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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7

     

    “아이 눈 아파.”

     

    상태창을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던 탓에 눈이 따가웠다.

    손으로 비비적거리고 다시 확인해봤다.

     

    ‘엔딩리스트에 정보가 늘었어.’

     

    여태 내가 추측해온 내용과 어느 정도는 일맥상통했다.

     

    내가 선택한 직업과 획득한 업적에 따라, 세 가지 엔딩으로의 루트가 정해진다.

     

    두 번째 루트는 이미 파기됐다. 내가 모험가로서의 삶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슈타와 북부에서 경험한 모험은 즐겁긴 했지만, 나는 의사로 남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아마 굿엔딩과 노멀엔딩의 분기점은.’

     

    해당 루트에서 내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중요한 사람.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정해지지 않을까, 예상됐다.

     

     

    배드엔딩도 그렇지만 모든 엔딩은 발생할 타이밍에 독립적으로 확률을 시행한다.

     

    이를테면 50%의 확률인 채로 시점에 도달했을 때, 당첨되면 그대로 굿엔딩이 발생.

     

    실패하면 굿엔딩은 사라지고 70%쯤 가능성이 있을 노멀엔딩 확률에 도전하게 된다.

     

    그마저 실패하면 흠, 그 뒤는 모르겠네. 설마 또 배드엔딩이 뜨진 않겠지.

     

    뭐, 모든 배드엔딩을 돌파해야 굿엔딩에 도전할 기회가 생기니 일단 배드엔딩 삭제가 우선이다.

     

    이전에는 100번의 확률을 모두 돌파해야 했던 셈이니 사실상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에 얻게 된 정보에서는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했다.

     

     

    ―――――――――――

    ○ 히든엔딩

    [욕망의 길]

    · 주■■는 ■■■ ■■고 ■■■■ 25%

    ―――――――――――

     

     

    어느덧 확률이 상당히 올라있는 맨 마지막 선택지.

     

    그 정체는 히든엔딩이었다.

     

    ‘욕망의 길이라니, 뭔지 상상도 안 가네.’

     

    명백하게 대상이 누군지 알 수 있는 다른 세 루트에 비해, 관련된 인물이 누구인지도 아직 모르겠다.

     

    확률이 조정될 때를 주의 깊게 확인해서 좀 더 단서를 체크할 필요가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시모어의 오두막으로 들어가니 그는 흔들의자에서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 고트베르크.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구먼.”

     

    “황녀님 표정이 좋아 보이시더군요. 해결법을 알려주셨습니까?”

     

    “해결될지 어떨지는 아셀라에게 달렸지. 자네가 잘 지켜보게나.”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말을 이어가려던 시모어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는 굵게 기침을 했다.

     

    나는 그에게 차와 함께 한 봉투의 가루약을 내주었다.

     

    “기침약입니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하하, 기다리고 있었지. 달콤한 맛인가?”

     

    “아주 달죠. 현자님의 차도요.”

     

    시모어는 내 약을 만족스럽게 받아먹고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물어볼 건 무엇인가?”

     

    “괜찮습니까? 저는 현자님께 몇 번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니 제자 대우를 해주시면 황녀님께서 삐치실 텐데요.”

     

    “하하, 둘만의 비밀로 하세나. 자네만의 비밀로 해도 좋고.”

     

    나는 시모어의 건너편에 앉아 아셀라가 남긴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생각보다 마실 만한데요.”

     

    “그렇지? 마력순환에 좋은 차야. 내 직접 아침마다 캐고 있거든.”

     

    “비명뿌리초는 마력강화 포션의 재료이기도 하지요.”

     

    “음음, 연금술의 경지가 올라갔구먼.”

     

    시모어가 즐거운 듯 껄껄 웃었다.

     

    “어느 재료까지 손대보았나?”

     

    “최근에는 세이렌의 눈물입니다.”

     

    “희귀한 걸 다뤘군.”

     

    “착실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있지요.”

     

    “대가라. 유쾌하진 않아.”

     

    시모어는 슬며시 눈을 감고는 기분 좋게 의자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최근 조사하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현자님께서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허허, 사람은 기억을 잊어버리는 법이잖나.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는다네.”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시모어가 껄껄 웃고는 수염을 튕겼다.

     

    “역시 감이 좋아. 내 대가를 파악했을 때부터, 비밀을 들킬 사람이 있다면 자네가 아닐까 했네. 연금술에 대한 갈망이 그대를 여기로 이끌었는가? 아니면 의학인가?”

     

    “둘 다입니다. 제 재능은 둘 다 결국 생로병사의 탐구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자네의 예상대로일세.”

