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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5

     

    시모어를 찾아 떠나자는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셀라는 월광궁의 업무를 정리해 딜레이한 후 동행할 호위기사진을 편성했다.

     

    나야 주요업무가 아셀라의 담당이니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 쳐도 당장은 중요한 한 가지를 처리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리셰였다.

     

    아니, 리셰보다는 샤를이 문제였다.

     

     

    그날 즉시 샤를과의 네 번째 카운슬링을 실시했다. 그녀에게 당분간 내가 궁을 떠날 예정을 전했다.

     

    처음에는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점차 납득해줬다. 그녀도 그간 자신이 리셰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리셰는 훌륭한 용사가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방해가 되겠고요.”

     

    아셀라의 의견대로 내가 있어서 샤를이 리셰에게 침투할 계기가 생겼다.

     

    본래 미래에서 리셰는 조금 덜렁대긴 했어도 인격만큼은 완성된 용사였다.

     

    간접적으로 관리를 이어나가면 원래 역사보다 시간이 많이 주어진 만큼, 그녀도 더 단단해지리라 생각한다.

     

    “혹시 리셰의 성장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냥… 너랑 더 놀 수 있으면 즐겁겠다 싶어서.”

     

    “친목회는 환영이에요.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샤를은 내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

    잘못을 들켜서인지 그녀는 꽤 온순했다.

     

     

    궁을 떠나기 전, 중요한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샤를이 밖으로 나올 때마다 [성검 파괴]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유다.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샤를씨는 대륙의 평화를 바라지요.”

     

    “당연하잖아.”

     

    “하지만 진심으로 싸우길 원하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내 말에 샤를이 경계심 가득한 눈매를 얇게 저몄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오래 싸우다 보면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잖아요. 샤를씨도 암만 용사라지만 결국 사람이고요.”

     

    샤를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감싸 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스트레스 –2]

    [No. 010 : 성검 파괴 99% → 97%]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샤를이 발생시킬 배드엔딩 확률이 조금 감소했다.

     

    “…역시 너만 알아주는구나.”

     

    샤를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고백하듯 내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이제 용사의 의무든 대륙의 평화든 별로 관심 없어. 잘 되면 좋지 하는 정도야.”

     

    “그런 것 치곤 눈 뜨자마자 황녀님을 공격하지 않으셨나요.”

     

    “자동반사야. 언제 어디서 눈 뜰지 몰라. 혹시 이번엔 다를까, 하고 일단 몸이 움직여 버려. 어차피 결과는 같은데 말이야. 희망고문이지.”

     

    리셰는 패배를 너무 많이 경험했다.

    이번 회차에서도 뭔가 해보려고 행동하긴 했다. 그 첫 액션이 아셀라부터 제거하는 일이었겠지.

     

    그게 다름 아닌 나에 의해 막히니 금방 부정적인 사고회로로 바뀐 건가.

     

    패배자의 사이클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태라면 샤를은 앞으로 조그만 위기에도 금방 포기해버리고 말 터다.

     

    “그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아무리 실패를 겪었더라도 리셰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리셰로 생각해주긴 하는구나.”

     

    샤를이 실없이 웃었다.

     

    “라스.”

     

    “네.”

     

    “난 해방되고 싶어.”

     

    샤를이 마침내 속마음을 고백했다.

     

    그게 샤를이 성검을 부수는 이유였다.

     

    싸워나가다가 희망이 사라졌다 싶으면 스스로 성검을 깬다. 혹시나 무슨 변수가 일어나 성검이 그녀를 놓아줄지도 모르니까.

     

    “이상해 보여?”

     

    “존중합니다.”

     

    “고마워.”

     

    그녀를 탓하고 싶진 않았다.

     

    보낸 시간만 따지면 내가 그녀보다 훨씬 많이 회귀하긴 했다.

     

    하지만 샤를과 내 회귀는 종류도 시점도 다르다.

    적어도 나는 반복한 한 달 동안 잠은 잘 수 있었지만, 샤를은 운이 나쁘면 몇 년이고 낮때만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같이 고생했지.

