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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애쉬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까지 걸어온 앨리스와 실비아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미 한번 지독할 만큼 칼을 맞대 본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서로의 역량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은 필요하지 않았다.
차갑게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으나 정작 머릿속에선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싸우면, 실비아가 진다.
“쳇,”
실비아는 작게 혀를 찼다.
한번 끔찍하게 뭉개놓은 적 있는 상대였지만 이미 지난번과는 너무나도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실비아가 숲속에서 박혀 지내던 동안 이단심문관으로서 지내온 앨리스는 이미 용사 파티 면접에 떨어지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무력을 쌓아왔다.
물론 그녀의 기량이 실비아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용하는 검술이 너무나도 달라, 두 사람의 실력을 일대일로 비교하기엔 어렵겠지만, 그래도 굳이 기량에 우위를 정해본다면 실비아가 근소하게 앞서는 정도였다.
용사라는 이름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싸움에서 앨리스가 패배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실비아의 실력보다는 그녀가 저주에 의해 보호받는 신체라는 점 때문이었다.
‘마왕을 잡기도 전에 나를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저 검은… 나를 죽일 수 있겠군,’
실비아는 앨리스의 손에 들린 성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신체를 해치는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는 저주.
눈을 통해 인간들을 광증으로 전염시키는 이 저주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 죽지 말고 숙주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라는 마왕의 역겨운 치밀함이 만든 저주였다.
덕분에 실비아는 마물과의 싸움에서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 본질이 저주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날카롭게 벼려낸 신성력이자, 여신의 손톱이나 다름없는 저 성검이라면, 실비아의 저주를 해주 할 수는 없어도 저주를 뚫고 실비아의 복부를 꿰뚫는 정도는 가능했다.
실비아는 얼마 전, 앨리스가 저 검을 자신의 목에 들이밀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피 한 방울 나지는 않았지만, 분명 앨리스의 검 끝은 실비아의 목에 가볍게 닿았었다.
닿았다는 것부터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의 몸에 다가오는 위협적인 날붙이는 모두 새카만 잿가루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앨리스가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실비아의 목을 떨어트릴 수 있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에, 나는 저년을 죽일 수 없고…‘
앨리스는 형태 없는 고깃덩이가 될 때까지 뭉개놔도 몸을 회복하는 괴물이었다.
앨리스와 실비아, 조건은 다르지만 둘 모두 살해당하지 않는 불사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중 실비아의 것이 먼저 파훼 되어 버린 것이다.
그에 반해 앨리스의 불사성은 여전히 건재했다.
저 빌어먹을 심장은 언제 그녀의 몸을 태워버릴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터지기 전까진 결코 주인을 죽이지 않는 최강의 방패이기도 했다.
“죽이지는 않겠다.”
한참이나 지속되던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앨리스였다.
앨리스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베고 팔다리를 모조리 뜯어낸 후, 다시 붙여주지.”
앨리스의 도발에 실비아는 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네 뇌를 완전히 뭉개서 네 가망 없는 사랑을 도려내 줄게.”
“혼자 있는 애쉬가 신경 쓰이니까 빨리 시작하지.”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운 도약과 함께 날카로운 금속이 맞부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두 사람의 검격이 사방을 휘저었다.
주변의 풀이나 나뭇가지는 모두 베여 바닥에 나뒹굴었다.
서로 상대에게 바닥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밟아 헛디디기를 유도해보기도 했지만, 실비아는 자신의 발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렸고, 앨리스는 모조리 피해버리기에 소용은 없었다.
한참을 맞부딫히던 두 사람 중 먼저 물러선 것은 실비아였다.
뒤로 크게 스텝을 밟으며 잠시 숨을 고르는 실비아의 몸은 수많은 생채기에서 흘러나온 피로 뒤덮여 있었다.
“젠장,”
정작 베기는 실비아가 훨씬 많이 베었다.
