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5

       *

         

         

         언젠가의 일이다.

         

         용사 파티의 등장과 함께 전장이 기묘한 교착 상태에 빠진 시기가 있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용사 파티는 당장 칠용장을 암살하지 않았었다.

         

         그 시절 용사 파티는, 대외적으로는 ‘고가치 요인 신속 타격분대’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주로 마족들에게 그렇게 불렸다는 의미다.

         

         그 시절 이들은 마족군의 고가치 요인, 즉 야전사령관들을 암살하고 다녔다. 합을 맞출 겸, 칠용장의 위치를 파악할 겸, 마족군의 위협을 둔화시킬 겸.

         

         그 시절 가장 큰 역할을 맡았던 이는 당연히 이반과 절멸부대, 엔리케, 그리고 베올그린이었다.

         

         

         “뭘 좀 알아낸 것이 있나.”

         “내가 자네보다 열 배는 더 늙었다는 사실 말고? 글쎄, 없는 것 같군.”

         

         

         베올그린은 빙글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의 손아귀에 들려 있던 오크가 묽은 침을 흘리며 바닥에 허물어졌다.

         

         이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짙은 하늘에서 달의 위치를 파악하며 시간을 역산했다. 아직 그가 초 단위 시간 계산에 익숙하지 않았을 시점이다.

         

         어쨌건, 그는 다음 작전을 위해 움직이기까지 시간이 다소 남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반은 반쯤 허물어진 군영 사이에 주저 앉아서 조용히 영양바를 꺼내 씹었다.

         

         

         “맛있나?”

         “맛이 중요한가.”

         “아무렴 중요하지. 사소한 즐거움을 잊지 말게나. 척후. 어둠 속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적이 아니라 망각일세.”

         

         

         즐거운 것, 중요한 것, 소중한 것들에 대한 망각.

         

         엘프의 말에 이반은 눈매를 꿈틀거렸다. 마법사들은 쉬운 말도 꼬아 하는 버릇이 있으며, 심지어 나이든 마법사는 그 증세가 심각했다.

         

         나이든-엘프-마법사쯤 되면 이제 일상적인 대화가 성립되기도 어려워진다.

         

         

         “나도 하나 줘 보게나.”

         “뱉지 않을 건가?”

         “자네가 소중히 여기는 나무토막인데 내가 설마 그럴까.”

         

         

         이반의 손에서 영양바 하나를 가져간 베올그린은 그 위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보라색 마력이 반짝이며 흩어졌다.

         

         그 사이에 손가락들은 마치 하나하나 각기 다른 의지를 지닌 것처럼 움직였다. 곧 기이한 도형이 영양바 위를 빼곡히 장식하더니 훅, 하고 꺼졌다.

         

         

         “자, 다시 들게나.”

         “…뭘 한 거지?”

         “호의를 베풀었지.”

         

         

         이반은 아무 말 없이 영양바를 씹었다. 한입 물고 잠시 멈칫했다.

         

         따듯했다. 불을 피울 수 없는 적진이었음에도 적절하게 뜨끈해져 있었다. 내부를 차지한 돼지 기름이 반쯤 녹아 부드럽게 씹히고, 곡물들이 포슬포슬 으스러졌다.

         

         이반이 아무 말 없이 영양바를 우물거리자,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베올그린이 툭 말을 꺼냈다.

         

         

         “엘프를 너무 미워하지 말게나.”

         “….”

         

         

         이반이 시선을 돌리자 베올그린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썩 살가운 족속은 아니지. 인정하네만, 너무 미워하진 말게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런가. 잘되었군.”

         

         

         눈 앞의 늙은 엘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청년의 모습을 간직한 이 오랜 족속들은, 그 탓에 더욱 꺼림칙했다. 상대의 속내를 파악하기 너무 어렵고, 그런 주제에 타인의 속내는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이들이라.

         

         이반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하늘 저 너머에서 쿵, 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공중전함의 포성이다. 먹구름 저 너머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개인은 종족을 대표할 수 없네.”

         “…뭐?”

         “그래서 우리가 마족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마왕 개인의 의사가 수십 종족 전체를 대표하고 있으니.”

         

         

         콰광, 쾅. 공중전함의 포성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전선이 밀려온다. 사령부를 잃은 마족들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 붉게 물드는 포화를 등지고 베올그린은 낮게 웃었다.

         

         “그러니 어떤 엘프가 오만하고, 또 어떤 엘프가 사악하더라도. 종족 전체를 증오하지 마시게나. 우린 적어도 그보단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념하지.”

         “뭐, 전쟁이 끝난 다음에나 할 말이로군.”

         

         

         베올그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확신에 차있는 표정이었다. 이반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물었다.

         

         

         “전쟁이 언제 끝나리라 생각하나?”

         “지금의 전쟁은 10년 뒤에 끝나겠지.”

         

         

         지금 회고해보자면, 마왕은 그 시기로부터 10년 하고 몇 개월 남짓 후에 용사의 손에 죽었다.

         

         

         “그 다음은, 글쎄.”

         

         

         베올그린은 그 뒤로도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마왕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마침내 찾아온 평화 속에서도, 그의 주장을 비웃는 동족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그는 이반이 마주한 엘프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자였다. 인간에게 가장 우호적인 엘프였으며, 가장 비밀스러운 사내였고, 또한. 가장 강한 사내였다.

