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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9

     

    “그러니까, 큰 나무…가 아니라 대지의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단 말씀이시군요.”

     

    나무가 병들었으니 치료해달라는 요청은 생소하긴 했지만 종족감수성은 중요하다.

     

    일단 그들에게 공감해보기로 했다. 몇천 년을 살아온 땅의 기반을 단단하게 지탱하던 나무가 썩어간다. 불안하겠지.

     

    “과연, 상심이 크셨겠군요. 누구에게나 건강은 중대사 아니겠습니까.”

     

    내 표현에 파멜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지의 어머니? 그런 표현은 처음 듣는군. 세계수님은 단순히 도시 중앙에 위치한 큰 나무다.”

     

    아, 아니었구나.

     

    “세계수는 엘프 여러분에게 중요한 존재 아니었습니까? 땅이나 마나의 근원이라든지.”

     

    “그렇게 취급했던 적도 있었지. 500년쯤 전인가, 전쟁에 패배해서 더는 자존심을 지키지 않기로 인족과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그럼 세계수가 아프다는 의미는요?”

     

    “보면 무슨 뜻인지 알 거다. 뿌리가 썩어서 나뭇가지가…”

     

    “그만!”

     

    파멜름의 말을 막으며 끼어든 이가 있었다. 나무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나의 앞에 쪼그려 착지한 여자 엘프.

     

    “외부인에게 주절주절 냅다 뭘 지껄이냐! 현자의 아들이건 뭐건 사정을 밝혀서 좋을 일이 어디 있어?”

     

    아까 나를 받아들이지 말자고 주장하던 목소리의 주인이다.

     

    그리고 내가 섭외하려는 대상이기도 했다.

     

    불량한 태도로 건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팍 인상 쓴 눈매로 나를 째려봤다.

     

    “사정을 밝혀야 치료를 요청하지 않겠나, 발렌.”

     

    “이 인간놈 관상을 봐, 백 년도 못 살게 생겼잖아. 고치긴 뭘 고쳐?”

     

    엘프 궁수, 발렌이 침을 퉷 뱉으며 기다란 장궁을 양어깨에 걸쳤다. 위협감을 풍길 셈인지 고개를 건들거리며 혀를 낼름댄다.

     

    “궁수님, 인간은 원래 백 년을 못 삽니다.”

     

    “진짜? 그건 좀… 슬픈데.”

     

    발렌이 생각지 못한 사실에 시무룩해졌다.

    보기와 다르게 종족감수성이 풍부하네.

     

    “어쨌든, 애초에 진짜 현자의 아들인지도 모르잖아. 어떻게 믿어?”

     

    “이거면 증명이 되겠습니까.”

     

    나는 품에서 아크스태프를 꺼내 보였다.

    파멜름이 시모어의 유품을 알아보고는 활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물려줄 사이라면 틀림없겠군. 발렌,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겠나.”

     

    “그런가? 그런가…”

     

    발렌이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다지 머리는 좋지 않은 친구 같다.

     

    “에이, 몰라. 야, 너 허튼 수작 부리면 바로 머리에 구멍 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발렌이 내 가슴팍을 향해 손찌검을 했다.

     

    “어이쿠.”

     

    내가 그녀의 힘을 못 이기고 휘청이니 타냐가 뒤에서 어깨를 받쳐주었다.

    동시에 그녀가 검을 반쯤 꺼내 들며 눈을 부릅떴다.

     

    “엘프, 선생님의 아량으로 무례는 넘어가겠다만 한 번 더 함부로 손을 놀리면 용서하지 않겠다. 마지막 경고다.”

     

    “어? 아니, 나는 그게…”

     

    발렌이 당황하며 입을 쩝쩝댔다.

     

    “수명이 짧은 걸 깜빡했어. 미안…”

     

    발렌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는 백의를 툭툭 털었다.

     

    “하하, 여러분보다 적게 살 뿐이지 신체가 약하진 않습니다. 뭐, 그래서 더욱 삶에 집착한 나머지 치유술을 발전시켰을지도 모르겠군요. 덕분에 여러분에게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손끝에서 가볍게 신성력을 피어 올려 보였다.