     

    그녀 정도면 편히 쉴 자격이 있다.

     

     

    ‘지금 말고.’

     

    내가 엔딩을 본 다음이면 얼마든지 쉬셔도 된다.

     

    나도 고생했는데 쉬어야 할 거 아니야.

    겨우 여기까지 판을 만들어놨는데 일방적으로 깨시면 안 되지.

    치사하게 혼자 개판 치고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가도 리셰에게 무해할 것 같긴 해.’

     

    나랑 아셀라가 없으면 샤를이 트러블을 일으킬 소재는 일단 황실엔 없으니까.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샤를이 어문 짓을 못하게 확실하게 족쇄를 채울 방법이 하나 뭐 없을까.

     

    ‘관심을 끌려고 이런 사건까지 벌인 걸 보면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기는 해.’

     

    그게 미래의 나라서 문제다.

    아니, 그것도 난데.

    나도 회귀했다고 알리기 싫다.

     

    샤를이라면 어차피 또 실패를 전제하고 있을 테니 조금만 뭐가 틀어져도 여기저기 떠벌릴 게 분명하다.

    특히 아셀라에게는 우위를 점하고 싶어서라도 당장 달려가서 나와의 관계를 설파할 게 분명하다.

     

    자의가 아니더라도 리셰에게 알려질 가능성도 있고. 리셰는 또 아셀라 앞에서 말실수할 것 같고.

     

    ‘얘는 지 편할 때만 나온단 말이야.’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나도 나 편할 때만 나오면 되네.

     

     

    나는 샤를이 팔을 받치고 있는 성검에 관심을 보이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지금 샤를씨는 여기에 저장되어 있나요?”

     

    “응? 어, 그렇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성검이 없을 때도 리셰랑 붙어있는 느낌도 있어서.”

     

    “보기엔 평범한 검인데 말이죠, 이게… 윽.”

     

    나는 성검의 손잡이를 슥 만졌다.

    동시에 정신을 잃은 척 몸의 힘을 빼고 샤를의 위로 쓰러졌다.

     

    “라스! 괜찮아?!”

     

    샤를이 당황하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기를 잠시.

     

    “헉!”

     

    나는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눈매를 굳히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리셰, 내가 아는 리셰야?”

     

    “…라스?”

     

    샤를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나는 생이별한 여동생을 만난 듯 반가워하며, 하지만 조심스레 손을 올려 살짝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표정이 맞네. 하하, 여기서 볼 줄이야.”

     

    “어, 어떻게 된 거야? 성검은 나만 저장하던 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는 아주 잠깐밖에 못 나와. 집중해서 내 말 잘 들어.”

     

    “으, 응.”

     

    샤를이 울먹거리다 코를 참고는 눈에 힘을 줬다.

     

    “나는 10년 전으로 돌아와서 조금씩 과거를 바꿔왔어. 여기 있는 나에게 미리 이것저것 준비를 시켜놨거든.”

     

    “무슨 준비? 그래서 이렇게 이상하게 과거가 바뀌었구나. 라스는 너를 알아?”

     

    “몰라. 하지만 완벽하게 내 계획대로야. 이제 황제 아셀라는 우리 편이야. 무해해졌어. 설명하긴 복잡해.”

     

    “저, 정말이야? 너도 수도 없이 봤잖아. 황제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리셰.”

     

    나는 샤를의 뺨에 손바닥을 대며 물었다.

     

    “나 믿을 수 있지?”

     

    체온을 느껴서 진정이 되었는지, 그녀는 내 팔을 잡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 말을 잘 듣고 있어. 이번엔 진짜 멸망을 막을 수 있으니까.”

     

    “아, 알았어. 저기, 너는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으윽!”

     

    나는 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기절한 척 푹 고개를 숙였다.

     

    다시 천천히 얼굴을 흔들며 상체를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빈혈이 왔나… 어이쿠, 표정을 보니 많이 놀라게 해드린 모양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이래요.”

