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5

        로즈마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황성 본관에 은은하게 울렸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는다. 곧 로즈마리는 빨간 머리를 한 중년 남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로즈마리의 입가에 비릿한 호선이 그려진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살리에르 백작이었다. 그녀의 큰 언니를 빼앗으려고 하는, 괘씸한 불여시의 부친.

       

        살리에르 백작. 그는 지금 하스펠트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족 회의니까 이해는 한다. 두 사람은 변경지대에 속한 귀족으로서, 국방과 대외 안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고 있는 것일 터였다.

       

        로즈마리의 발걸음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와인 코너에서 데킬라 병을 집어 들었다.

       

        숨을 죽인 채로 술을 따른다. 쪼르르. 높은 알코올 농도에 후각 센서가 쿡쿡 쑤신다.

       

        곧 그녀의 앵두빛 입술에 술잔이 다가섰다. 로즈마리는 잘 양조된 술을 홀짝이면서, 하스펠트 공작과 살리에르 백작 사이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래서, 그 금안족 소녀와 대화의 장소를 마련했으면 좋겠소.”

       

        잠깐, 뭐라고?

       

        “그렇군요. 딸아이에게 얘기해 주면 도와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성이 워낙 고우니까요.”

        “둘이 그렇게까지 친하던가?”

        “허허! 우리 딸내미가 제 입으로 말하길, 둘도 없는 단짝이라고 하더군요.”

       

        로즈마리의 눈가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마치 신기한 걸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두 귀족은 술에 취했는지 껄껄 웃어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반대로, 로즈마리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알코올의 알딸딸한 향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분이 풀어지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수상하다. 그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하스펠트 공작이 저리 저자세일 줄이야.

       

        로즈마리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역시, 살리에르 가문에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언니가 살리에르 백작을 변호한 것도 그렇고, 그 로테인가 뭔가 하는 년 눈치를 보는 것도 이상하다.

       

        큰 언니는 연구만 하면 장땡이다. 또한, 언니는 인간 밑에서 벌벌 떨 정도로 나약하지도 않다.

       

        애초에 에테르는 누구 밑에 있길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솔직히 추론해서, 마왕성을 가출한 이유에는 그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니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살리에르 가문에 엄청난 연구 기밀이 존재한다!

       

        이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로즈마리는 그리 추론해냈다.

       

        분명 ‘흑주’의 스크롤 도안과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연구일 터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언니가 로테인가 라떼인가 하는 소녀한테 쭈뼛거릴 리가 없었다.

       

        로즈마리는 곧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왕성 긴급 연락망을 통해 모두에게 암호화된 팩스를 남겼다.

       

        팩스 내용은 이러했다.

       

        – 빨간 머리를 조심할 것.

       

        좋아, 이거면 됐다. 나머지는 다음 마왕성에서 벌어질 회의에서 설명하면 된다.

       

        이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비록 계획은 실패했지만, 언니에게는 꾸준히 호감을 얻어 놓아야만 했다.

       

        로즈마리는 침대 곁에 놓인 탁자를 더듬었다. 그곳에는 뜨개질하다 만 목도리가 있었다.

       

        블루베리 색이 살짝 섞인, 검은색 목도리였다.

       

        “밀린 일이 많습니다.”

        “알아. 이것부터 완성하고.”

       

        원래는 11월까지 완성해서 언니에게 줄 생각이었다. 마수라고 해서 감기에 아예 안 걸리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로테 살리에르, 그 불여시가 나타난 뒤로는 사정이 바뀌었다.

       

        그 녀석에게서 언니를 되찾아 와야 한다. 비록 겨울 방학은 언니가 마왕성에서 지내겠지만, 언니는 졸업하고 나면 그 여자애와 같은 영지에서 산다고 답했다.

       

        로즈마리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동시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그중 언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환심을 살 만한 것은, 역시 하나뿐이었다.

       

        선물. 언니에게 겨울철 선물을 주면 된다.

       

        마수라고 남이 주는 선물에 무감각할까? 절대 아니다. 금안족도 어쨌거나 하늘 아래의 생명체다. 생일이나 마왕님 탄신일처럼 주요한 기념일은 서로 챙기고 지낸다.

       

        “그렇게나 위험을 느끼셨나 봅니다.”

        “당연하지.”

       

        지금 로즈마리의 손은 세상 그 어떤 편물 기계보다도 빨랐다. 못해도 월요일까지는 완성해서 줄 거다.

       

        이건 그냥 목도리도 아니다. 바이올린을 켜던 로즈마리의 손놀림으로 만든 목도리에는 물리적, 마법적인 효과도 여럿 부여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공격이라도 반감하는 능력이라든지. 일종의 버프 장신구인 셈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언니는 이런 선물에 약했지.”

       

        목도리를 줬을 때 고마워해 할 언니의 얼굴이 예상된다. 로즈마리는 입술을 히죽 움직였다.

       

       

        **

       

       

        일요일이 됐다.

       

        전날, 나와 로테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다. 결국 눈을 뜨고 보니 날이 지나가 있었다.

       

        금요일에 잠을 못 잔 탓이었다. 나는 카이뤼삭 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하느라 기숙사에 늦게 돌아왔고, 로테는 그런 나를 새벽까지 기다리느라 잠을 설쳤었다.

       

        자고 일어나니 침대가 개판이었다. 오늘 잠을 꽤 설친 모양이다.

       

        물론 괴상한 꿈도 꾸었다. 커다란 고목이 불타 없어지고, 하늘이 검게 변하는 꿈.

       

        이젠 일상이었다. 식은땀은 여전히 흘렸지만, 오한이 든다거나 자고 일어나서 헛기침이 나올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젠 익숙했다. 나는 허어, 하고 숨을 털어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목이 답답했다.

