이었다.

    언어처럼 분명하지 않고 감정이 섞이고 뒤죽박죽인 전달 방법이었지만, 확실히 소통과 정보 전달의 수단이었다.

    새싹이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면 이런 느낌이었다.

    ‘아, 거짓말하고 있어!’

    즐거운 감정과 함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

    새싹이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 것 같았다.

    결국 오예린 연구원이 숨긴 ‘설탕 플라밍고’에 대해서 살짝 떠보니,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나는 새싹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말랑말랑한 찹쌀떡 같은 새싹이의 볼때기를 주물렀다.

    히히.

    새싹이는 간지러운 것처럼 웃으면서 내 손가락을 붙잡았다.

    얼핏 보기에는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새로 생겨난 감각에는 ‘더 해줘!’라고 느껴졌다.

    주물주물.

    나는 볼때기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너희들은 이런 식으로 소통하는구나? 엉망진창이지만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소통 방법.”

    오브젝트들의 소통 방법을 조금 깨달을 수 있었다.

    유명한 가설 중 하나인, <오브젝트들은 언어를 모르고, 생각을 읽는다.>.

    그 가설은 꽤 진실에 가까웠다.

    생각보다는 감정을 느끼는 쪽에 가까웠지만, 얼핏 보기엔 생각을 읽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인간도 이런 식으로 감정을 나누며 소통했다면 많은 오해가 사라졌을 텐데….

    그나저나 이런 식의 소통 방식이면 황금 사신이들이 TV를 잘 안 보는 것도 이해가 되네. 

    언어를 모르는 황금 사신이들은 TV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겠지.

    그럼, 회색 사신이는 어떻게 TV를 보는 거지?

    때찌때찌.

    회색 사신이에게 생각이 미치는 순간, 새싹이가 작은 손바닥으로 내 뺨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새싹이는 마치 비밀로 하라는 듯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새싹이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의지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유령화 상태로 푹 꺼져버린 강남구 트리니티 연구소 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주변에는 어느새 솜사탕으로 변해버린 구름 고기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 어디에나 떠 있는 구름 고기들은 훌륭한 정보원들이었는데, 이번 사태의 원흉을 알려준 고마운 고기들이었다.

    ‘길 안내, 고마워.’

    나는 솜사탕 고기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맛있어 보이는 옆구리를 살짝 뜯어먹었다.

    ‘!’

    길 안내 고맙다면서 왜 뜯어먹냐며 항의하는 솜사탕 고기들.

    그거야 당연히 맛있어 보이니까 뜯어먹은 건데, 솜사탕 고기들은 생선이라 그런지 머리가 별로 안 좋구나?

    히히 웃으면서 그렇게 의지를 전달하자, 솜사탕 고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가 버렸다.

    트리니티 제1 연구소는 흔적도 남지 않고 부서져 버렸다.

    당연히 없어져야 할 연구소였으니, 당연한 결말이었다.

    트리니티 연구소에서는 검은 점액을 ‘진화액’이라고 부르던가? 

    내 생각에는 그 ‘진화액’이라는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물질인데, 왜 이렇게 다들 사용하고 싶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냄새도 지독하고, 악의로 가득 찬 액체에서 정말 인류의 구원과 진화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정도로 박살을 내면, ‘진화액은 인류의 희망!’ 타령하는 사람들은 없어지겠지.

    나는 우르르 들어오는 경찰차와 협회차를 바라보며 천천히 관악구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진화액’을 모두 없애버릴 차례였다.

    ***

    오늘이야말로 사신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출근한 연구소는 어수선해 보였다.

    이유는 뉴스 속보.

    아침부터 TV에서 보내준 뉴스 속보에서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남구에 위치했던 트리니티 제1 연구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여기는 강남구에 위치한 트리니티 제1 연구소입니다.]

    [보시다시피, 연구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요.]

    [정말 엄청난 규모의 싱크홀입니다.]

    [송파구 싱크홀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지금 발생한 싱크홀의 규모도 상식 밖의 크기입니다.]

    나는 저 싱크홀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아! 사신이가 한 거다!’

    즉, 다른 사람도 충분히 사신이를 떠올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우리 연구소는 격리 중인 특급 오브젝트가 탈출했는데, 아무것도 안 한 폐급 연구소가 되어버리겠지.

