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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7

        

         쾌적한 실내 온도, 현란하게 번쩍거리는 불빛, 그리고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함.

         세가지가 한데 어우러진 상태로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으려니 현실감이라는 게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야 물론 닫힌 문을 열기만해도 바로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쳐다보기도 민망한 환락 파티를 구경할 수도 있고, 조금 있으면 일하러 나가봐야 하는데도.

         

         언제까지고 외부와 단절된 이 밀실에서 모든 골치 아픈 문제를 외면한 채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폭풍 전의 고요도 평화의 일종이기는 하니까.

         

         쇼우는 어디로 갔냐고? 진작에 메인 홀로 내보냈다.

         정확히는, 여기서 한계까지 어리광부리려 하는 녀석을 나도 할 일이 있다는 명목으로 쫓아냈다.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나보다 수백 배는 많으면서 저렇게 책임감 없는 태도로 빈둥거리려 들어서야 원….

         

         …그냥 사적인 용무와 공적인 업무를 구분하고, 대하는 자세를 바꾸는 온 오프 스위치가 확실한 건 아니냐고?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헤실거리다 정색하다 하는 모습만 보다 보니까, 조울증이나 우울증이 심각한 환자처럼 여겨져서 영 확신이 안 들었다.

         

         떠돌이 용병 주제에 대기업 이사님을 걱정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만.

         

         “읏차…!”

         

         살짝 무릎을 당겼다가 허공을 차자, 탄성이 뛰어난 침대는 그 반동만으로도 누워있던 몸을 정자세로 바꿔주었다.

         

         푹신함보다는 탄력을 우선시한 이유는 아마 단순한 수면보단 땀이 막 흐르는 운동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 생각하니 소름 돋았다.

         인간과 성은 역사적으로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긴 한데, 이 동네 사람들은 틈만 나면 사사건건을 그런 쪽으로 해석하고 연관지은 결과물을 당당하게 내놔서 곤란하다.

         

         게임 자체는 분명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루터 슈터(Looter Shooter; 파밍 등의 롤플레잉 요소가 포함된 슈팅 게임)에 메인 스토리와 연애 시뮬레이션이 섞인 잡탕 장르였거늘, 역시 현실에서 성병 같이 체감하기 쉬운 말썽거리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는 건가…?

         

         …정작 원래의 나는 성병으로부터 가장 안전하고 거리가 먼 사람 중 하나였는데?

         하, 왠지 짜증나네….

         

         투덜거리면서 침대맡에 있는 냉난방 조절용 터치 패널에 손을 가져다 댄다.

         문 근처 벽면에 설치된 개폐 장치를 이용해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단순한 객실 잠금용 도어락 보다는 공기와 관련된 기계가 중앙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정신을 집중하고, 이미지를 구체화한 후… 스파크.

         

         파츠츳…!

         

         내면 세계에 깊게 매몰된 의식과는 반대로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지직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한줄기 섬광이 된 나의 의지가 회로를 타고 질주한다.

         

         육체가 남아있는 6번 객실의 에어컨(Air Conditioner)를 매개삼아 화재 감지용 센서에 도달.

         거기서 다시 인접한 회선을 이용해 별장 전체의 편의성 관련 요소들을 관리, 제어하는 스마트 홈 네트워크를 박차고 들어섰다.

         

         거의 대부분 조명의 색채와 밝기, 환기 강도와 필터 설정, 홈에 연결된 각양 각종 전자기기.

         저택의 환경을 구성하는 온갖 성분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손에 들어왔지만… 지금 찾는 건 보안 계통 설비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보물고다.

         

         당장 공격적으로 침투해서 선전 포고를 하려는 건 아니고, 어차피 본격적인 사교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게 우리에겐 더 유리했기에.

         미리미리 전장을 정리하는 겸 다방면으로 빈틈을 찾아보는 사전 준비에 가까웠다.

         

         만에 하나라도, 뒷말이 나오는 걸 감수하고 카사네가 꼬리를 말면 우리 입장도 애매해지는 만큼 일단 정식으로 행사가 열리길 기다렸다가 행동해야 한다는 게 카이쥰의 판단.