     

    시모어는 내게 빵긋 미소지으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엘릭서를 마셨네. 불로장생의 몸을 얻었지.”

     

    시모어에게서 엘릭서의 단서를 찾을 수 있겠다는 추측은 정답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기엔.”

     

    “수명이 다한 것 같다고? 그것도 맞아. 무감각증, 7위계를 열며 재능의 대가가 재발했지. 나는 천재였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네. 조금씩 수명을 대가로 써야만 했어.”

     

    수명을 대가로 마법의 경지를 올렸다.

    시모어는 그렇게 자백했다.

     

    즉 그가 마법에 욕심만 내지 않았더라도, 몇백 살로 추정되는 지금에서 더욱이 한참을 더 살았다는 뜻이었다.

     

    “마법이란 그렇게까지 해서 손에 넣을 가치가 있었습니까?”

     

    “자네는 어떠한가? 그 손에 깃든 사람을 구하는 기술은,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나?”

     

    그의 질문에 무심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온갖 제약도 자유자재, 병마를 파악하고 수술을 위해 메스를 쥐는 손.

     

    이번 회귀가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불가능했으며 결코 잡을 수 없었던 능력이다.

     

    “가치가 있었지요.”

     

    나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덕분에 아셀라와 자네에게 사소한 충고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은가. 하하, 죽기 직전에 여신을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구먼.”

     

    본래 그도 다른 마법사들처럼 위업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었겠지.

    조금은 변덕이 생긴 모양이다.

     

    “이백 년 전, 내가 용사 파티에서 싸울 때.”

     

    시모어가 옛날이야기를 하듯 읊조렸다.

     

    “마왕의 간부 중에 연금술사가 있었네. ‘버림받은 자’라는 언데드 세력을 이끌던 수장이었지. 우리의 활약으로 마왕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엘릭서를 만들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마계를 탈출했네.”

     

    “그를 쫓으셨습니까?”

     

    “물론이지. 혹 마왕을 부활시킬 수도 있었으니. 그는 마지막 재료만을 필요로 하고 있었어. 완성을 코앞에 뒀지. 놈이 어디로 향했을 것 같나?”

     

    “상상이 안 가는군요.”

     

    시모어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잎을 기세 좋게 집어 올렸다.

     

    “엘프의 땅이었네. 놈에겐 세계수의 가지가 필요했어.”

     

    “엘릭서가 나무 달인 물이었습니까?”

     

    내 농담에 시모어가 혀를 찼다.

     

    “예끼, 그리 단순할 리가 있나. 어디까지나 그가 필요로 한 건 마지막 재료야. 결국 놈은 엘릭서를 완성했어. 마시기 전에 내가 주둥아리를 태워버렸지만.”

     

    이프리트가 성질이 좀 더럽거든, 시모어가 킬킬대며 덧붙였다.

     

    “마침 나는 혼자였네. 정령과 친한 나만이 세계수에 가까이 갈 수 있었거든. 파티원들은 엘프들에게 막혀 대기하고 있었지. 내가 거기서 뭘 해야 했겠나?”

     

    “엘릭서를 제국에 반납해서 엄중히 보관하기요?”

     

    “당연히 꿀꺽했지. 놈이 바닥에 흘려 완성이 안 됐다고 거짓말하고 말이야. 나뭇가지야 어차피 사방에 널려서 재료로 썼는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되잖나.”

     

    시모어는 역사상 한 번 나타날지 어떨지도 모를 환상의 비약을 횡령한 경험담을 신나서 자랑했다.

     

    뭐, 사실 나라도 그 상황이면 시모어와 똑같이 행동했겠지.

     

    “그 연금술사가 또 만들어놓은 엘릭서는 없었을까요?”

     

    “불가능하다네. 경지에 다다른 연금술사 한 명이 만들 수 있는 엘릭서는 평생 단 한 개라더군.”

     

    “그렇군요.”

     

    “어디, 도움이 되었나?”

     

    내 상태창에서 텍스트가 반짝였다.

     

     

    ―――――――――――

    ◎ 연성 목록

    ……

    · 엘릭서 = ??? + ??? + 세계수의 가지

    [랭크 부족]

    ―――――――――――

     

     

    “덕분에 활로가 트였습니다.”

     

    “하하, 나도 대화 즐거웠네.”

     

    “아, 모처럼 도움 주신 김에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엇인가?”

     

    “혹시 그때 쓰시던 지팡이 있으시면 빌려주실래요?”

     

    대현자의 아크스태프.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어허, 거 참. 물에 빠진 놈 구해놨더니 보따리도 내놓으라는구먼.”

     

    어차피 나중에 가지러 올 건데 바로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이쪽이 강탈보다 양도라서 마음도 편하고.

