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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8

    흐릿한 시야 속에서, 전혀 모르는 장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꿈속인 것을 깨달았지만, 꿈이라기엔 조금 이상한 꿈이었다.

    꿈속의 세계는 시간이 앞뒤 구분 없이 엉망진창이고, 1,000배속은 되는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워있는지 서 있는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한없이 희미한 의식을 가지고 바람처럼 흘러 다니는 기분이었다.

    꿈속의 내가 보는 세계는 소원과 소망 그리고 염원으로 가득 찬 바다와 같은 느낌이었다.

    뒤죽박죽인 세계 속에서 하늘만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꿈속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날고 싶어도, 너무 많은 것들이 나를 지면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원망과 소망, 희망과 절망.

    그런 나에게 어떤 염원이 들려왔다.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신은 재앙과 마찬가지야.]

    [신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꿈속의 나는 희미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 염원만은 왠지 기억에 남았다.

    ***

    이상한 꿈을 꾸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평소대로의 격리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둡고 아늑한, 편안하고 마음에 드는 격리실.

    얼굴 위에 잔뜩 달라붙은 미니 사신들을 떼어내서 침대 위에 올려두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격리실 천장 근처에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주황 사신들이 있었다.

    분명 이상한 꿈을 꾸게 된 이유는 저 아이들 때문이겠지.

    괜히 심통이 나서, 주황 사신을 하나 잡아서 간지럽혔다.

    주황 사신은 솜뭉치처럼 몸을 숨기고 다니는 만큼 민감한지, 황금 사신보다 훨씬 간지러워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빗자루로 날아다니는 푸른 사신 때는 이렇게까지 부럽지는 않았는데, 주황 사신은 이상하게 부러웠다.

    맨몸으로 그냥 날 수 있어서 그런가?

    주황 사신을 계속 간지럽히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황금 사신보다 훨씬 말랑말랑한 것 같은데?

    설마?

    간지러워하는 주황 사신의 솜뭉치를 마구 파헤치자, 주황 사신은 간지러운 것처럼 웃으면서도 머리카락으로 자기 몸을 자꾸 숨기려고 했다.

    주황 사신의 능력인지 격리실 내부의 물건들이 자꾸 쓰러지는 등 여러 가지 방해가 들어왔지만, 결국 주황 사신의 몸을 머리카락 속에서 꺼낼 수 있었다.

    드러난 주황 사신의 몸은 다른 미니 사신들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황금 사신보다 조금 큰 신장.

    그리고 좀 더 좋아진 몸매.

    요정처럼 작은 점만 빼면 엄마인 나랑 비교해도 훨씬 굴곡진 몸매였다.

    어째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골라서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괘씸한 주황 사신을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 간지럽혔다.

    ***

    오대산에 위치한 한 마을.

    그곳으로 트리니티 소속 차량이 잔뜩 들어오고 있었다.

    제2 연구소장은 그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1 연구소장이 어딘가에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알아낸 뒤,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 내려온 것이었다.

    제1 연구소장이 남긴 위험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찾아온 마을이었지만, 마을은 여기저기 박살 난 점을 제외하면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후우, 다행이군. 제1 연구소장이 남긴 무언가 때문에 사건이 터지면 골치 아팠을 텐데, 아무것도 없군.”

    오히려 약간의 득을 본 셈이었다.

    마을 근처에는 오브젝트를 격리하기 위해 만든 고가의 합금 격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장부를 확인해 보면 제1 연구소에서 반출된 설비였다.

    “그나저나, 이 마을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외부와의 교류도 없고, 농사도 짓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비서로 보이는 남자는 보고서를 넘기면서 대답했다.

    “약간 터무니없는 증언들뿐이라서,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증언들? 어떤 증언들이었길래 그래?”

    흠흠, 목을 가다듬은 비서는 대답했다.

    “숲으로 나가면 먹을거리가 널려있었다고 합니다. 야생 동물이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져 죽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터무니없는 의견이야. 오히려 그래서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군. 오브젝트인가?”

    비서는 보고서를 몇 장 더 넘기면서 대답했다.

    “주민들은 ‘주황색 달의 가호’라고 말하더군요.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나고, 배를 곯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2 연구소장은 비서의 보고서를 넘겨받더니, 빠른 속도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닮았군.”

    보고서를 살펴본 제2 연구소장은 ‘주황색 달의 가호’가 회색 사신의 능력과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호의 아래에서는 길을 가다가 열매가 떨어지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서 동물이 죽었다.

    회색 사신이 싱크홀을 일으키고, 동물의 죽음을 인도하던 것과 굉장히 비슷해 보였다.

    회색 사신은 파괴나 죽음만을 인도했지만, 주황색 달은 좀 더 이로운 쪽으로 확률을 비틀었던 것으로 보였다. 