    발렌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장생종임에도 신성력을 태어나 처음 본다. 얼마나 이들이 폐쇄적으로 사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러분은 분명 ‘나이트엘프’시지요.”

     

    “오, 잘 알고 있군. 우리에 대해 상식이 있는 인간은 드문데.”

     

    이들은 새하얀 모험가 엘프들과 다르게 피부에 미세하게 구릿빛이 돈다. 파멜름은 차이를 구분한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바깥의 엘프들과 종종 교류하기에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이엘프였죠.”

     

    “하, 변절자들은 언급도 마.”

     

    “실례했군요. 대수해를 떠난 하이엘프와 다르게 여러분은 세계수를 지키며 지낸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세계수님 덕에 처음 이 땅에 풍부한 마나가 깃든 건 사실이다. 지금은 상징으로 남아있을 뿐 세계수님께 딱히 특별한 기능이 있지는 않다.”

     

    “그럼 치료가 필요한 이유는요?”

     

    파멜름이 고개를 까닥였다.

     

    “따라와라. 우리의 도시를 보여주지. 아, 들어올 수 있는 건 고트베르크, 너만이다.”

     

    “그 안에 들어갈 자격은 내게도 있어.”

     

    뒤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아셀라가 풀밭을 밟으며 우리를 향해 사박사박 걸어왔다.

     

    “그 의사는 내 주치의야. 빌리고 싶다면 제국의 3황녀인 이 나의 허락을 받도록 해.”

     

    “황녀?”

     

    보통 사람이라면 듣는 즉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단어이지만 엘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파멜름과 발렌 둘 다 지나가다 풀밭의 달팽이를 봤다는 반응이었다.

     

    “황녀는 왕녀와 비슷한 건가?”

    “아앙. 백 년에 백 명은 나오는 그거.”

    “아카데미 졸업생과 비슷한 건가 보군.”

     

    자신의 권력이 여기에선 아무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셀라는 못마땅해하며 팔짱을 끼고는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시모어의 딸이야.”

     

    “그렇군. 들어오시게나.”

     

    호위 명목으로 타냐까지 허락을 구해서 셋이 엘프의 도시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우리는 기사단을 대기시킨 후 그들을 따라 숲길로 나아갔다.

     

     

     

    ***

     

     

     

    “장로인 트리스탄이라 합니다. 외부인은 오랜만이군요.”

     

    우리는 엘프의 장로를 만나 도시를 소개받았다. 인구수가 많지는 않기에 국가의 왕보다는 시장이라는 느낌이었다.

     

    “경비대의 공격은 사죄드립니다. 융통성이 부족한 친구들이지요. 아셀라 3황녀님과 고트베르크 선생님의 말씀은 현자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장로는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아셀라가 그를 상대하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 거리를 둘러보았다.

     

    “건물이 하나같이 신비하군요.”

     

    타냐의 감상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엘프의 집들은 굉장히 자연 친화적이었는데, 거대한 나무뿌리 밑에 증축하거나 옹이구멍에 건설한 구조였다.

     

    여기저기 자그마한 위습이 떠다녀서 나무가 가득해도 사방이 밝았고, 습도도 높지 않게 유지됐다. 자연과 더불어 살긴 해도 편의성은 가능한 한 챙겼다.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집마다 가판대를 내놓고 직접 키운 열매나 사냥한 생고기, 전투 장비 따위를 팔았다.

     

    장비는 제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꽤 신식인데 어째 식료품은 죄다 날 것이다.

    야만족도 불은 썼는데, 이들은 생식만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또 마계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셀라는 역시나 정치적인 특기를 발휘해 장로가 눈치 못 채는 선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대들은 대륙의 명운에는 관여하지 않는가?”

     

    “어차피 흘러갈 일입니다. 용사와 마왕이야 자주 나타나니 매번 대응해서야 자원이 남아나질 않지요.”

     

    엘프의 시간 감각으로는 백 년 주기도 자주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보금자리만 지키는 스탠스를 고수했다.

     

    그마저도 이번엔 불가능하리라고는 모르겠지. 어쩔 수 없기야 하지만.

     

    “세계수는 어디 있습니까?”

     

    내 질문에 장로가 가볍게 웃었다.

