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7

    관계자들만이 모인 자리.

     

     

    국왕은 높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국왕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특정 분위기가 존재했다.

     

    특히나 이제는 홍염단을 이끌어야하는 내게는 그 부담감이 조금은 더 무겁게 다가왔다.

     

     

    국왕은 내게 말했다.

     

    “…시작하기에 앞서, 이 말을 해야겠군.”

     

    “…”

     

    “나의 선택으로 폐지한 인족의 문화지만…자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해. 그럼에도 이럴 수 밖에 없는건, 옳은 선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야. 무책임하게 태어나는 인족 아이들도 줄을 것이고, 배다른 형제의 다툼 또한 줄겠지. 공평하게 사랑받지 못해 상처받는 아내들도 분명 없어질 거고.”

     

     

    이제 폐지에 대해 반박할 마음이 없던만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국왕이 나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예상 이상으로 고분고분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그는 의아함을 느낀 듯 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이던 그가 묻는다.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는군, 베르그 라이커. 변화가 있었던 건가?”

     

    “…”

     

     

    나는 아주 미세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국왕이었다.

     

     

    그 또한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그럼 문제없이 진행되겠군. 모두의 의견이 맞아떨어지니.”

     

     

     

    -드르륵!

     

    그때, 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네르의 행동에 국왕이 눈썹을 치켜올렸고, 네르는 그런 그에게 예의를 표한 뒤 말했다.

     

     

    “…전 못 받아들이겠어요.”

     

     

    깁슨 블랙우드와 기딘이 네르의 팔을 붙잡았지만 네르는 멈추지 않았다.

     

     

    “이럴 순 없는 거잖아요…”

     

     

    국왕은 네르를 말리는 기딘과 깁슨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네르에게 묻는다.

     

     

    “무슨 의미지?”

     

    네르가 어떠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국왕이 이어갔다.

     

     

    “일부다처제의 폐지를 원한다고 내게 직접 말하지 않았나.”

     

    “…”

     

    네르는 헛숨을 삼키며 굳었다.

     

    그녀의 방황하는 눈이 나를 향했다.

     

     

    네르는 그러다 내 반지를 꾹 손에 쥐며 곧게 말했다.

     

     

    “베르그와 단 둘이 살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거였어요.”

     

    “….”

     

    “우리의 종족은 단 한 명밖에 사랑하지 못해요. 그런 제 짝에게…저런 엘프가 들러붙는 꼴을 보기 힘들어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던 거였어요.”

     

     

    아르윈도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국왕은 터져나오는 변화에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 듯 했지만, 예상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나도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넘실대며 전해져온다.

     

     

    국왕은 이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 말했다.

     

    “…뭐가 됐든 둘 중 한명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겠나. 베르그. 그래서 누구와 이혼을 할 거지?”

     

     

    이 순간이 왔다.

     

    이제는 정말로 이별을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오늘 이후로 네르와 아르윈을 단 둘이 마주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길다면 길었던, 짧다면 짧았던 혼인 생활을 끝내게 될 것이다.

     

     

     

    나는 네르와의 혼인날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의 얼굴과 떨림을 기억한다.

     

    반지를 끼워주던 순간과.

     

    입술을 맞추는 연기.

     

    숲에 들어가 느티나무 앞에서 영혼을 묶었던 순간까지.

     

     

    나는 네르를 바라보았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고 있는 그녀.

     

     

     

    아르윈과의 혼인날도 떠올려본다.

     

    세계수 앞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맺었던 신성한 약속.

     

    서로의 이파리를 교환한 순간.

     

    밤의 바르디 술까지.

     

     

    나는 아르윈도 바라보았다.

     

    아르윈은 힘없이 눈물을 흘리려하고 있었다.

     

     

     

    나는 이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둘 다, 이혼하겠습니다.”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동요한다.

     

    셀레브리엔과 블랙우드에서도 소리가 울려왔다.

     

     

    “둘 다?”

