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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9

        메릴다, 에리카, 제롯, 로멜.

       

        앞으로 두 달 정도 봐야 하는 엘프 교환학생들이다.

       

        뉴페이스의 등장으로 인해 교실은 학기 초 이후로 가장 소란스러운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헤를라인은 손뼉을 치며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단번에 정리했다.

       

        “자, 그럼 선생님은 이만 수업 준비하러 가볼게. 다음 두 시간은 공강이지? 싸우지들 말고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 알겠지?”

       

        학생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헤를라인은 손을 흔들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교환학생이 오자마자 공강이라니.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닌가?

       

        그건 내 생각인가 보다. 다른 친구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다.

       

        학생들의 시선이 네 명의 엘프에게 골고루 분산되었다. 나는 거기까지 보고는 등을 돌렸다.

       

        하는 일은 변하지 않는다. 오늘부로 백야의 마지막을 장식하리라.

       

        “그런데 말이야, 여기 1짱이 누구야?”

        “1짱?”

        “수석 말이야, 수석. 이 반이 틸레트에서 가장 공부도 잘하고 마법도 잘 쓰는 반이라면서? 이 반에도 1등이 있을 거 아니야?”

       

        날라리처럼 생긴 여자애가 쫑알쫑알 떠들어댔다.

       

        이름이 에리카라고 했나? 좀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에리카, 오자마자 바로 그러면 틸레트 학생들에게 실례예요.”

        “메릴다도 사실은 대련하고 싶어서 근질거리잖아? 여기 애들은 얼마나 강할지 말이야.”

       

        에리카가 이죽거리며 답했다. 그러던 그녀의 말을 받아준 건 곁에 앉아있던 제롯이라는 남자였다.

       

        “순수 실력이야 비슷하겠지. 일리야드나 틸레트 둘 다 좋은 학교니까.”

        “그런가?”

       

        제롯은 안경을 고쳐 쓰며 턱을 괴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순수 실력이 비슷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모두 정령을 사역하니까, 정령마도를 사용하면 너희가 밀릴 수밖에 없어.”

        “…지금 우리한테 시비 거는 거야?”

        “미안하지만 이게 사실이다.”

       

        재수 없는 놈. 여기 귀족들보다 더하네.

       

        “죄송해요. 제롯은 하이엘프 핏줄이라 재수가 좀 없거든요.”

        “하이엘프면 뭐 다른 줄 아나? 시대가 변한 게 언제인데. 그냥 사람 문제지.”

        “너희 둘은 좀 조용히 하고 있으면 안 돼?”

       

        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공부하기에 영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작업할 수는 있다.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노트에 적힌 수식과 그림을 점검했다.

       

        이쪽 부분을 조금 고친다면 안전성을 보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

       

        “그래서 여기 1등이 누구냐니까? 나 궁금해서 미치겠어.”

        “저기 맨 앞에 있어.”

        “맨 앞? 누구?”

        “저기 금안족 애.”

       

        이런 개씨발.

       

        “금안족? 금안족이 있어?”

       

        한숨을 내쉬며 펜을 끄적이는 속도를 높였다. 억지로 몰입하기 위함이다.

       

        무시하기 전략을 고수하고 있자 옆구리에 펜으로 쿡쿡 찌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저기, 에테르.”

       

        로테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로 내 이름을 불렀다. 차분함이 한가득 담긴, 고요한 목소리였다.

       

        “저쪽 애들이 너 불러.”

       

        그래, 나도 안다.

       

        “거기, 뒤 좀 돌아봐 줘!”

        “실례지만 눈 보여줄 수 있으신가요?”

       

        실례인 줄 알면 말하지 말든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네 엘프의 얼굴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하이엘프 안경잡이가 제롯, 헤어밴드로 머리를 묶은 양아치 인상의 여자애가 에리카, 단정한 옷차림과는 달리 고혹적인 몸매를 지닌 녀석이 메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보며 유일하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녀석이 ‘로멜’.

       

        외우기 싫은데도 벌써 외워버렸다. 기억력 뛰어난 게 병폐다, 병폐.

       

        “와, 틸레트에도 금안족이 있네. 제국에는 아예 없을 줄 알았는데.”

        “당신이 수석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틸레트 입시는 어려운 걸로 아는데, 마법도 못 쓰면서 어떻게 합격한 거지?”

        “에테르는 필기 만점으로 합격했어. 실기를 못 본 것도 아니었고.”

        “…너는?”

        “로테 살리에르. 모두 만나서 반가워.”

       

        로테는 자연스럽게 교환학생 일행과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엘프들과 금방 친해졌다.

       

        사교성 하나는 끝내주네. 이렇게만 보면 로테는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다.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로테가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 대부분은 로즈마리다.

       

        “어쨌든 말이야, 이름이 에테르라고 했나?”

        “…왜.”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만 대화할 줄 알았더니, 에리카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금안족은 마법도 제대로 못 쓸 텐데 어떻게 수석이야? 응?”

       

        시비를 거는 듯한 질문이었다. 나와 그렇게까지 스태프를 맞대고 싶은 모양이다.

       

        아직은 귀찮음이 더 컸다. 이럴 땐 동요하지 않고 최소한으로만 답변해주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무미건조한 투로 대응했다.

       

        “성적이 좋으니까.”

        “공부 말하는 거야?”

        “어.”

        “전투마도는?”

        “개못해.”

       

        에리카는 말이 되냐면서 깔깔 웃었다. 제롯과 메릴다도 표면적인 반응만 다를 뿐이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오직 로멜만이 한숨을 픽픽 내쉬며 상황을 주시헀다.