한번은 앨리스의 팔을 절단시키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묵직한 칼날이 앨리스의 뼈와 살을 끊어내도, 칼이 그녀의 몸을 빠져나오는 즉시 도로 붙어버린다.
반면에 실비아는 착실히 몸에 수많은 피해를 쌓아갔다.
치명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지만, 조금씩 회피가 늦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너무 오래, 저주를 달고 살았네…”
실비아는 자조적인 말을 뱉으며 피식 웃었다.
지난 몇 년간 저주에 의해 보호받다 보니 버릇처럼 회피를 등한시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앨리스는 천천히 검을 쥔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가 봐. 성검은 무고한 인간을 벨 수 없다는데, 넌 아주 잘 베이는 걸 보면 네년은 이미 저주 그 자체나 다름없다는 뜻이지.”
“…”
“그런 너한테 애쉬를 빼앗겨야 하는 내 심정은 어떻겠어?”
“빼앗기다니, 애쉬는 한 번도 네 것인 적이 없었는데?”
“…”
앨리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이빨을 갈더니 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방금 실비아의 도발이 꽤 잘 먹힌 모양이었다.
실비아는 그 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애쉬가 사랑하는 건 나인데,”
“… 닥쳐.”
“나를 이겨서 뭘 하겠다고? 정신 승리? 나를 꼼짝 못 하게 해서 뭐, 애쉬한테 고백이라도 할 셈이야?”
“닥치라고 했다.”
“애쉬가 어떤 아이인지 잘 알잖아. 그 착한 애가 나를 두고 네 고백을 받아주기라도 할 것 같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군, 그 쓸모없는 귀때기를 도려내도 되겠지.”
“해봐, 몰래 숨어서 자위나 하는 패배 견아.”
“이 개새끼가!”
실비아는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앨리스는 실비아의 시야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저급한 도발에도 분노로 들끓어 오르는 심장.
하, 어찌나 간단한 상대인지.
실비아는 검을 틀어 몸의 옆면을 보호한 채 도발에 넘어간 앨리스를 비웃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귀를 공격하겠다고 그렇게 당당히 밝히는 앨리스가 가소롭기까지 했다.
한 번만 막아내면 된다.
한 번만 막아내면 그대로 검을 얽어 앨리스의 몸 중앙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을 수 있다.
애초에 앨리스의 성검보다 실비아의 검이 훨씬 길고 무겁기에 그대로 앨리스의 몸을 세로로 두동강 내 버릴 수도 있다.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그 정도면 승패는 갈린다.
이만큼이나 유리한 조건에서 그런 굴욕스러운 패배를 당한다면 제아무리 앨리스라 할지라도 별다른 변명조차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온다.’
앨리스의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실비아는 그대로 반격할 준비를 취했다.
그러나, 앨리스의 검은 자신의 옆을 향해 날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중앙,
실비아의 복부를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아!”
실비아는 탄식이 섞인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젠장, 이건 당했다.
피할 수 없다.
앨리스, 이 간악한 년.
도발에 넘어간 척 속이고 똑바로 복부를 노려오다니!
실비아는 이빨을 꽉 깨물며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툭,
“어…?”
“뭐지?”
그러나, 앨리스의 검은 실비아의 복부를 꿰뚫지 못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지른 검은 가벼운 소리와 함께 실비아의 복부를 툭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앨리스도 실비아도 갑작스레 벌어진 상식 밖의 현상에 얼빠진 소리를 내며 당황해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실비아는 앨리스를 발로 밀어내며 뒤로 굴렀다.
앨리스도 뒤로 나뒹굴다, 다시 몸의 균형을 잡은 채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뭐야. 뭘 한 거야.”
“… 너야말로 왜 공격을 멈춘 거지?”
“내가?”
“… ?”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비아가 막아낸 것이 아니다.
앨리스가 멈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애쉬가 이 광경을 보고 두 사람의 싸움을 멈추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애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아,”
그 순간, 앨리스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얼빠진 소리를 내며 성검을 떨어트렸다.
