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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8

       살이 비치는 전신 스타킹에 가슴 부위만 간신히 가리는 짧은 조끼와 허벅지를 다 드러내는 반바지.

       타는 듯한 긴 붉은 머리카락에 사나운 눈빛과 날카로운 턱선.

       교복점에 들어온 것으로 봐서 아마 자신과 같은 또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태도로 보건대 그녀도 자신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마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넌 누구야?”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그러나 거기에 무시하거나 경계하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호기심에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카렌은 이상하게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답했다.

         

       “나? 나, 나는 카렌이라고 하는데……너, 너는?”

       “마야.”

       “예, 예쁜 이름이다……하하. 나는 이번에 레카체프에 청강생으로 들어가는데……너도 그래?”

       “응.”

         

       그렇게 둘은 몇 마디 더 말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소속은 어딘지.

       재주는 뭔지.

       어떤 수업을 들으려 하는지.

         

       카렌은 그녀와 말을 나누며 점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야는 지금까지 그녀가 마주쳤던 어떤 여자애들과도 달랐다.

         

       카렌이 처음부터 또래 여자애들을 어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10살까지만 해도 다른 서커스단의 여자애들과 종종 어울리곤 했다.

       그녀는 그럴 때 평소대로 남자애들을 대하는 것처럼 짓궂은 말을 던지며 털털하게 행동했다.

         

       아무런 악의도 없었다.

       그저 친해지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접근을 상대 여자애들은 경계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품평하는 듯한 눈빛을 던지며 선을 그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그렇듯 그녀는 그런 은근한 사회적 신호를 눈치채지 못하고 혼자 신나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화장실을 다녀오던 중, 걔들이 자신의 험담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남자애들이랑 같이 자고 목욕도 같이하는 이상한 애라고.

       하는 말이나 행동도 어딘가 모자란 것 같다고.

       일부로 눈치 없는 척 연기하는 거라고.

         

       욕이나 상처 주는 말이야 남자애들하고도 자주 주고받는 것이었다.

         

       -뭐래! 나 연기하는 거 아니거든!

         

       카렌은 그렇게 난입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넘겼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어떤 작용을 했음은 틀림없었다.

         

       이후로, 그녀는 다른 여자애들과 마주하면 흠칫 떨게 됐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농담이라도 뭔가를 지적하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주눅이 들었고, 그녀들이 자기네들끼리 속삭일 때마다 자신을 두고 뒤에서 욕을 하는 것처럼 긴장했다.

       여자애들이 호의를 가지고 다가와도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기 일쑤였다.

         

       머리가 큰 지금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걔들은 왜 그랬는지 머리로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자애들 앞에 서면 몸이 본능적으로 얼어버렸다.

         

       그러나 마야에게서는 그런 보통의 여자애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마야는 무뚝뚝하게 할 말만 했다.

       사람이라면 보통 뿌리고 다니는 사회적 신호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무감정해서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지만, 카렌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트라우마 스위치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넌 곡예에 대해 거의 모른단 말이지?”

         

       카렌은 마야가 전문 곡예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자 조금 자신감을 얻었다. 상대에게 가르쳐 줄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 몰라.”

         

       마야가 조금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자신을 지나치려 하자, 카렌은 당황했다.

         

       “아냐, 아냐. 널 깔보는 게 아니라…….”

         

       카렌은 그녀와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짜내 말을 꺼냈다.

         

       “도,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나는 4살 때부터 재주를 익혔거든……. 내, 내가 널 좀 도와줄까? 수강 신청이나 교보재 구매도! 너는 잘 모른다며…….”

         

       그녀의 말에 잠시 뭔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던 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냈어.

       카렌은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저, 정말 괜찮아? 하지만 너희 서커스단에는 다른 애들 없어? 나랑 다녀도 돼?”

         

       그 말에 마야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단장.

       그녀는 서커스를 잘 알고 자신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것이다.

       학교 안에서도 얼마든지 편의를 봐줄 것이다.

         

       그러나 마야는 그녀의 도움을 받기 싫었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있지만 별로 안 친해.”

         

       그녀는 아까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엘라는 입을 벌려 밥을 떠먹여 달라고 하고 있었다.

       단장님에게!

         

       마야는 순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기억을 잃은 뒤로 단장님에게 엉겨 붙는다지만, 저런 걸 요구하다니.

         

       그녀는 원더스타인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한 마디 해주세요, 단장님. 이건 아니라고.

         

       그러나 그가 행한 것은 그녀의 요구에 대한 질책이 아니었다.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수저를 들어 그녀의 입에 음식을 떠먹여 주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그가 어미새처럼 음식을 내밀 때마다 엘라는 아기새처럼 받아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특별히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엘라도 몇 번 먹더니 영 음식 맛을 느끼기 힘들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만둬버렸다.

         

       하지만 그 몇 번의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마야를 괴롭혔다.

         

       그녀의 마력이 또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엘라의 얼굴에 음식을 내동댕이치려는 염동력을 내버려 두고 싶었다.

       레이나의 케이크처럼.

         

       그러나 단장님 앞에서 같은 짓을 벌일 수 없었다.

       아무리 너그러운 그분이라도 이번에는 화를 낼지 몰랐다.

       그녀는 힘을 억제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며 두 사람이 사이좋게 식사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앗, 교복이 나올 시간이네.”

       “그럼 저녁에 봐요, 마야 양.”

         

       둘은 마야의 심정을 모르는 것처럼 팔짱을 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떠났다.

         

       마야는 둘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원더스타인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또 무산되었다.