         

         저택 일각에서 멋대로 즐기고 있던 인간들도 한 번씩은 인사를 하고자 그녀에게 들릴 것이고, 이후에도 계속 대화를 나누길 원하는 인물들도 있을 터.

         이 많은 손님들이 그녀의 구속구가 되는 셈이라면… 꽤 나쁘지 않다. 감시역이 많으면 많을수록 허점이 줄어드니까. 거기까지 염두에 둔 건 대단하다.

         

         …그렇지만 카이쥰 놈은 지가 솜씨만큼이나 운도 좋은 줄 알아야 한다.

         

         하필 현장 기술자 노릇 좀 해달라고 부탁받은 내가 사이버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전공이나 전문 분야를 싸그리 무시하고 이것저것 전부 가능한 인재여서 망정이지, 누가 이딴 위험한 일을 공짜로 떠맡아.

         

         게다가 이런 복잡한 작전도 계획도 다 필요없이, 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카사네의 장부 같은 걸 모조리 빼낼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노력과 투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데….

         

         끽… 끼긱….

         

         “아, 이런 망할.”

         

         환청이 들렸다.

         격자가 어긋나고, 구조물이 삐걱거리며, 지탱하는 철근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 같은 파멸의 전조.

         

         그렇게 서버가 견디질 못하고 과부하 되려 하길래, 재빨리 연결을 느슨하게 풀어버리고 쏘아 보내던 신호의 강도를 숫제 없는 수준까지 줄였다.

         

         “씁….”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목을 긁적인다. 덤으로 혀도 좀 찼고.

         

        구체화된 이미지와 집중력만 받쳐준다면. 해킹에 관해서는 만능과 전능 사이의 경계선을 타는 내 능력도 한계는 있었다.

         아니, 능력 자체의 한계라기 보다는 오염시켜서 지배 하에 두는 네트워크나 점유한 회선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전송되는 정보량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구축 서버나, 수용치를 넘어선 데이터 방류에 흔들리는 네트워크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라나…?

         보라, 당장 이 패널도 그새 어디가 망가졌는지 미약한 연기자락이 위쪽으로 나오고 있지 않나?

         

         결국 단순한 에어컨을 경유하는 걸로 원거리에서 2차, 3차 시스템까지 파고 들은 다음 심처에 있는 카사네 소유의 전자기기들을 뒤집어 엎기엔 도중에 통로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뭐, 여태까지 전력 언저리로 능력을 발동했을 때 썼던 기기들이 다시 쓰기 어려울 정도로 작살났던 걸 고려하면 완전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

         

         애당초 내가 방출하는 전자 신호의 총 용량이 너무 큰 걸까…?

         실시간으로 바뀌는 사람의 의지를 데이터화 하면 과연 어느 정도의 저장 공간이 필요하려나… 이건 엘리시움이 잘 알 것 같네.

         

         그나저나, 이럴 줄 알았으면 중계탑으로 쓸 수 있는 제로를 밖으로 돌리는 게 아니었는데…!

         

         생각난 김에 전화를 건다.

         

         “…크흠! 바깥은 좀 어때? 아직은 조용해?”

         

         – 인근에 배치된 카사네 사장 휘하의 적대 예정 병력들을 감시 중입니다. 이쪽의 의도가 발각되거나, 전면전 개시되기 전까지는 실탄 사용은 고사하고 어떤 공격도 일절 금지된 상태인지라… 물론 아샤님이 명령하신다면 최대한 사살하며 전진하겠습니다. –

         

         “어…… 그냥 얌전히 기다려라 넌.”

         

         살짝 열었던 통신 채널을 다시 수신 전용 모드로 돌려버렸다.

         아무리 봐도 대치 상황에 손이 근질거리는 전투 병기를 불러들이는 건 옳은 선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딱히 박애주의자 같은 건 아니나, 과한 자기 방어(Self-Defense)가 더 큰 피해로 이어지는 게 뻔히 보이고. 굳이 직접 총칼을 휘두르지 않아도 내 안전이 보장된다면…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정답이리라.

