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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5

    천천히 걸어서 관악구에 도착하자, 나를 반겨주듯이 아침 태양이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며 풍경에 황금빛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따뜻한 빛이 폐허를 은은한 광채로 물들이며, 이리저리 부서진 건축물의 복잡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가 잔해 사이에서 장난스럽게 춤을 추며, 빛과 어둠의 모자이크를 만들어 황량한 폐허를 장식했다.

    이 고요한 아침 풍경 속에 끈적끈적한 검은 점액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화액’은 잘 관리된 합성 고무처럼 매끄럽게 출렁이며 특유의 광택으로 반짝였다.

    마치 폐허 위에 매끄러운 고무를 잔뜩 깔아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광경이었지만, 공기 중에 고약한 악취가 스며들어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더럽히고 있었다.

    석유 냄새와 악의로 가득 찬 악취는 정신을 마구 갉아먹는 것 같아서,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는 끔찍한 냄새였다.

    생물과 오브젝트 모두에게 해로운 액체 때문인지, 이 폐허에는 생물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들은 물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제3 연구소장의 노트, 그리고 오대산에 사용된 ‘진화액’을 보고 관악구에 많은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폐허는 한산했다.

    곳곳에 마련된 트리니티 연구소 캠프나 협회 소속 연구 캠프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 안에 근무 중인 연구원은 없었다.

    주변을 지키는 보안 요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폐허에 스며든 ‘진화액’을 제거하는 일이 간단할 것 같았다.

    진작에 저 지긋지긋한 점액들을 치워버렸어야 했는데, 설마 구 하나를 날려 먹은 액체를 재활용하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특히 제1 연구소에서 본 기록을 보니, 협회 쪽에서도 오브젝트 지배술로 사용하기 위해 연구 중이라는 보고서를 읽고 나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막상 제거하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더 이상 미니 사신 빠트리기 놀이를 못 하게 되겠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떤 미니 사신을 던져넣어 볼까?

    황금 사신은 너무 자주 넣어서 식상하니까, 동생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약한 애들은 검은 점액에 닿으면 죽지는 않아도 꽤 고생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황금 사신급으로 터프하면서도 검은 점액을 엄청나게 싫어하는 ‘검은 사신’이 제일 재밌을 것 같았다.

    손바닥 위에 검은 사신을 소환하자, 검은 사신은 검은 점액이 가득한 환경을 보면서 이빨을 드러내며 사나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 검은 사신을 상냥하게 집어 들어서, 천천히 검은 점액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검은 사신은 슬라임으로 변해서 내 손아귀에서 탈출해 버렸다.

    뚜시뚜시.

    어느새 내 어깨 위로 올라간 검은 사신은 양 주먹을 굳게 쥐고 내 뺨에 펀치를 마구 날렸다.

    펀치를 날리는 검은 사신의 표정은 어떻게 그런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왠지 오기가 생겼다.

    시간 가속이 있는 황금 사신은 던져넣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검은 사신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 가속까지 써가며 던져넣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버렸다.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는 검은 사신은 힘과 민첩성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힝.

    그냥 잡아서 넣는 건 불가능해 보이네.

    검은 사신이 맏이인 황금 사신보다 민첩할 줄이야….

    왜 내 아이들이 나보다 운동을 잘하는 거지?

    이제 슬슬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검은 사신이 의지를 전달해 왔다.

    ‘엄마는 왜 그런 장난을 치는 거야?’

    ‘그야… 재밌으니까.’

    검은 사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검은 점액 쪽으로 걸어갔다.

    ‘엄마, 잘 봐야 해!’

    검은 점액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검은 사신은 내 쪽을 돌아보며 의지를 전달했다.

    잘 보고 있어 달라고.

    “?”

    검은 사신은 이상하게 너무 비장했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잠깐 멈춰봐!’

    내가 다급하게 의지를 전달했지만, 검은 사신은 이미 점액 앞에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점액 속에 집어넣은 뒤였다.