     

    국왕이 제 귀를 의심하는것처럼 내게 물었다.

     

    나는 곧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그…..제발….”

     

    네르 쪽에서 흐느낌이 울려온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르윈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게 눈의 끝자락을 통하여 보였다.

     

    그녀 또한 나는 바라보지 않았다.

     

     

    국왕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

     

     

    깁슨과 아스칼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조마조마해하는 모습을 보낸다.

     

     

    나는 한차례 고민했다.

     

    어떻게 답을 해야할까.

     

     

    네르는 용병단의 약점을 누설하려 했고. 아르윈은 치밀히 계획하여 나를 살인하려고 했다는 말을 전해야 할까?

     

    그게 올바른 선택일지도 모른다.

     

    내가 더 이상 짊어져야하는 책임은 없었으니.

     

     

    …하지만 말처럼 쉽게 그 이야기가 내뱉어지질 않았다.

     

    한때 그녀들을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마음가짐의 잔재가 남아 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 사실들이 불러올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최근 들어 소문의 힘을 점차 실감하는 나였다.

     

    이제는 홍염단을 모르는 존재가 어디에도 없을 정도였으니.

     

    네르의 흰꼬리도 내 앞에서는 그 누구하나 조롱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내가 네르와 아르윈의 치부를 밝힌다면… 바랐던 대로 그들은 평범한 삶을 영위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미 그녀들과 나의 관계는 끝났으나…그렇게까지 망가지길 원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아르윈은 천 년 이상을 산다.

     

    그녀에게 평생 남을 낙인을 찍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국왕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진심으로 그녀들을 사랑했던 적은…”

     

    내가 짐을 짊어지기로 한다.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베르그의 말에 네르는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채 이별을 진행하는 베르그.

     

    그 행동에는 망설임조차 없어보인다.

     

    너무도 차갑고 빠르게 자신과의 관계를 마무리 짓고 있다.

     

     

    -털썩…

     

     

    네르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베르그가 자신을 위해 내뱉은 빈말이라는 건 안다.

     

    자신의 치부를 감춰주기 위해, 사랑한적 없다는 말로 짐을 부담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빈말이라도, 자신을 사랑한적 없었다는 말은 커다란 상처가 되었다.

     

    베르그의 사랑 없이는 나을 수 없는 흉터가 가슴에 새겨진다.

     

     

    베르그는 그런 그녀의 상황을 무시한채 이어나갔다.

     

    “…이제 우리의 동맹이 필요하지 않으니, 둘 다 제 곁을 떠나도 문제는 없습니다.”

     

     

     

     

    “…거짓말…”

     

    그 이야기를 들은 아르윈도 고개를 저으며 베르그의 말을 부정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되니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그녀가 애원한다.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만 하지마요…”

     

    네르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다.

     

     

    그녀는 온 왕국에 비웃음 당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남편을 배신하려 했던 여자라며 매도 당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베르그가 자신을 사랑한적 없다는 말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을 위한 말이더라도…견딜수가 없다.

     

     

    베르그는 흔들림 없이 국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은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기저에 깔려있다는눈치 챈 듯 했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큰 숨을 들이쉬었던 그가 이내 말한다.

     

    “…그럼 그렇게 알면 되겠군.”

     

    “…”

     

    “블랙우드와 셀레브리엔, 그리고 라이커의 관계는 끊어졌다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라고요…!!”

     

    네르가 순간적으로 흐느끼듯 외친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네르! 폐하께 그게 무슨-!”

     

    “-괜찮다.”

     

     

    아버지인 깁슨이 자신의 팔을 붙잡았지만, 국왕은 감정을 터트리는 네르를 다시 한번 내버려둔다.

     

     

    네르는 베르그와 국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베르그와 자신을 잇는 끈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면…그 길로 베르그는 몸을 돌려 떠날 것이다.

     

    아마 두 번 다시 만나주지 않을거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이 남은 인생중 그와 가장 가까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 가정에 네르는 피가 마르는 듯 했다.