    하지만 이런 긴급한 사태에 세희 언니는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설마 뭔가 수를 써둔 건가? 

    “세희 언니. 지금 괜찮은 거 맞아요?”

    세희 언니에게 걱정을 말하자, 세희 언니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답했다.

    “문제없어!”

    자세한 건 사신이의 격리실로 가보면 안다는 말에, 나는 서둘러서 사신이의 격리실로 향했다.

    설마 사신이가 벌써 돌아온 건가? 

    하지만 내가 사신이의 격리실에서 발견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격리실에는 회색 + 사신이가 있기는 했다.

    뚜방뚜방.

    회색으로 꼼꼼히 칠해진 검은 사신이가 격리실 내부를 뚜방뚜방 걸어 다니고 있었다.

    1m 남짓한 신장에 회색 피부, 그리고 똑 닮은 생김새.

    확실히 날카로운 상어 이빨을 제외하면 회색 사신이랑 굉장히 흡사하긴 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 맞나?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어딘가에 있을 사신이에게 기도했다.

    ‘사신아 가짜 회색 사신이 걸리기 전에 빨리 돌아와 줘!’

    ***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검은 요원과 금발 소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구해줘서 고마워!”

    금발 소녀는 바닥에 앉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검은 요원을 지켜준 붉은 사신이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붉은 사신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발 소녀는 붉은 사신의 표정을 보고 ‘쓰다듬는 거 싫어하나?’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치우려고 했지만.

    탁.

    붉은 사신은 그 손가락을 낚아채더니, 다시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꾹 눌렀다.

    금발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귀여운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붉은 사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황금 사신들과 검은 사신들은 금발 소녀의 주변으로 자기도 쓰다듬어 달라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다들 도와줘서 고마워!”

    금발 소녀는 ‘고마워.’를 연발하며 미니 사신들에게 하나하나 고마움을 표했다.

    검은 요원은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처음 소녀를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협회장의 손녀이자, 더없이 행복하고 티 없이 밝을 것만 같았던 소녀.

    하지만 어딘지 겉도는 것처럼 보이던 소녀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다가섰던 것이 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풍족했지만 언제나 불안해 보였던 소녀는 모든 걸 잃은 지금에서야 그 불안을 모두 떨쳐낸 것으로 보였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미니 사신들에게 둘러싸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사라진 안개 벽 너머로 아침 햇살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검은 요원은 급히 커다란 양산을 펼쳐서 금발 소녀를 가렸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양산을 치워버렸다.

    “괜찮아요. 아저씨.”

    히히, 왠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소녀는 양손을 펼치고 태양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소녀의 몸은 불에 타지도 재가 되지도 않았다.

    눈을 감고 태양 빛을 만끽하던 소녀는 눈을 뜨고 정말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의 태양은 정말 아름답네요.”

    푸른 나무로 가득한 지평선 위로 떠오른 태양 빛이 소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은 한층 더 아름답게 빛이 났다.

    검은 요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아가씨.”

    검은 요원에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행복한 표정으로 햇살을 만끽하던 소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 검은 요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세희 연구소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소녀는 새로 생긴 ‘엄마’를 만나봐야할 것 같다고 작게 덧붙이며 말했다.

    ***

    많은 미니 사신이 정원 밖으로 나가버려서 한산한 미니 사신 정원.

    한적한 그곳에서 뚜방뚜방 걸어 다니고 있던 한 황금 사신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구름처럼 새하얀 털뭉치였다.

    은은한 미니 정원의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리는 그것은 황금 사신이 그 안에 푹 빠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한 털뭉치였다.

    그것은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며 황금 사신의 호기심을 마구마구 잡아끌고 있었다.

    ‘막내?’

    황금 사신은 왠지 막내 같다는 의문을 품고 천천히 다가가서 털뭉치를 집어 들었다.

    황금 사신은 마치 선물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복슬복슬한 털뭉치를 뒤적였다.

    부드럽고 따스한 털뭉치를 뒤적거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 안에서 주황색의 미니 사신 얼굴이 나타났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주황 사신이었다.

    ‘막내!’

    황금 사신은 새로운 막내의 등장에 양손을 번쩍 들고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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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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