       

        곧바로 물을 한 잔 들이켰다. 그래도 목 부근이 답답해서 불편했다.

       

        “아.”

       

        그제야 내 목에 무언가가 둘러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로테에게 어제 받은 목도리였다. 개망초처럼 하이얀 색을 띠는 두꺼운 목도리.

       

        역시 이거였구나. 목도리를 두르고 자서 목 부근이 답답한 거였다. 나는 목도리를 풀어 헤치려고 했다.

       

        바로 옆 침대에서, 로테가 일어나는 걸 목도하기 전까지는.

       

        “으음.”

       

        로테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녀 또한 손발만 씻고 잔 터라 머리카락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의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체리처럼 톡톡 튀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또 그에 알맞은 눈동자는 어떠한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는 이지와 자애, 평화와 순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감정도.

       

        “일어났어?”

        “어, 응.”

       

        로테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것이 태양빛에 의한 효과인지, 그녀의 심상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나타낸 효과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목도리, 하고 잤네.”

        “겨울방학 끝날 때까지 하고 있으라며.”

        “…좋아.”

       

        로테는 후후, 하고 웃었다. 귀엽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한이 들기도 하는 웃음소리였다.

       

        “어우…. 추워.”

        “슬슬 난방 켤 때가 된 걸까?”

        “그럴지도.”

        “감기 안 걸리게 목도리 잘 하고 있어. 원래 환절기에 병들기 쉬운 법이야.”

        “그, 그래야겠다.”

       

        이젠 씻을 때 빼고는 못 벗을 듯했다. 이걸 안 두르고 돌아다녔다간 로테에게 한 소리 듣겠지.

       

        왠지 이 목도리가 안전장치가 된 느낌이었다. 로테를 원래 알던 ‘친구답게’ 만들어주는 안전장치.

       

        솔직히 얘기해서, 어제 로테가 보여준 눈빛은 무서웠다. 순진무구하던 단짝이 그렇게 돌변할 줄은 몰랐으니까.

       

        [뭐예요.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양치질하고 있자니 양장본이 그리 물어왔다. 나는 무미건조한 투로 머릿속에 말할 단어를 떠올렸다.

       

        너, 어제 딴짓하고 있었구나.

       

        [저도 쉴 때는 쉬어야 한다구요. 매번 상황 주시하면서 대화하는 건 아니라는 거 몰랐어요?]

       

        얼씨구. 여신이 만든 유사 AI 주제에 휴식이 필요하단다. 나는 피식 웃으며 칫솔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어디 보자, 연구는…. 재료는 충분해 보이네요. 나중에 시간만 있으면 ‘텔러-울람 설계’법의 2단계와 3단계를 동시에 끝낼 수 있을 거예요.]

       

        뭔지 몰라도, 양장본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했다. 간만에 보이는 유약한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얘한테도 성별이 있나?

       

        [뭐요.]

       

        반응 보니까 그냥 깡통이었네. 하기야, AI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겠냐마는.

       

        “에테르.”

        “응?”

        “오늘도 내가 원하는 거 들어주는 거 맞지?”

        “그렇지.”

       

        뭔가 불안하다.

       

        “그러면 겨울방학 때 우리 영지에서 보내줄 수 있어?”

       

        아이고야, 내 이럴 줄 알았다. 어째 불길한 예감은 잘 틀리질 않더라.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기 꺼려지는 탓이었다.

       

        그래도 의자매와 한 약속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같이 살자’라는 로테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듯이, ‘겨울방학 때 마왕성에서 함께 보내자’라는 로즈마리의 약속도 쉽게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약속은 곧 신뢰와도 같다. 로즈마리는 날 위해 신분까지 숨겨줬는데, 이것까지 안 지키면 쓰레기였다.

       

        이건 마수고 인간이고 할 필요도 없었다. 지적 생명체라면 지켜야 할 규범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리 믿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

       

        로테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갑게 변한다. 나는 대답을 잘못 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수정했다.

       

        “생각해 보니 잠깐이면 가능할지도.”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탄했다. 그러나 속은 가뭄이 난 땅처럼 바짝 메말라지고 있었다.

       

        저 눈빛이 무섭다. 두렵다. 여기서 응석을 안 받아주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이대로 핵 개발 과정에서 로테가 이탈하는 건가?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데. 버멜이 말하길, 수소탄 정도의 위력이 아니면 마왕을 잡아내는 것조차 확률적이라고 했으니까.

       

        확실히 집에 돌아가려면 로테가 필요하다. 그러나 로테는 내가 집에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

       

        고민된다. 결국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긴 뒤, 타협을 봐야만 했다.

       

        “단 며칠이면 될지도.”

        “…며칠?”

        “2주! 공녀님께 잘 얘기하면 2주 정도는 가능해.”

       

        “…그렇구나. 2주면 뭐, 괜찮겠다.”

       

        그제야 로테의 낯빛이 따사롭게 바뀌었다. 그제야 나는 안도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 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구나. 이거, 나중에 업보로 돌아오지 않을까. 

       

        아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이 세상엔 여신이라는 존재가 있고, 필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개념들도 엄연히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마왕이 부활하는 것도 필연이자 인과율이다. 내가 로즈마리 상대로 제아무리 트롤짓을 해봤자 마왕은 결국 되살아나 대륙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테와의 우정을 필히 지켜야 한다.

       

        “좋아, 그거면 됐으니까 오늘은 편히 쉬자. 나도 몸이 노곤해.”

       

        로테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로테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

       

       

        그리고 다음 날, 월요일.

       

        “어, 언니…?”

       

        교실에 나타난 로즈마리의 손에는 검정 목도리가 들려있었다. 나에게 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

       

        바닥에 떨어졌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