       정리하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파피락스는 더욱 강해졌다.

       방금의 염동력은 그녀가 상당한 정신력을 동원해야 억누를 수 있었다.

         

       마야는 주인 할머니가 위로의 의미로 가져다준 음료수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왜 단장님은 엘라에게 그렇게 무르게 대할까.

       왜 단장님은 레이나와 그렇게 빨리 가까워졌을까.

         

       외모일까.

         

       마야는 가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소녀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내가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예쁘다는 말을 종종 듣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알았다.

       단장님의 눈에는 자신이 아주 못 생기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단장님은 건강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엘라와 레이나의 신체 능력은 발군을 자랑했다.

       둘은 또래 곡예사 중에서는 견줄 자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에 비해 자신은 단원들의 기초 체력 훈련도 쫓아가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병약한 건 베르그송 자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직사광선을 쐬고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건강이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마야는 갑자기 계시를 얻은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엘라와 레이나의 공통점.

       원더스타인이 좋아하는 것.

         

       답은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곡예!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단장님이 그 둘을 아끼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마야는 지금까지 단장님을 획기적인 마법을 개발한 학자, 사신을 어비스로 돌려보낼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도사로 여겼다. 그래서 자신도 그쪽으로 인정받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원더스타인이 어디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던가?

       그는 그런 힘을 가지고도 서커스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능력으로 왜 서커스 같은 데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야는 그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도 IMT로 가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환상 마법에 매진하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그분이 중요하고 좋아하는 것을 자신이 지금까지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기초 연습도 힘들다고 빼버리고, 기본적인 곡예를 익히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장님이 자신을 제자로 여기지 못하는 것도,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곡예를 익힌다면?’

         

       신체 능력으로 엘라나 레이나 같은 애들을 쫓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들에게 지지 않는 능력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입학시험에서 교감이 얘기했던 SPECIAL에 대해 떠올렸다.

       거기서 P는 인지력(Perception)을 의미했다.

         

       동체를 포착하고, 거리를 계산하고, 손끝의 미세한 힘을 배분하는 능력.

         

       그것만은 마야가 엘라보다 더 뛰어나가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연히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당 곡예가 저절로 터득되는 건 아니었다.

       기초 정도는 누군가에게 배워야 했다.

         

       엘라나 단장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혼자 익혀서 반드시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단장님도 자신을 다르게 볼 것이다.

         

       어쩌면……

       레이나처럼…….

         

       -마야 양, 오늘 밤 곡예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겠습니까? 제 침실로 오시죠.

         

       잔을 쥔 마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타올랐다.

         

       단장님의 앞에서 옷을 벗던 레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기 자신이 선다면…….

       속옷만 남은 나체의 자신 뒤로 단장님이 다가와…….

         

       “마야?”

         

       주인 할머니의 부름에 그녀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녀가 든 컵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솟고 있었다.

         

       그녀의 염동력이 음료에 압력을 걸어 그것을 얼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동시에 엄청난 응고열이 방출되며 컵을 뜨겁게 달구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염동력으로 재빨리 테이블을 정리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그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래. 이건 분명 시네페쿠스가 내 귀에 속삭인 거야.

       심마가 더 날뛰도록.

         

       그녀는 마음을 비웠다.

       이런 속삭임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수도자들과 학자들이 빠지는 함정이었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면 안 됐다.

       단장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려는 것은 신비를 이해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마음의 도화지를 채워 그녀의 마법적 밑바탕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녀는 카페를 나와 학교 앞 거리로 향했다.

         

       레카체프의 청강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하려고 해도 자신은 아는 게 없었다.

       단장님이 청강을 들어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을 때, 그녀는 관심 없다고 일축했다.

         

       그렇다고 지금 숙소에 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도 싫었다.

       단장님과 부단장이 도와준다고 나설 것이고, 자신은 또 뒤에 멍하니 둘이 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지도 몰랐다.

         

       그나마 엘라가 아까 교복 얘기를 했기에 옷가게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도와주겠다는 애가 나타났다.

         

       “일단 교복부터 사자. 우선 체육복은 여기서 구해도 운동화는 다른 곳에서 맞춰야 해. 너 발은 몇 신어?”

         

       카렌.

       그녀는 아까 전의 쭈뼛거림은 연기인 것처럼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파파엘 서커스 소속이라고 밝혔다.

       그곳은 그녀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루즈에서도 지나가다 마주쳤었고, 크리스티앙 가이드로부터 별을 1개 받은 곳이었기도 했다.

         

       쓸 만한 애였다.

       마야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카렌의 급변한 태도는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이것 좀 봐. 너는 길들이기 할 생각 있어? 나는 예전부터 동물을 키워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녀는 마야가 반응하든 반응하지 않든 신나서 떠들어댔다.

       단답형 대답이나 무심한 시선도 받고도 좋다고 웃어댔다.

       조금 지칠 정도의 텐션이었다.

         

       그러나 마야는 그걸 성가시다거나 짜증 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답할 만한 질문이면 답을 했고, 아니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다행히 길들이기는 마야도 말을 할 거리가 있는 주제였다.

         

       “고양이는 키워본 적 있어.”

         

       마야의 말에 카렌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은 어떤 동물을 키워보고 싶었다는 둥 또 한바탕 말을 쏟아냈다.

         

       10월에 있는 예선전 시합까지 앞으로 한 달 반 정도.

       마야는 그렇게 길지는 않을 인연이라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카렌의 캐릭터를 확실히 잡고 가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내일부터 연재에 조금 더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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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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