    주르륵.

    검은 사신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점점 검은 점액이 타고 올라,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검은 사신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검은 사신을 품에 안았다.

    ‘!’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흐릿하게 눈을 뜬 검은 사신은 작은 소리를 냈다.

    삐이이.

    이제 얼마나 해로운지 알았으니 장난치면 안 돼, 엄마.

    희미한 의지가 작게 들려왔다.

    ‘미안해! 이제 안 할게!’

    생각보다 다급한 상황에 나는 장작을 마구마구 퍼부으면서 사과를 연발했다.

    황금 사신은 괜찮았는데, 검은 사신에겐 치명적일 줄이야!

    내 아이들은 전부 면역일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나랑 황금 사신만 특별한 거였나?

    미안해! 죽지 마!

    얼마나 지났을까. 

    검은 사신 몸속에 있는 장작을 몇백 번이나 가득 채울 만큼의 양의 장작을 밀어 넣으니, 서서히 사라진 팔 한쪽이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하, 정말 다행이야.

    나는 새근새근 잠이든 검은 사신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엄청 아팠겠지….

    역시 검은 점액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겠어.

    반쯤은 내 잘못이었지만, 이런 해로운 물질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는 내 분노를 담아, 검은 구체를 소환해서 검은 점액들을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매끈한 검은 점액은 수챗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액체처럼 검은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사악한 점액의 입자 하나하나가 검은 구체의 힘으로 분해되어 증발했고, 존재의 흔적도, 악의의 잔재도 남지 않았다.

    나는 품에 안은 검은 사신을 쓰다듬으며 말끔해진 관악구를 돌아보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해로운 물질을 남겨둘 순 없지!

    ***

    강남구 사태는 협회에서 꽤 심각한 사안으로 보고 있었다.

    원인 불명의 싱크홀이라니.

    회색 사신이 연상되는 현상이었다.

    세희 연구소에서는 회색 사신이 탈출한 적이 없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협회 소속 감사관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 감사관은 지금 상황이 매우 불만족스러웠다.

    감사팀을 보내도 모자랄 텐데, 겨우 혼자만 보내다니? 

    “하아, 이미 받은 일이니까. 확실히 해야겠지.”

    잘 정돈된 여성 정장을 갖춰 입은 감사관은 답답한 마음을 입으로 뱉어내며 세희 연구소 주차장에 내려섰다.

    그리고 세희 연구소 입구에 서서 커다란 장비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 장비는 협회에도 몇 개 없는 정신 오염 측정 장비였다.

    워낙 오래된 장비라서 정신 오염이 얼마나 심한지는 측정할 수 없지만, 정신 오염의 존재 여부 자체는 확실하게 잡아내는 장비였다.

    삐-

    장비의 오래된 스피커에서 텁텁한 소리가 울리며, 붉은 불빛이 점멸했다.

    ‘정신 오염이 있군.’

    협회 소속 감사관은 정신 오염을 확인하자마자 정신 오염 차단용 헬멧을 꺼내서 뒤집어썼다.

    ‘아직 연구소에 들어가기도 전인데, 정신 오염이 잡히다니 조심해야겠어.’

    감사관이 판단할 때, 생각보다 심각한 정신 오염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설마, 연구소 자체가 ‘회색 사신’에게 점거된 건 아니겠지?’

    헬멧을 쓴 채 세희 연구소 정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세희 연구소의 소장인 이세희 연구소장이 감사관을 반겨주었다.

    세희 연구소장과 대화가 오고 갔지만, 감사관은 그 대화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따뜻한 햇살 같은 따사로운 향기가 나고 있었다.

    행복하고 느긋한 향기였다.

    도무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감사관을 보면서 세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세희가 시선을 향한 곳에는 오예린이 숨어있었다.

    품 안에 다 품지도 못할 만큼 대량의 황금 사신을 품에 안은 채.