     

    호흡이 거칠어졌고, 시야가 흐려진다.

     

    손발 끝이 저릿저릿했다.

     

    최근 몸이 너무도 많이 나빠졌다.

     

     

    정신을 차리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이성을 유지하는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런 이유에서 국왕에게까지 소리를 지르게 된 것이다.

     

     

    네르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떠올랐다.

     

    “이,이미 전….베, 베르그의 것이에요.”

     

    “…”

     

    “몸도 마음도…이미 베르그의 것이라고요…다른 사람이 제 몸에 손을 올리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베르그를 놓치면…평생 다시 혼자인 그녀다.

     

    베르그가 아닌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사랑도 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베르그가 자신을 봐주어야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이어갔다.

     

    “앞으로 평생을…..혼자….흐윽…”

     

     

    국왕이 네르의 말을 요약하여 되물었다.

     

    “…순결을 베르그에게 잃었으니, 다른 짝을 찾을 수 없을거다?”

     

    “…”

     

    네르는 헛숨을 삼켰다.

     

    그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국왕의 이야기에 가능성이 피어난다.

     

     

    베르그에게는 언제라도 순결을 건네줄 수 있었다.

     

    아직은 주지 못했지만…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베르그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다.

     

     

    그 상식적이지 못한 이야기를 뱉는다면…베르그 곁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더더욱 이별하게 되는 계기가 아닐까.

     

     

    네르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는.

     

     

    추하고 추한 거짓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이것 밖에 없었다.

     

     

    그 긍정에 국왕은 잠시 생각하듯 턱을 쓸었다.

     

    하지만 국왕의 고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네르는 순결합니다.”

     

     

    그 짧은 말에 고요해지는 회담장.

     

    베르그가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뭐?”

     

     

    그는 아르윈을 바라보면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아르윈도 마찬가지로요. 둘 다…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동요와 웅성임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몇 달째 이어진 부부생활.

     

    그 생활 속에서 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렸을지 네르 또한 알고 있었다.

     

     

    그건 모두 베르그가 자신을 소중히 여긴것에 대한 결과였다.

     

    억지로 범할 수 있었음에도 지켜준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사랑이 조금도 섞여있지 않은 부부처럼 내비칠 뿐이다.

     

    특히나 베르그가 자신들을 사랑한적 없다 말한 이후인만큼.

     

     

     

    베르그와 네르, 그리고 아르윈을 향해 시선이 쏠렸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베르그와 깊이 사랑한 사이라고 공표하고 싶었다.

     

     

    그 누구도 사랑했던 자신들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최소한의 염치가 그녀를 붙잡는다.

     

     

    후회가 그녀를 엄습했다.

     

    왜 그 동안 베르그를 거부했을까.

     

    한 번만 받아들였더라면…당장의 상황도 많이 달랐을지 모르는 것이었는데.

     

     

    국왕은 이내 아르윈에게 진실을 물었다.

     

    “…진실입니까?”

     

    “…”

     

    아르윈도 베르그를 바라보지 않은채 고개를 저었다.

     

    그녀 또한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도 자신처럼,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듯 말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 사이에요…”

     

     

    국왕의 얼굴에 의심이 물드는 걸 볼 수 있었다.

     

    베르그가 인족이라 그런지, 혹은 관계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명이라 그런지, 혹은 부부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걸 믿기 어려워서 그런지.

     

    베르그를 향한 의심이 커져갔다.

     

     

     

    그 눈빛을 받은 베르그는 간결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는 네르와 아르윈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둘은…제게 더렵혀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도…당연히 없고요.”

     

     

    이마저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말이라는 걸 네르는 알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네르의 속은 검게 물들어갈 뿐이었다.

     

    정말로, 베르그는 자신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더럽혀졌다는 말을 사용한것조차 네르를 아프게한다.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축복뿐이었으니.

     

     

    -탁!

     

    이내 국왕이 탁자를 가볍게 내려친다.

