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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7

     [제국력 97년 8월 28일, 노스트럼 왕국 서부 지브롤터령. 리프트’역’.] 

     황제가 죽었다.

     어제, 아니 최소한 3개월 전에.

     유언은 남기고 죽었다.

     

     대략 ‘내가 죽더라도 제국민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라.’라는 뉘앙스의 말을 남기며, 자기 죽음을 숨기고 황태자가 천천히 즉위식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헛소리.’

     나는 안다.

     비록 이전에는 이런 경우는 없었지만, 이 모든 건 합스베르크가 짜놓은 판이라는 것을.

     유언은 조작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지는 추측만 할 뿐이지만, 아마도 ‘오오, 나의 사랑하는 이사벨라, 나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그대를 황후로, 크허억!’이라면서 죽지 않았을까.

     ‘차라리 나은 건가?’

     일국의 황제가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이 친아들의 아내를 상대로 불륜을 저지르다가 말 그대로 ‘복상사’하면서 남긴 단말마라면, 제국민들은 황실을 향한 존경이 줄어들 것이다.

     ‘적어도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보다는, 젊었을 때는 정복군주로 이름을 날리고 늙어서는 아들에게 전권을 넘겨준 군주로 평가받는 게.’

     이것은 합스베르크의 배려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합스베르크는 일부러 자기 아버지의 치부를 숨기고 업적만 드러냈다.

     그런 선황의 자리를 물려받은 위대한 황제.

     선황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륙을 통치할 것을 맹세하는 평화의 상징.

     제국과 왕국의 중심에 서서, 더 이상 인류에게 전쟁은 없을 거라고 모두에게 공표하며 대륙 전체의 지지를 받는 자.

     뒤로는 온갖 방법으로 노스트럼을 정복하려고 갖은 방면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합스베르크의 무서운 점은 평화통일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할 인간이라는 점.

     ‘근데 노스트럼의 국왕이 무능왕이잖아.’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다.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지금의 군왕인 이상, 평화도 통일도 어불성설이다.

     당장 지금 제국신문에서 공분을 사고 있는 이 문구만 봐도 그렇다.

     “세인트 국왕, ‘노인네가 참 오래도 살았다’ 발언 파문.”

     제국신문 2면에 대서특필된 이 따끈따끈한 문구를 보라.

     “연회장에서 황제의 서거 소식을 들은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 국왕의 발언이다.”

     제국신문의 언로를 통제하는 합스베르크, 그리고 합스베르크와 대외적으로 손을 잡은 에르윈 회장도 어떻게 거르지 못한 제국신문 편집장의 애국심을 보라.

     “해당 발언에 대하여 노스트럼 왕실에서는 이를 부정하였으나, 해당 발언에 대한 녹음 마석이 있다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해당 마석의 진위에 관해서는 현재 조사 중이다.”

     불륜을 저질러 복상사한 황제가 아닌, 노환으로 침대에 누워 운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제국의 백성들을 걱정하다 서거한 황제의 죽음에 대한 조롱에 분개한 충성스러운 제국 시민의 여론을 보라.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은 타국의 지도자가 사망한 사실을 조롱한 파렴치한 자일 것이다.”

     “2면입니까, 칼럼입니까?”

     내 앞에 마주 앉은 거구의 제복 사내, 로버트 세빌리야 경은 내가 읽고 있는 제국신문의 페이지를 슬쩍 살폈다.

     “2면인데도 기자 개인의 감정이 담는 겁니까?”

     “2면에다가 이런 문구를 남길 정도로 제국 시민들이 분개했다는 거지.”

     “이야, 우리 대ㅡ단하신 전하께서 또 한 건 크게 하셨네요.”

     “그래. 그래서 지금 나와 자네가 가는 게 아니겠나.”

     나는 로버트 경의 어깨에 걸린 휘장을 가리켰다.

     “외교사절과 그의 호위로서.”

     지브롤터의 제 1등 수호 기사를 상징하는 은색 휘장.

     지브롤터의 기사단장과 맞먹는 위치를 나타내는 이 휘장은 로버트에게 주어진 책임과 권한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나 또한 그러하다.

     나의 어깨에 걸린 견장과 그 아래에 달린 휘장은 각각 두 종류.

     하나는 지브롤터의, 그리고 또 하나는 오로솔 아카데미의 문장이 박혀있다.

     “노스트럼 왕가의 실언을 무마하고자 하는 외교적 수사로서, 친 제국적인 면모를 보이는 지브롤터 백작가의 장남이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축하를 전한다. 이 정도면 제국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겠지.”

     “분노를 다른 이슈로 덮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요?”

     “다른 이슈?”

     “가령, 지브롤터에서 출발해서 제도까지 가는 이 마도자동선이라거나.”

     로버트는 아래를 가리켰다.