         

         그러니 오늘, 이곳에서는 죽을 사람만 죽는다. 끝까지 발악하고 항전한다면 그럴 각오는 된 거겠지.

         ……밖에서 짐승처럼 헐떡이느라 바쁜 인간들은 좀 무고하게 휘말려도 괜찮다고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성적으로 문란한 게 죽을 죄는 아니니까. 뭐….

         

         하여간 어쩔 수 없다. 나 홀로 다 해결하기 힘들다는 걸 알았으니 얌전히 내부 카메라나 무력화하는 수준에서 만족해야지.

         

         삐릭.

         

         신설한 후 한번도 사용되지 않던 라인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발신자는… 카이쥰. 이것도 양반은 못 되네, 뒤에서 좀 씹었다고 바로 반응이 오는 걸 보면.

         

         [ 메인 로비에 카사네 사장이 돌아왔습니다. 활동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혹시라도 저희 쪽이 관련 증거를 조작했다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선에서. 깔끔하게 들어가서 장부만 확보하시면 됩니다. ]

         

         하, 말은 참 쉽게 한다.

         

         [ …요컨대 우리도 증거를 남기면 안 된다는 걸 너무 어렵게 말하네. 걱정 말지, 다 방법이 있으니까. ]

         

         퉁명스러운 대답만 대충 돌려주고, 다시금 만지작거리던 별장 경비 체계에 의식을 집중.

         미리 입수해서 슬쩍 훑어봤던 저택 설계도와 감각에 걸려드는 장비들을 차근차근 비교한다.

         

         아예 시스템을 망쳐버리면 약에 찌든 개새끼도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닫는 건 당연한 이치다.

         더군다나 아까 카사네의 사이버웨어로 들어가는 직통 데이터도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시도하는 무력화 방식은 탈취가 아닌 변조, 내 입맛대로 비틀고 위조한 동영상을 원본 데이터처럼 한 번 걸러서 메인 프레임에 업로드 되게 만들어낸 위장 필터를 덧씌운다.

         

         인식하는 색채는 검은색, 탐지하는 복장은 유카타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 내 전투 수트의 형상까지.

         이걸 전달받는 사람들이 몇이던 상관없이 잘못된 화상을 수령하도록, ‘아나스타샤’ 라는 개인이 찍힌 부분은 이전에 송출된 자료의 배경으로 대체되도록.

         

         현실에 존재하되, 전자기기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유령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그 유령 씨는 장부를 찾아서 제출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도망갈 예정이고. 흐흠…!

         

         왜, 뜻밖이라고? 잘 생각하면 이만한 찬스가 또 없다.

         본사에서 벗어난 이 절호의 기회를 내가 바보같이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모두가 카사네 사장 실각이라는 초대형 이벤트에 정신이 팔린 틈에, 그대로 도주하면 얼마나 찾아내기 힘들겠어.

         

         후처리? 그거는 원래 계약대로 카이쥰이 알아서 해야지! 그 정도도 못하지는 않아야 한다. 암. 이 정도면 아주 정당한 업무 분장이다.

       

         

         커스텀 필터가 제대로 적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선다.

         그러자 음성 증폭용 마이크라도 쓴 듯, 멀리서 어렴풋하게 카사네 사장이 환영 인사 겸 열렬한 오프닝 멘트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행동 개시다.

         순식간에 탈탈 털고 도망쳐주겠어…!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아주….

         

         “상임 이사님의 과분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극진히 모시겠소이다. 연구원 공.”

         

         “…아.”

         

         …맞다. 이 녀석 모습도 안 보이게 설정했어야 하는데.

         아니, 이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잖아. 야이씨….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같이 가는 건 분명 알았지만, 너무 인기척이 없어서 무심코….

    햐얌 님의 50코인, 50코인 연속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어제 연재분은 연참이 아니라 밀린 연재분 간신히 한 편 메꾼 걸로 거들먹거린 거였는데… 크흠;;
    ……헉! 혹시 이게 나쁜 남자의 매력??(절대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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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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