    구름 고기가 살던 마을. 

    세희 연구소에 나타난 구름 고기.

    그리고 회색 사신과 닮은 능력을 가진 주황색 달.

    제2 연구소장은 왠지 우연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이 마을의 노인네들은 서울로 이주시켜야겠지. 주황색 달이 없어졌는데, 여기서 살다가는 오브젝트에 비명횡사하기 딱 좋아.”

    제2 연구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보고서를 비서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차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

    김중뢰 선배가 어딘가로 나간 틈을 타서, 사신이의 격리실로 도망쳐 왔다.

    언제나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격리실에는 뭔가 축 늘어진 사신이가 침대에 달라붙어 있었다.

    뭔가 의욕을 잃어버리고 침대와 동화된 것 같은 사신이를 품에 안고, 푸딩을 조금씩 떠서 먹여주었다.

    옴뇸뇸.

    사신이는 푸딩을 먹고, 나는 사신이 더듬이를 먹는 공생 관계의 성립이었다.

    구름 고래랑 같이 사라진 뒤, 돌아와서는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TV에서는 요즘 기승을 부리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들어봐도 터무니없는 종교였는데, 그렇게나 믿는 사람이 많다니.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번지고 있다는데, 해외여행이 힘들어진 요즘 시대에 신기한 일이었다.

    “역시 오브젝트랑 연관된 일이겠지?”

    사신이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푸딩만 냠냠 먹고 있었지만, 내 입속에서 흔들리는 더듬이의 방향을 보면 확실히 관심은 있어 보였다.

    저 사이비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볼 수 있게 했다고 소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브젝트도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머리 한쪽에서는 될 가능성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건가? 

    뭐,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모두 함께 동반자살 하자는 종교보다는 낫긴 한데, 과연 저 종교는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신이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생각보다 금세 없어질 수도 있고 말이다.

    TV를 보면서 사신이와 평온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도중, 격리실 문이 열리며 세희 언니가 뛰어 들어왔다.

    세희 언니는 뭔가로부터 도망쳐 온 듯한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세희 언니?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그때 세희 언니의 뒤를 이어서 서아 언니까지 격리실로 들어왔다.

    “이세희 소장님! 도대체 이게 뭔가요?”

    서아 언니가 보기 드물게 화가 나 있었다.

    저 정도 분노면 설마 횡령?

    서아 언니가 휘두르는 종이를 힐끗 쳐다보자, 잠깐이었지만 대충 내용을 볼 수 있었다.

    토지 구매 관련 서류 같은데, 세희 연구소 이전이나 확장 공사를 하게 되는 걸까.

    “회색 사신 테마파크를 만든다고, 시세의 몇 배나 주고 땅부터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우리 연구소 수입으론 공사를 시작하려면 20년은 걸려요!”

    “대출받아서 지으면 돼! 회색 사신이는 인기가 많으니까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서아 언니는 세희 언니의 터무니없는 소리에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가 연구소에 빨간딱지가 붙는 거 아냐?

    왠지 불안해졌다.

    ***

    협회 직원이 건넨 종이는 요즘 유행한다는 사이비 종교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주의 사항과 전도 수법 등이 잔뜩 적혀있었다.

    레이첼은 그 종이를 받자, 긴장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황금 사신이를 잡으러 온 게 아니구나.’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협회 직원은 전단지를 레이첼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요즘 이 근처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많아져서, 실종자 확인 겸 주의 사항을 배포 중입니다.”

    그리고 협회 직원은 보고서를 넘기면서 뭔가를 확인하더니, 엄중한 말투로 말했다.

    “실종자를 되찾아 오겠다고 직접 사이비 종교를 찾으러 다니는 분들이 자주 보입니다만,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니까 절대로 그러지 말아 주세요.”

    협회 직원은 그렇게 찾으러 나간 사람들도 대부분 실종자가 되어버렸다고 작게 덧붙였다.

    “그럼, 레이첼. 협조에 감사합니다.”

    협회 직원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천천히 떠나갔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자, 문득 레이첼의 마음속에 불안이 자리 잡았다.

    ‘설마 우리 엄마 아빠가 사이비 종교에 넘어가진 않았겠지?’

    레이첼은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서 사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레이첼은 절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이 펴지지 않고 있었다.

    사라졌던 황금 사신은 어느새 레이첼의 어깨 위에 나타나서, 레이첼의 볼을 토닥이고 있었다.

    작은 손바닥을 활짝 펴고, 슬픈 표정으로 때찌때찌.

    ‘불안해하지 마, 내가 있잖아!’

    황금 사신은 말은커녕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레이첼은 황금 사신이 방금 그런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이첼은 부모님이 전화를 받는 것을 기다리면서, ‘고마워.’라고 작게 말하며 황금 사신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전화를 걸어도, 자동 응답기로 연결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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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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