         

         인간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엘프들은 그를 미쳤다고 비웃었으나.

         

         그럼에도 미소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나아가던.

         

         

         엘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로 꼽히던 자가 인간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하필이면 마왕이 도래했던 그 시기에라면 더욱이.

         

         

         ‘개인은 종족을 대표할 수 없다…라.’

         

         

         틀렸다.

         

         이반은 베올그린의 말을 회고할 때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엘프들은 도저히 정을 붙이기 어려운 족속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의 엘프들 탓에 이반은 그 족속 전체를 혐오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 시절 베올그린은 분명히 엘프를 대표하고 있었다.

         

       

         

       

       

       

       Ep 26. 종족구별주의자들

       

       

         

       

         

         “그러니까, 종족차별은 국제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니까요.”

         “오.”

         “국가나 민족으로 사람을 구분 짓는 행태는 낡은 악습이에요. 크라실로프 사람이라고 뭐 매일 불곰이랑 싸우고 감자 보드카를 죽을 때까지 퍼먹고 쓰레기 같은 여물을 씹는 건 아니잖아요?”

         “적어도 네가 크라실로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군.”

         

         

         이반은 엘피헤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프게도 부정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 봐봐요. 엘프가 더 우월한 건 귀 길이랑, 수명의 길이랑, 지식과 문화와 도덕과 사회규범의 길이 정도지. 그게 꼭 인간이 미개하단 뜻은 아니잖아요?”

         “…과연 그렇군.”

         “그러니까 종족으로 상대를 차별하지 말고, 모두모두 연합 왕국의 일원으로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그. 가정을 이루고. 응.”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엘피헤라는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푸른 하늘 너머에 구름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선체는 바람을 맞을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다.

         

         

         “용사 파티는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잖아요…?”

         “음.”

         “그래서 말인데, 종족차별의 악습을 가장 먼저 철폐하는 도덕적 지침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결합된 가정 같은 걸로.”

         “그건 베올그린과 상담하는 편이 낫겠군.”

         “거기서 아빠가 왜 나와요!!”

         

         

         그럼 그걸 왜 나와 상의하는 거지.

         

         이반은 이미 이 꼬마들을 이해하길 포기했으므로, 보다 상식적이고 건실한 생각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내륙이 발 아래 멀리 펼쳐져 있었다. 눈 내린 숲을 지나 푸른 초원이 보였다. 연기가 올라오는 작은 마을들이 장난감처럼 늘어졌다.

         

         틸레스 북부의 임야가 한눈에 내려 보였다. 이반은 그 아래로 지나가는 선로의 긴 궤적을 보고 함선의 속력을 역산하고 있었다.

         

         공중전함은 지금 틸레스 상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걱정 마요. 아래에선 절대 안 보일 테니까.”

         

         

         엘피헤라는 헤헹, 하고 가슴을 펼치며 웃었다.

         

         

         “완벽한 투명화 함선! 선수부 아래로 광학 위장 주문을 두껍게 발라 놨죠! 유지비가 아주아주 비싸지긴 하지만….”

         “이런 선박이 더 있나?”

         “음. 일단 추밀원 고위의원들은 한 척씩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이반이 딛고 있는 이 전함은 그리켄코스 가문의 소유였다.

         

         모든 엘프 귀족가는 자신만의 선단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으나, 공중전함을 소유할 수 있는 가문은 한정적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앞서서, 광학 위장이 가능한 공중 전함을 보유한 가문은 극소수에 속했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전함이 다섯 척만 있어도 어지간한 나라는 저항할 새도 없이 무너질 테니까. 이 전근대 세계 인류에겐 아직 제공권의 개념이 희박했으나, 엘프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족속들은 가장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바닷길과 하늘길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이반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베올그린이 칼리온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마지막으로 조우했을 때, 그는 분명 알렉산드르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가 칼리온에 숨어들어 있다면… 베올그린이 그를 놓칠 수 있기나 한가? 그것이 가능한가?

         

         알렉산드르를 후원한 엘프가 누구일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입지가 과연 베올그린에게서 그를 숨겨줄 정도로 중차대했단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타는 그의 입지를 과하게 과소평가하고 있기야 했으나, 냉정하게 생각해도 그녀의 말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알렉산드르는 실패자다. 왕권을 빼앗겼고, 반정 시도는 모두 사전에 근절되었으며, 자국 내의 지지기반을 송두리째 상실했다.

         

         타국에 숨어 암약했던 그 모든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틸레스 병력의 과반을 동원하고도 왕정을 탈취하지 못했으니.

         

         그런 패배자를 감싸줄 정도로 엘프들의 인내심이 깊지 않다.

         

         그러니 정말로, 칼리온에 알렉산드르가 숨어 있다면 사태는 둘 중 하나였다.

         

         

         ‘베올그린이 칼리온에 없거나.’

         

         

         아니면, 베올그린이 알렉산드르를 용인했거나.

         

         후자라고 가정할 때,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반은 씁쓸한 얼굴로 동녘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부 시작합니다!
    칼리온편! 예쓰!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