     

     

    고민을 하던 국왕이 명한다.

     

    “헤아 교단에 연락해서, 순결의 보주를 가져오거라.”

     

     

    네르는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순결의 보주.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불안한 마음은 커져갔다.

     

     

    .

    .

    .

    .

     

     

    헤아교단의 주교와 함께, 보주가 회담장에 등장한다.

     

    네르는 자신도 몰래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불안함 마음만 가득했다.

     

     

    국왕이 말했다.

     

    “성녀님은 어디계시지?”

     

    주교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다, 네르를 바라보았다.

     

     

    “네르 블랙우드. 가서 보주에 손을 올려라.”

     

    “…..네?”

     

    “순결하면 빛을 발하는 성물이다.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지 알 수 있겠지.”

     

    “…………”

     

    네르는 몸이 그대로 굳었다.

     

    얄팍했던 거짓말이 순식간에 탄로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사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벌어질 일을 네르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놀림감이 되는게 부끄러운게 아니었다.

     

    …순결이 증명된다면, 베르그와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는게 두려웠다.

     

     

    “…어서.”

     

    국왕이 명령한다.

     

    네르는 가만히 굳어있는 수 밖에 없었다.

     

    뒤는게 기딘이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 이끈다.

     

     

    네르는 제 큰 오라버니의 안내에 저항했지만, 기딘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질 거다. 시간을 끌면…아픔이 더 길어질 뿐이야.”

     

    네르는 어느새 보주 앞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베르그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는 베르그.

     

    “…”

     

    “…”

     

    네르는 그의 온기를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세상에는 베르그만이 존재했다.

     

     

    나머지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베르그에게…네르는 말했다.

     

    그에게만 들릴 수 있는 크기로 속삭인다.

     

     

    “…나…”

     

    “…”

     

    “…나 무서워…베르그.”

     

     

    이별이 너무나 무서웠다.

     

    베르그가 없는 삶이 두려웠다.

     

    네르는 마지막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달라고.

     

     

    베르그의 눈썹이 흔들렸다.

     

    네르는 마치 그게 허락이라도 되는것마냥, 그에게 양팔을 벌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게 안겨야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두 발자국 이상 다가가기도 전에, 기딘과 블랙우드의 병사들이 그녀를 만류했다.

     

    베르그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네르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가는데 왜 막는걸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기겠다는데 왜 안되는 걸까.

     

     

    기딘이 다시금 속삭였다.

     

    “네르. 빨리 보주에 손을 올려라.”

     

    “…싫….어요…”

     

    “네르…!”

     

    “…싫어요…!”

     

     

    -콱!

     

    기딘은 이내 네르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그녀의 손을 보주에 가져다 대려고 했다.

     

    네르는 발악을 하며 제 순결을 감추려 했다.

     

    “싫어요!! 베, 베르그…!! 제발…!!”

     

     

    -툭.

     

    순간적으로 베르그가 사람들을 밀치고 나와 기딘의 팔목을 붙잡았다.

     

    “…하.”

     

    깊은 아픔을 드러내는 베르그.

     

     

    도와준걸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이내 베르그가 보주에 손을 올렸다.

     

    -턱.

     

    그리고 그 순간, 밝은 빛이 보주에서 터져나와 회담장을 밝혔다.

     

    그 찬란한 빛에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베르그는 순결했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의 기이한 뒷사정이 밝혀진다.

     

     

    “…됐습니까.”

     

    이내 베르그가 손을 떼어낸다.

     

    빛이 꺼져들어가다…힘이 풀린 네르의 손이 뒤늦게 보주에 닿았다.

     

     

    마찬가지로 밝은 빛을 뿜어내며, 네르의 순결함이 증명된다.

     

     

    “…이거…믿을수가 없군. 인족이…?”

     

    국왕이 혼잣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하지만 네르의 눈에는 베르그만이 가득했다.

     

    그와 자신을 연결할 그 모든 선이 사라졌음이 느껴졌다.