     마도자동선의 아래에서는 마도 엔진이 마석을 태우며 바퀴를 굴리는 진동이 미약하게 전해지고 있었고, 바퀴는 정확하게 ‘레일 위’를 달리고 있다.

     “지브롤터의 장남이든 뭐든, 노스트럼의 사람이 마도자동선…아니죠. 이제는 이름을 달리 불러야 하겠군요.”

     로버트가 제국신문의 한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대륙횡단철도]를 타고 협곡의 세 관문을 지나, 핏빛 황무지를 거쳐 제도까지 [열차]를 타고 왔다. 테르시안 제국민들 입장에서는 막말로 백은 치사량에 오를 정도가 아닙니까?”

     “그런 위험하면서 저급한 단어는 어디에서 들은 건가? 그것도 제국신문에 나와 있었나?”

     “아이페리아 아웃렛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말하던데요. 노스트럼의 면모를 살필 때마다 자신들이 테르시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면서.”

     백은 치사량.

     로버트도 백은에 대해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공교롭게도 제국 청년들 사이에서 은은하게 도는 유행어처럼 널리 퍼져있는 단어다.

     “어디 가서 백은 이야기 함부로 하지 말게.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그걸 섭취한다고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저희가요, 아니면 그걸 말한 사람이 제 발 저려서요?”

     “둘 다.”

     즉, 잠깐 다른 소리를 하자면 백은은 제국 곳곳에 널리 퍼진 상황이다.

     “제국, 지금 생각보다 내부적으로 앓는 중인 모양이야.”

     

     백은을 향초로 태워 즐거운 꿈을 꾸는, 제대로 된 용법을 즐기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느냐 싶겠지만, 이미 백은은 제국의 일상생활에 녹아들어 버리고 말았다.

     “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는 겁니까?”

     “노스트럼 사람들의 일상에 백은이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거?”

     “그것도 시간 문제죠. 제국 여행을 하다가 어디 공짜로 주는 백은 사탕이라도 하나 잘못 빨았다가는 그대로 골로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저기 시찰이라면서 제국 구석에 갔다가 사탕 하나 빨고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어떤 기초군사학 교수처럼.”

     얼마나 제국 전체에 백은이 퍼졌는지, 오로솔 아카데미를 떠나 제국 전체 문화탐방은 나섰던 어느 한 노스트럼 충성병자가 그만 백은에 피폭되어 꿈속을 헤매고 있다.

     “그거, 본인이 한 거 아닙니까?”

     “설령 본인이 한 병 통째로 빨았다고 해도, 공식적인 외교활동으로 나선 외교관이니 나름대로 포장은 해줘야지.”

     “하하하…. 바이크 타다가 어디 자빠져서 죽어버릴 줄 알았는데.”

     “내 말이.”

     그 정도로 백은은 널리 퍼져있다.

     “누가 일부러 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백은이 널리 퍼질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일부러 맞아.”

     “…합스베르크 황제가 일부러 그랬다는 겁니까?”

     “아니.”

     백은을 퍼뜨린 건 황제의 의도가 아니다.

     정확히는 ‘이 정도’로 황실에서 통제하기 조금 짜증 날 정도로 많이 퍼진 건 합스베르크의 의도가 아니다.

     “제국도 제국 나름대로 지금의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거지. 가령 선황의 추종자들이라거나, 이사벨라 황태자비와 연대하기로 한 반란 모의 세력이라거나.”

     “혹시….”

     “죽기 전에 발악을 하는 거야. 정확히는 혼란을 야기하는 거지.”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반역으로 모가지 잘려서 형장의 이슬이 될 거라면, 백은을 뿌려서 제국에 혼란을 일으킨 다음 짐 싸 들고 도망가겠다.”

     “어디로…아니, 한 곳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

     현재.

     “반역자들의 잔당은 지금 노스트럼으로 망명하려고 온갖 발악을 하고 있지.”

     제국은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으나, 그 혼란도 나중에 지나고 보면 전부 ‘한 때’의 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황제가 죽고 나서야 도망치는 건 이미 늦었어. 합스베르크를 피해서 도망가려고 했으면, 오로솔 아카데미가 방학하기도 전에 도망갔어야지.”

     “그. 도련님. 질문 있습니다.”

     로버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합스베르크 황제가 정말 도련님을 배려해서 즉위식을 늦춘 걸까요?”

     “어.”

     “…왜요?”

     “방학 동안 아스타시아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미뤄달라고 내가 부탁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궁금하면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건 어때?”

     내가 밖을 가리키자, 로버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보고 직접 제국의 황제에게 물어보라는 겁니까? 사양합니다. 그냥 마음 깊이 묻어두겠습니다.”

     “흐흐. 별거 없어. 그레이 지브롤터를 사위로 만들면 노스트럼 전체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거든.”

     “……도련님을요?”

