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무림맹에 온 겁니다.”
“소설책으로 써서 팔면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이야기네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조난당한 색목인 남성과 해남검문 장문인의 막내 제자의 만남! 만남에서 이어지는 인연에서 시작되는 연애담이라니. 뭇 소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였답니다.”
그 정돈가?
나는 예상보다 좋아하는 서련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면전에서 칭찬을 계속 들으니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는데.
딱히 가식적인 반응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게 모습이 죄다 연기면 이 여자는 경극 배우로 대성할 재목이었다.
심지어 마스터의 눈깔은 표정의 미세한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기에 더더욱.
“저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건 힘들겠죠.”
“이미 반쯤 포기한 거 아닙니까?”
내 말에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자유냐 사랑이냐.
양립은 어렵고 한 가지만 골라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둘 다 놓쳐버릴 수 있으니.
일단은 전자부터 고르는 게 그녀에게 있어선 현명한 선택일 터.
사랑…은 듣기는 좋아도 그거 찾는 게 얼마나 힘든데.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저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는 건 하늘에 별 따기니까. 심지어 시대가 시대라 더…
자유조차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세상이 중원이니까. 결국 무림인도 중원에서 사는 사람이니 중원의 법도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나마 고수가 되면 상황이 좀 낫지만…서련은 경지 자체는 일류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것도 대단한 거지만, 혜령이가 절정이고 목경이는…반쪽이지만 초절정에 발을 들였으니까.
머지않아 완전히 초절정으로 넘어오겠지.
무리하게 싸움을 벌인 여파로 내상을 입은 탓에 경지를 제대로 넘어가지 못한 것뿐이니까.
“위 대협. 그럼 단 소저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건가요? 그분하고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가 있었나요?”
“목경…소저와는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어머, 하지만…아, 그렇군요. 그런 상황이었군요.”
뭘 혼자 납득한 걸까. 나는 대충 상황이 이해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들끼리 통하는 뭔가로 눈치챈 거겠지.
“위 대협은 죄 많은 분이시네요.”
“제 평생 그런 소리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전쟁터에서 구르다가 비명횡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중원에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답니다. 위 대협은 그 말이 잘 어울리는 분 같아요.”
…너무 잘 어울려서 슬프네.
지옥 같은 전장에서 그나마 천국 같은 중원으로 오는 데 성공했으니. 어쩌다 보니 연인도 생겼고.
마교놈들만 어떻게 잘 해결하면 이제 남은 인생은 편하게 보낼 수 있을 터였다.
누가 나를 귀찮게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위 대협. 슬슬 다시 나가볼까요?”
슬슬 나갈 때가 됐나. 여기에 반 시진 정도는 있었으니. 나는 서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데이트…
데이트가 중원 말로는 뭘까.
어쨌든 값을 지불한 나는 서련과 함께 찻집을 나섰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내 옆에 나란히 선 서련은 기분이 들어올 때보다 좋아 보였다.
“이제 어딜 갈까요?”
“저는 이곳 지리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은 아닙니다.”
“임 소저와 돌아다니지 않으셨나요?”
“그렇긴 하지만, 무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 외에는 돌아다닌 곳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럼 제가 좋아하는 장소를 알려드릴게요.”
좋아하는 장소라…
어디로 날 데려갈 생각일까. 나는 앞서 걷기 시작한 서련을 따라 무한의 번잡한 길거리를 거닐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련은 무한의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작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이곳이에요.”
“여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 중 하나랍니다.”
서점인가.
나는 온갖 요란한 냄새 속에 묻혀있지만, 조금씩 빳빳한 종이의 냄새가 풍겨져 나오는 서점을 바라보았다. 서점 안쪽에는 문사 느낌이 나는 복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조용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버지 눈치를 보지 않고 올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곳이에요.”
눈치를 보지 않고 볼 수 있는 곳이라.
막내딸이라 그런 건지, 그냥 금지옥엽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집안에서 서련은 꽤 아껴지는 모양이었다. 그 바쁜 맹주가 시간까지 내서 딸이 어딜 가는지 파악하고 있단 소리가 아닌가.
딸에게 관심 없는 아버지였다면 어딜 가든지 크게 신경은 쓰지 않았겠지.
아, 이건 너무 21세기 감성인가?
“위 대협은 책을 좋아하시나요?”
“근 몇 년 건 읽어본 서적은 무공비급밖에 없을 겁니다.”
“어머, 책에 재미를 붙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랍니다.”
“한 권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들어와 책장을 바라보았다. 21세기의 서점이 아닌, 중세 중국의 서점.
좀처럼 보기 힘든 옛날 시대의 서책들이 모여있는 모습은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오랜만이오 서련 소저. 그간 잘 지내셨소?”
“네. 잘 지냈답니다. 관 대인님.”
“허허, 대인은 무슨. 그냥 영감이라고 부르게.”
“아직 영감이라 불리기엔 젊으신걸요.”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더니, 서련이 책 이야기를 꺼내자 책을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오오, 그대가 요즘 세간에서 유명하다는 사자검협이라니, 길 건너 점쟁이가 오늘은 운수가 좋을 거라고 하더니 그게 대협을 만난다는 이야기였나 보오.”
“과찬입니다.”
“허허, 색목인인 것도 놀랍지만, 정말로 한어가 유창하시구려.”
“중원에서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중원에 오기 전엔 군인이라는 풍문을 들었소만, 혹 귀한 집의 자제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그거 인연이 닿아 공부를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뒷짐을 진 채로 책장을 바라보더니, 이내 책 한 권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독서에 입문하는 데에는 관심이 있을 법한 책이 좋겠지요. 이건 호심공(護心功)이라는 심법이 담긴 서적입니다.”
“호심공이라…”
“그리 뛰어난 심법은 아니지만, 양생공으로서 꽤 유명한 심법이지요.
심법에 대한 이해가 쉽게 쓰여 있어 몇몇 세가에서는 천자문과 함께 호심공으로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원 무공 입문에 좋은 서적이라…좋은 서책이로군요.”
“위 대협은 색목인이지만 저희와 똑같은 무림인이니, 중원의 내공심법에 대해 알 수 있는 이 서책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값을…”
“아닙니다. 넣어두시지요. 시장에서도 헐값이니, 첫 만남을 기념하여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괜찮아요 위 대협. 저분은 처음 만난 분에게 서책을 선물해주시는 것을 좋아하시거든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다시 돌아가 볼 테니 혹시 사고 싶은 책이 더 있다면 가져오게나.”
관 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서책을 읽기 시작했다.
호심공이라.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중원의 내공심법에 대해서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니고.
나는 조용히 품속에 낡은 서책을 집어넣고 서련과 함께 책장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조용한 서점에서 서책을 고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답니다.”
“그렇군요.”
“누군가가 적은 소설에 누군가가 정리한 학문서적, 그리고 이런저런 삼류무공이 적힌 서책까지…가끔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으니, 위 대협도 서점에 들르는 취미를 가지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을 시간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후후, 위 대협처럼 바쁘신 분은 그렇겠네요. 저는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은 터라…”
“그렇습니까?”
“무가의 여식이 할만한 일은 무공 수련과 이런저런 소양을 채우는 일밖에 없답니다.”
그 말을 꺼낸 서련의 얼굴이 흐려졌다.
별로 좋아하는 일이 아닌 건가.
우리는 한동안 정처 없이 길을 걸으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거워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뒤이어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 분위기로 있기는 그래서 나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서련 소저는 자유를 갖고 싶다고 하셨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가장 먼저 할 일이라면…바다에 가보고 싶어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보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벌써 금요일이라니 시간 너무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