     

    나는 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샤를씨의 목적은 알겠습니다. 이해는 하지만 지금처럼 리셰를 방해한다면 저도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얌전히 있을게.”

     

    “오, 정말요.”

     

    샤를이 눈가를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얌전히 있을 테니까… 나중에는 잠깐이라도 만나줘.”

     

    “나중에, 괜찮다고 판단하면요.”

     

    “약속해.”

     

    “예.”

     

    그렇게 나는 샤를과의 면담을 끝냈다.

     

     

    ―――――――――――

    · 굿엔딩

    · 용사■ ■■ 45% → 51%

    ―――――――――――

     

     

     

    ***

     

     

     

    “홀가분해 보이는구나.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제국 남단을 밟고 국경지대로 이동하고 있으니 아셀라가 그렇게 물어왔다.

     

    “뭘요, 가끔 이렇게 바람 쐬러 황실을 나오는 게 좋은 일이지요.”

     

    “그래?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나올 걸 그랬네.”

     

    “원정 말고요.”

     

    “황족이 기사를 움직였으면 무공 한두 개는 세워야 하지 않겠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셀라도 간만의 외출에 들떴는지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용사는 괜찮아?”

     

    “예, 문제없습니다.”

     

    “타냐공까지 여기 있는데도?”

     

    나와 아셀라가 함께 앉은 건너편에선 타냐가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먼 거리로 나가기에 그녀의 호위가 필요했다.

     

    “타냐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충분히 성장할 인재입니다.”

     

    “라스 네가 그리 확신했으면 틀림없겠지. 맡길게.”

     

    톡, 아셀라가 손끝을 튕겼다.

    이 대화로 머릿속에서 리셰에 관한 일은 당분간 날려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황녀님이야말로 궁은 괜찮으신가요. 게오르크가 돌아왔으니 대응이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악의가 있었다면 그랬겠지만은. 성실하게 돈 벌어서 궁을 재건할 생각밖에 없더라. 적대하지 않겠다면야 이용해야 이익이겠지. 그보다 저기 봐, 라스. 나무가 웃기게 생기지 않았니.”

     

    창밖에서 불어 들어온 바람에 아셀라의 금발이 살랑거렸다.

     

    여름이 다가오기도 했고, 안 그래도 따뜻한 남부로 향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가벼운 캐미솔에 반투명한 실크 스카프를 걸친 외출복을 입었다.

     

    딱딱한 황실의 황녀보다는 명문가의 영애 같은 여청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셀라의 증상을 고치기 위한 여정이었지만 그리 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실 나온 듯 여유가 넘쳐 흘렀다.

     

    도중에 냇가가 보이면 물장구를 치며 열을 식히기도 했고,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에서는 특산품을 사 먹기도 했다.

     

     

    국경을 넘어서도 1주일, 골짜기를 빙 돌아 돌아가는 경로를 보고 아셀라가 물었다.

     

    “왜 저 아래로 가지 않고?”

     

    “상관은 없습니다만 혹시 몰라서요. 대수해가 엘프들의 영역인 건 알고 계시지요.”

     

    “응. 본 적은 없어. 천 년씩 산다지.”

     

    “골짜기도 일단은 수해에 붙어있으니 정찰병과 마주칠 수도 있지요. 엘프는 외부인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이상하구나. 왕국에는 엘프 모험가도 많이 있지 않니?”

     

    “분파가 달라요. 저희가 국가를 나눠 사는 것처럼요. 숲 엘프는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습니다.”

     

    “흐응.”

     

    멀리 지평선에서 흘끗 보이는 녹색의 대삼림을 보며, 아셀라가 가볍게 감상을 냈다.

     

    “쟤들은 신중하게 결혼해야겠네. 천 년이나 함께해야 하니 말이야.”

     

     

     

    하루를 더 달려 우리는 초원과 산지가 맞닿은 장소, 나지막한 언덕에 도달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아셀라가 날리지 않도록 머리를 누르고 앞에서 거리낌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언덕 위의 조그마한 통나무 집.

     

    장작을 패던 시모어가 우리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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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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