       

        “개못한다니, 너 말 재미있게 한다?”

        “자주 들어.”

        “그래도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인데, 최소한의 실력은 있지 않겠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나는 손사래를 쳤다. 네가 이겼으니까 됐다는 표시였다.

       

        제발, 머리 아프니까 나한테 대련 요청하지 말아줬으면.

       

        “에리카, 너는 마력도 타고나지 못한 장애인한테 대련을 요청하고 싶어?”

       

        장애인이라니. 제롯인가 뭔가 하는 안경잡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뭐? 우리 언니한테 장애인?”

        “야 인마, 내 친구는 사지 멀쩡해!”

       

        로즈마리와 프레이는 동시에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키가 작아서 고만고만했다. 위협은커녕 앙증맞게만 보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제롯이 또 말을 곡해했네요….”

       

        사과의 목소리는 제롯 대신 메릴다라는 친구에게서 나왔다. 

       

        “정령신앙을 다루는 경전에는 마력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장애라고 여기거든요. 아무래도 정령이 여신님과 관련이 있다 보니까 마력을 아예 못 다루는 금안족을 여신에게 버림받았다는 뜻으로 말한 걸 거예요.”

       

        양장본에게도 비슷한 소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딱히 화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메릴다의 수습에도 불구하고 로즈마리와 프레이의 화는 쉽게 가라앉질 않는 듯하였다.

       

        “야, 너 나와! 내가 골렘으로 깔아뭉개줄 테니까!”

        “잠깐만요. 마력초가 어디 있더라….”

       

        프레이는 씩씩거리며 제롯에게 손가락질했고, 로즈마리는 엘프 넷을 통째로 죽일 기세로 담배를 찾았다.

       

        보다 못한 내가 일어나서 두 꼬맹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자리에 앉아.”

        “언니, 하지만 저 미개한 것들이 먼저…!”

        “학업에 방해돼.”

        “네.”

       

        로즈마리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내 표정을 본 프레이도 화를 삭이며 물러났다.

       

        “좋아, 얘기를 바꾸자. 1학년 중에서 가장 잘 싸우는 애가 누구야? 로테? 아니면 방금 일어난 두 꼬맹이?”

        “꼬맹이? 너 맞을래?!”

        “일단 보라 머리 꼬맹이는 아닌 것 같고.”

       

        프레이가 발작을 일으키며 펄쩍 뛰었다. 보다 못한 로테가 번쩍 들어서 제자리에 앉혀놓았다.

       

        로테는 한숨을 쉬며 에리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결투에 집착하는 거야?”

       

        핵심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질문에, 에리카를 포함한 엘프들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눈치 없는 새끼 하나만 빼고.

       

        “…여기서 뭔가를 배우고 돌아갔으면 하니까.”

       

        로멜이었다.

       

        이전까지 말 한마디 않고 가만히만 있던 그였다. 그런데 로테의 질문에 가장 먼저 입을 열었으니.

       

        자연스레 내 시선이 그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잠시 눈을 마주쳤다. 로멜은 나를 보며 큼큼, 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곧 그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일리야드는 며칠 전 반파됐어. 거대한 해룡이 나타나서 모든 걸 집어삼켰지. 몇몇 교수님들은 돌아가시고, 밤사이에 벌어진 기습이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어. 우린 사실상 여기 피난 온 거나 마찬가지야.”

       

        교실 분위기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마치 누군가를 추모하는 것처럼.

       

        “우린 어디까지나 강해지러 온 거야. 에리카도, 메릴다도, 제롯도.”

        “…….”

        “그리고 나도.”

       

        나는 알고 있었다. 저런 목소리에는 보통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여기서 배워가는 게 있어야만 해.”

       

        근엄하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로멜은 그렇게 짧은 하소연을 마쳤다. 

       

        조금 전까만 해도 숯불에 달구어진 철판처럼 뜨겁던 교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아닌데? 난 그냥 강한 애랑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것뿐인데?”

        “에리카, 분위기 박살 내지 좀 마세요!”

        “아무튼, 친해지는 데 쌈박질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그래서, 정말 전투마도 1등도 금안족 친구란 말이지?”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저런 인간군상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룩할 때까지 몇 번이고 사람을 귀찮게 하는 타입.

       

        연구를 위해서라도 제때 상대해줘야 한다. 정말 중요할 때 방해하지 못하도록.

       

        “정말 싸우고 싶어?”

        “그래, 네 실력 최대한으로 보여줘! 부족하면 메릴다나 제롯하고도 싸우게 해줄 테니까.”

       

        대답 하나는 시원해서 좋네.

       

        “야, 넌 뭘 멋대로 정하고 있……!”

        “정령도 못 다루는 장애 종족이라고 깎아내렸으면서 결투를 피하면 자기만 병신 되는 거 알죠? 고귀한 하이엘프의 핏줄을 타고난 ‘제롯 로스차일드’ 씨?”

        “에리카 너….”

        “그냥 하면 재미없겠네. 지는 쪽이 밥 한턱 쏘는 게 어때?”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다음 시간은 공강 겸 자습 시간이다. 식전 운동으로는 딱이겠지.

       

        에리카나 다른 애들이 어떻게 되는 건 상관없다. 내 시선은 아까부터 한 엘프만을 향해 있었다.

       

        “거기, 로멜이라고 했지?”

        “그, 그런데. 나는 왜?”

        “하기 싫어도 따라와. 너까지 상대해 줄 테니까.”

       

        로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

       

        마법인지 뭔지 성형으로 얼굴을 바꾸긴 했어도, 저 특유의 행동거지나 화법을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네가 나한테 존나 처맞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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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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