“아아… 안돼. 설마…”
떨어트린 것은 검뿐만이 아니었다.
앨리스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뭐야… 무슨 속셈이야.”
실비아는 그런 앨리스를 향해 검을 겨누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녀의 눈에 현재 앨리스의 모습은 명백히 이상했다.
“아냐…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싫어. 싫어… 안돼.”
바닥에 꿇어앉은 채 멍하니 실비아를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안돼 라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는 앨리스.
실비아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러워했다.
혹시 지금이 그 순간인가?
그녀의 심장이 폭발하는?
앨리스가 죽는?
실비아는 천천히 앨리스를 향해 다가갔다.
“…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이 미친년아. 설명해.”
“하… 아, 아하하하!”
이번엔 또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앨리스의 모습에 실비아는 기겁하며 검을 겨누었다.
혹시 모를 폭발의 위력에 몸을 웅크리며 앨리스를 노려보는 실비아.
앨리스는 그런 실비아를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숙였다.
“… 하, 하하하… 쫄지 마. 병신아. 지금 죽는 거 아니니까.”
“뭔데 그럼. 갑자기 왜 발작이야.”
“… 하, 시발… 하하하”
“그만 쳐 웃고 설명해!”
앨리스는 말없이 실비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실비아의 몸을 가득 메우던 상처들이 말끔하게 사라져갔다.
실비아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앨리스를 내려다보았다.
“… 성검은 무고한 이를 벨 수 없어.”
“뭐?”
“마족이나 언데드와 같은 온갖 삿된 것들이나 끔찍한 죄인이 아니면 벨 수 없다고.”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주에 의해 보호받는 실비아를 벨 수 있는 유일한 검인 성검은, 아이러니하게도 실비아가 그 저주에 오염되어 있기에 벨 수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앨리스를 위해 검의 형태로 변했을 뿐, 원래는 검이 아닌 성녀의 지팡이였던 성물.
그것은 무기라기보다는 오직 여신의 뜻에 반하는 존재만을 불태우는 신성한 불길이요, 악을 향한 여신의 손톱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게 뭐.”
“병신같은 년, 이해가 안 돼?”
“뭐, 내가 무고하다고? 지금까지 잘만 베어놓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저주에 걸려있으니까 벨 수 있다며, 뭐 베는 건 괜찮고 찌르는 건 안 돼?”
“대가리를 굴려 봐. 이 개 같은 년아.”
“… 아,”
“…”
“아아… 아아!”
실비아는 환희가 섞인 외침과 함께 앨리스처럼 검을 떨어트렸다.
그녀 역시 조금 늦었지만, 앨리스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아… 아앗, 그렇구나…”
배다.
성검은, 실비아의 배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 아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 빌어먹을,”
“아아아아아! 으읏,”
“씨발, 씨발!”
몸을 부르르 떨며 환호하는 실비아의 탄성을 듣던 앨리스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인 얼굴로 바닥에 엎드린 채 미친 듯이 땅바닥을 내려쳤다.
주먹이 부르트고 핏방울이 튀어 오르도록, 회복되는 속도보다 자기 손이 부서지는 것이 더 빠를 때까지 미친 듯이 두드렸다.
마치 마음속의 고통을 육체의 고통으로 잊으려는 듯 머리를 쥐어뜯고 바닥에 이마를 연신 찧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런 앨리스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황홀한 표정으로 자신의 온몸을 끌어안았다.
요염한 손길로 양팔과 양쪽 뺨, 허리와 어깨를 순차적으로 매만지던 실비아의 두 손은 천천히 그녀의 복부로 다가갔다.
실비아는 자신의 탄탄한 복부를 사랑스러운 듯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내 아이…”
“…”
“애쉬와 나의 아이가! 내 뱃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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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두삼 님 50 코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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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애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