    감사관은 세희가 넘겨준 기록을 천천히 읽으며, 회색 사신의 격리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료가 전부 엉터리야.’

    이 자료는 오늘 아침에서야 대충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허술했다.

    “자, 회색 사신은 이렇게 얌전히 격리실에 있습니다!”

    뚜방뚜방.

    세희의 목소리에 감사관이 고개를 들자, 회색 사신이 즐거운 것처럼 웃으면서 격리실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으음.”

    회색 사신처럼 생겼다. 

    세상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무표정 대신 즐거워 보이는 해맑은 표정.

    그리고 보고된 적 없는 날카로운 상어 이빨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즉, 닮았지만 회색 사신이 아니었다.

    ‘빨리 보고해야겠어.’

    정신 오염 방지 헬멧을 쓰고 있는데도,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어지럼증이나 두통은 보통 정신 오염에 저항할 때 생기는 경우가 많았으니, 서둘러서 보고해야 했다.

    감사관은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어지럼증에 핸드폰을 떨어트려 버렸다.

    ‘이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은 가운데,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주우려고 하니 작고 귀여운 무언가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건네주고 있었다.

    황금처럼 고귀하고, 태양처럼 해맑은 회색 사신을 닮은 오브젝트였다.

    ‘아, 저게 황금 사신이로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자, 황금 사신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손가락 위를 토닥였다.

    마치 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픈 것을 보고 걱정하는 것처럼 애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라고 묻는 것만 같은 표정을 보며 감사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야.”

    감사관은 황금 사신을 향해 슬쩍 웃어주며 기특한 황금 사신을 쓰다듬어 주었다.

    감사관의 손가락 감촉이 마음에 드는지, 황금 사신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기뻐했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이 손가락을 직접 잡아서 자기 뺨에 문지르기도 했다.

    ‘확실히 귀엽네. 인기가 있을 만해.’

    감사관은 황금 사신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전화만 하고 좀 더 놀아줄게.”

    그 말을 들은 황금 사신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지긋지긋한 두통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개운하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감사관은 생각했다.

    ‘뭐, 전화는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 우선은 ‘황금 사신이’랑 놀아줘야겠어.’

    감사관이 헬멧을 벗어버리자, 황금 사신은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들어서 뺨에 달라붙었다.

    감사관은 태어나서 제일 즐겁다는 느낌을 받으며 황금 사신의 애교를 받아주었다.

    황금 사신도 행복하고, 감사관도 행복하고, 세희도 행복한 결말이었다.

    ***

    푹신한 마시멜로 대지가 펼쳐진 미니 사신 정원에서 황금 사신이 기쁜 표정으로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황금 사신의 행동 때문일까, 둥글게 뭉쳐있던 하얀 털뭉치가 풀어 헤쳐지기 시작했다.

    하얀 털뭉치처럼 보였던 것은 구불구불하고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이었다.

    다른 미니 사신과 달리 풍성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펼쳐지자, 그 속에서 주황 사신의 몸이 드러났다.

    ‘큰 막내!’

    황금 사신은 그런 주황 사신을 올려다보면서 즐거운 감정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주황 사신은 황금 사신과 꽤 다르게 생겼다.

    키도 황금 사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고, 육체의 굴곡도 훨씬 성숙한 모양이었다.

    주황 사신은 천천히 걸어서 황금 사신에게 다가간 뒤, 그대로 꼭 껴안았다.

    반가운 마음을 담아서 꾸욱.

    그러자 머리카락이 다시 스르륵 닫히기 시작하면서 황금 사신과 주황 사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황금 사신이 발견했던 털뭉치처럼.

    하늘 높이 뜬 불변 구에 닿을 정도로 높이 떠오르자, 털뭉치 속에서 황금 사신의 얼굴이 뿅 하고 튀어나오더니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점프하거나, 쏘아 보내진 적은 있어도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인 황금 사신은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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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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