     

     

    “…아르윈 셀레브리엔.”

     

    베르그의 순결함이 증명되자, 아르윈은 저항할 힘을 잃는다.

     

    그녀 또한 등을 떠밀려 보주 앞에 섰다.

     

    다른 엘프 병사에 의해 억지로 얹힌 아르윈의 손.

     

    마찬가지로 보주가 빛을 뿜어냈다.

     

     

    베르그는 근거리에서 두 아내들을 바라보았다.

     

    네르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힘없이 아르윈의 손이 보주를 떠나 빛을 잃어도, 그는 그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미 할 말은 끝난것처럼.

     

     

    국왕도 현 상황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베르그는 그런 국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국왕은 그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스윽.

     

     

    베르그가 등을 돌렸다.

     

     

    네르는 심장이 터질 듯 아파왔다.

     

    “…베르그….”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게 정말 마지막일까.

     

     

    그와 함께했던 꿈 같던 시간.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

     

    이제는 끝을 보고 있는걸까.

     

     

    “…”

     

    잠시 멈칫한 베르그는 고개를 한번 숙인 뒤 걸음을 옮겼다.

     

     

    네르는 멀어져가는 베르그를 보며 말했다.

     

     

    “…넌…내 꺼야, 베르그…”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끈적하고 질척한 감정들이 그녀 안에서 탄생한다.

     

    그녀의 기구했던 삶과, 베르그에게 받은 사랑이 합쳐져 짙고도 무거운 집착이 피어난다.

     

     

     

    베르그가 자신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그런 감정들이 생겨난다.

     

    “…넌 언제나…내것이어야만 해…”

     

     

    베르그는 절대 놓아줄 수 없었다.

     

    제 삶에 걸어들어온 그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저벅…저벅….

     

    하지만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베르그….제발…”

     

    “….”

     

    “가지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쳐보아도 베르그는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어쩌면 네르는 저 단호함에 그 동안 구원을 받았던 걸지도 몰랐다.

     

    당장은 그녀를 힘들게만 하는 단호함이었다.

     

     

    순간적으로 답답한 마음이 폭발하며 분노가 터진다.

     

     

    “나 너 없으면…흐윽….”

     

    “…”

     

     

    “…나….나 죽을거야…”

     

     

    네르는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떠나고 있었다.

     

    이게 그를 보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나 죽을 거야…베르그…”

     

     

    그 말에 베르그가 우뚝 굳는다.

     

    네르는 블랙우드의 병사들을 뿌리치며 베르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쇠약해진 그녀의 몸은 그럴 힘이 더 이상 없었다.

     

     

    “그…그래…흐윽….멈….춰, 베르…”

     

    심장에서 느껴지는 아픈 통증과 함께, 이내 시야가 어두워지며 세상이 한바퀴 돌았다.

     

     

    ‘….어….?’

     

     

    그때, 베르그가 뒤를 돌았다.

     

    흐려지는 네르의 눈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둘 다.’

     

    오롯이 그의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고마웠어.’

     

     

     

     

    “……..르그…”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땐.

     

     

    “………..”

     

    노을이 지고 있었고, 베르그는 곁에 없었다.

     

    네르의 눈은 한 마차의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그를 잡기 위해 뻗었던 손에는 바람만이 스치고 있었다.

     

     

    “…아…”

     

     

    블랙우드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다.

     

     

    “….아….아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제야, 본인이 진정으로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첫 친구이자.

     

    첫 짝이자.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베르그가 자신을 떠났다는걸 인정해야만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응애오브킹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아이고 다치셨군요.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ㅜㅋㅋㅋ 그럼요, 이제 시작이 아닐까 싶네요. 새로운 후회맛을 이번에 시도해보려고요. 넵! 건강은 잘 챙기겠습니다!

    정태양님! 5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군대에서는 언제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ㅎㅎ고된 군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OQW598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좋아합니다.

    다음화 보기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