     “영광스럽게도 황제께서는 그레이 지브롤터를 노스트럼 정복의 핵심으로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야. 다른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든 말든.”

     이유를 붙이자면 적절한 이유가 여러 가지 덧붙여지겠지만, 합스베르크의 본심은 하나뿐이다.

     “합스베르크라는 인간의 마침표는 그레이 지브롤터라는 거지. 물론, 본인 생각이지만.”

     “…….”

     “하. 가기 싫군. 노스트럼의 대표라고는 하지만, 정말 가기 싫어.”

     “적진 한 가운데에 가는 거라서요?”

     “아니.”

     적진 한 가운데라는 표현은 맞지만, 로버트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노스트럼과 테르시안 사이의 500년 증오와 앙금과는 별개야.”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가면 내가 공공의 적이 될 가능성이 크거든.”

     * * *

     황궁, 대연회장.

     황제의 즉위식이라고 해봐야, 대관식이라는 명목으로 거리 행진을 하고 여러 가지 대관 의식을 펼치고 그러한 과정이 전부다.

     

     짧으면 하루, 길면 사흘에서 일주일.

     그동안 이루어지는 즉위식과 연회에 정말 많은 귀족이 참가하기 마련.

     당연한 문제다.

     일국의 귀족이 다른 행사도 아니고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다음 황제가 즉위할 때까지 불편하게 수십 년을 살거나 반란을 모색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얌전히 즉위식에 참석하여 들러리로서 손뼉을 쳐야 하는 게 인지상정.

     그래서 다들 모였다.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각계의 명사들, 심지어 제법 자본이 탄탄한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체의 사장이나 회장들도 다수 격식을 갖추고 즉위식에 참가했다.

     예상은, 그저 황제의 즉위.

     연회장의 중심, 계단의 위에 올라선 저자를 향해 예를 갖추라.

     “고맙소. 다들 이 자리에 모여줘서.”

     새롭게 월계관을 머리에 쓸 황제,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을 향한 만세 삼창과 끊이지 않는 손뼉 치기가 귀족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소개하지. 여기는 테르시안 제국의 황후, 에르윈 아이페리아. 이제는 에르윈 폰 테르시안이라고 불러야겠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점, 하나.

     “아이페리아의 회장이 황후가 되었다고…?”

     에르윈,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 회장의 황후 등극.

     “될 법하지. 아스타시아 황녀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가장 가능성 높았던 사람 아닌가.”

     “애초에 저렇게 똑같은데 어머니가 아닐 리가.”

     “자매일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자매 같은데.”

     “자매든 딸이든, 황녀 쪽이 훨씬 더 잘 자란 것 같은데.”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어느정도 있기는 했지만, 그 불만을 내뱉었다가는 다들 ‘이사벨라’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황후는 그렇다 쳐. 아이페리아의 돈을 국정에 동원하려면 회장을 황실의 편으로 만드는 게 좋을 테니. 하지만 그러면 황태자 자리가 비는 게 아닌가?”

     “황태자 자리 노리는 ‘하얀 그림자’들의 눈치싸움이 치열해지겠어. 여차하면 어머니조차 갈아치우는 것도 서슴지 않을 것 같은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페리아 회장에게 미리 잘 보여둘 걸.”

     연회장에 참가한 수많은 청년이 이를 악물었다.

     연회장에는 수상할 정도로 흰색 머리를 가진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 모두 신체의 절반 정도는 제국 황실의 핏줄을-당장 저기 있는 황제의 피를 타고났다는 걸 공공연하게 알고 있지만.

     “야. 한 번 가서 말해볼래? 내가 당신의 아들이다.”

     “모두의 앞에서 개쪽을 당하고 목이 잘리라고? 싫은데?”

     그 누구도 스스로 ‘황태자’라고 나서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안다.

     황제의 자식이라고 해서 전부 ‘황위 계승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황제가 인정한 자식은 오직 에르윈 황후의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백발의 여인,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뿐이라는 것을.

     “내일 있을 대관식에 앞서 이렇게 연회를 마련한 것은….”

     위이잉.

     연회장의 입구, 아래에서 올라오는 승강기를 통해 붉은 정장의 청년이 호위와 함께 도착했다.

     회색 머리칼.

     최대한 바른 자세를 잡고 있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듯 오른손으로 짚고 있는 지팡이.

     “…노스트럼의 대표, 입장합니다.”

     청년을 본 연회 책임자, 황궁의 정무관이 연회장을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레이ㅡㅡ! 지브롤터ㅡㅡㅡ!!”

     연회장이 떠나갈 만큼, 청년의 이름을 누군가가 외치며 반겼다.

     “어서 오시게!”

     황제가.

     “나의, 황궁에.”

     두 팔을 벌리며 직접 계단을 내려가, 연회장을 찾은 청년을 맞이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도 않는 황제가 적국 변경백 장남을 아들처럼 반기는 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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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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