     

    조금 뻔뻔하긴 해도 뭐, 현자님이시니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

     

    “세 번째 서랍 열게나.”

     

    시모어가 턱짓했다. 등 뒤에 있던 책장 아래를 여니 온갖 잡동사니 사이에 화려한 백금과 오리하르콘 재질의 지팡이가 내팽개쳐 있었다.

     

    조심스레 양손으로 집어든다. 보기보다 가벼웠다. 스태프가 생물처럼 마나를 휘감고 있는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No. 022 : 마법 승부 62% → 53%]

     

     

    사천왕 리치에게 패배했을 때 발생하는 엔딩의 확률이 감소했다. 내 추측대로였다.

    이걸 적절한 인물에게 넘기면 더욱 확률을 감소시킬 수 있겠지.

     

    “대의를 위해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그걸로 몇 개의 나라를 협박할 생각인지 원.”

     

    “아이쿠, 들켰네요.”

     

    “하하, 대가는 있어야지. 편히 자는 약이나 놓고 가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나는 시모어에게 수면제를 처방해주었다.

    그는 내게서 받은 알약을 바로 입에 털어넣고는 차를 꼴깍 삼켰다.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 시모어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

     

     

     

    “스승님이 뭐라셨어?”

     

    “자기 전에 양치질 잘 하래요.”

     

    “그건 네가 하는 말이고.”

     

    아셀라는 코웃음을 치고는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럼 돌아갈까.”

     

    “예.”

     

    아셀라와 보폭을 맞추기도 잠시.

     

    우리의 등 뒤에서 번쩍, 별안간 강렬한 빛이 일었다.

     

    몸을 돌린 우리를 마중하는 것은 하늘에 펼쳐진 일곱 개의 마법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성군처럼 쏟아지며 형상을 이루는 불의 대정령이었다.

     

    이프리트가 그 거대한 손으로 시모어의 집을 감싸니 꼭 장난감 모형 같은 착각이 일었다.

     

    “스승님.”

     

    호숫가에 조그마한 돌이 떨어져 파문이 일 듯, 아셀라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루어진 이프리트에게선 생명이 느껴진다. 그 손가락이 스쳐 지나가면 온화한 온도로 상냥하게 재로 만들어준다.

     

    시모어의 집은 금방 흩날려 불꽃과 섞여 보이지 않게 됐다. 이프리트는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가 향하는 언덕 아래 절벽, 그만큼이나 거대한 대정령이 넷 더 위치한다.

    마치 시모어에게 예우를 보이기 위해 자리한 것처럼 보였다.

     

    정령들은 위엄있게 고개를 치켜들고는, 존재 자체가 우리의 환상이었던 마냥 형태가 흐트러지며 자연 속으로 사라져갔다.

     

    “5대 대정령이 참석하는 장례식이라니.”

     

    세상 어떤 위인이 저렇게 삶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엔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았다.

     

    “라스.”

     

    아셀라가 정령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나에게 팔을 엮어왔다.

     

    나는 그녀가 몸을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받쳐주었다.

     

     

     

    ***

     

     

     

    “궁으로 돌아가면 왕국의 연무회부터 대응하려고 해.”

     

    마차에 탑승한 후, 아셀라가 그리 말했다.

     

    “중요한 안건이지요. 용사파티의 편성에 따라 추후 국제 정세에서 발언권의 무게가 달라질 테니까요.”

     

    “맞아. 연합군에 참가할 국가도 결정됐고, 여기서 용사파티의 후보가 정해질 테니 제국민을 최대한 많이 끼워 넣어야 해.”

     

    “제국민이라.”

     

    미래에서 용사 파티의 구성은 6인.

     

    리셰와 나, 네리아, 왕국 모험가 둘에 마도국 마법사 한 명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전원의 실력이 나쁘진 않았어도 최고는 아니었다. 진짜 최고 실력자들은 권력자에게 매수되어 그들을 비호했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편성됐다 보니 리셰와의 팀워크가 안 좋았다.

     

    ‘꼭 제국민이 아니어도 적임자로 편성하고 싶은데.’

     

    그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마왕군 승리]의 확률이 감소할 터다.

     

    ‘전위는 타냐가 맡는다 쳐도 궁수는 제국에 인재가 없지. 있다면.’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끝없이 펼쳐진 대수해가 눈에 띄었다.

     

    ‘엘프에서 찾아야 해.’

     

    그리고 시모어가 말했던 엘릭서의 재료 하나, 세계수의 가지.

     

    ‘세계수도 저 수해 안 깊숙한 곳에 있고.’

     

    나는 잠깐 고민을 마친 후에 아셀라에게 말했다.

     

    “황녀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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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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