     

    “여태 봐오고 계셨습니다.”

     

    “아하.”

     

    고개를 들어 무성하게 하늘을 가린 녹음을 확인한다.

    하늘을 덮은 나뭇잎과 커다란 가지, 집들을 구성한 커다란 통나무는 지상으로 튀어나온 뿌리였다.

     

    이 도시 전체가 세계수라는 고목을 베이스로 지어진 형태였다.

     

    무지막지하게 크네.

     

    “그럼 세계수가 걸린 병마는 무엇이지요?”

     

    “이쪽입니다.”

     

    장로가 우리를 데려간 구역.

    주민이 미리 대피했는지 폐허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소였다.

     

    나무 뿌리가 썩어들어 그에 연결된 가지를 기반으로 지어진 집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균열이었습니다만 점점 번져가고 있습니다.”

     

    “과연. 세계수가 죽으면 여러분에게도 큰일이겠군요. 저장된 마나라든지,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아뇨. 모든 가택에 걸린 권리금 때문에 장로회에 소송이 걸려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는 게 큰일입니다.”

     

    장로의 덤덤한 설명에 어이가 털렸다.

    은근히 신식 체제가 도입되어 있었다.

     

    “어찌, 회생할 가능성이 보이십니까?”

     

    드래곤이야 그렇다 쳐도 나무는 진짜 모르겠는데.

     

    일단 밑져야 본전으로 진단을 사용했다.

     

     

    ―――――――――――

    · 이름 : 세계수

    · 체력 : 8186 / 9374

    · 상태 : 호에엥

    · 부상 : 기생충 감염

    · 위치 : 72번 뿌리

    · 기분 : 광합성 하고 싶어

    ―――――――――――

     

     

    이게 되네.

     

    글자 몇 개가 상태가 안 좋은 건 그렇다 치고, 원인은 간단했다.

     

    “치료는 가능하겠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장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장로님,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만.”

     

    “예, 말씀만 하시지요.”

     

    “그 전에, 우리가 세계수를 고치면 받을 대가를 미리 정해놓고 싶구나.”

     

    아셀라가 말을 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확실히 협상을 맡아주니 든든했다.

     

     

     

    폐허의 뒤로 돌아가 뿌리를 살피고 있으니 위쪽이 바스락거렸다.

     

    아셀라가 입꼬리를 쭉 찢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생글댔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물정에 어두운 이들은 다루기 쉽구나. 마음에 드는 거래였어.”

     

    “궁수 말고도 뭘 더 받아오셨어요.”

     

    “이것저것. 오래 숨어있던 땅이다 보니 재밌는 자원이 많이 있지 않겠니.”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아셀라였다. 차려진 밥상은 마다하지 않고 먹어치우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치료는 가능하겠니? 아무리 그래도 나무를 고치라니, 라스 네 영역이 아니잖아.”

     

    “원인은 파악했어요. 해결법도 예상이 가네요.”

     

    아셀라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방법을 찾아냈구나. 내 주치의니 당연히 이 정도는 금방… 꺄악!”

     

    나를 향해 한 발짝 내려오려던 아셀라가 나무 뿌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찧고 미간을 찌푸리는 아셀라.

     

    “아야…”

     

    “괜찮으세요?”

     

    바로 아셀라의 몸을 살폈다.

     

    드레스 아래, 종아리에 길게 긁혀 송골송골 피가 맺히고 있었다.

     

    “치료하겠습니다.”

     

    즉시 환부를 세척한 후 알콜솜으로 소독, 약제를 바른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기에 금방 나을 것이었다.

     

    “따가워.”

     

    “조금만 참으세요. 이젠 황녀님도 치유주문을 받으시니까요.”

     

    신성력을 발현해 가볍게 손에 감는다. 아셀라의 새하얀 다리에 부드럽게 펴 바르듯 주문을 시전했다.

     

    응급처치를 병행한 덕에 상처는 금방 아물어간다. 십 분쯤 지나니 말끔하게 자국이 사라졌다.

     

    “끝났습니다. 일어서실 수 있겠어요?”

     

    “응. 아… 아니.”

     

    내게 즉답하려던 아셀라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저었다.

     

    “떨어지면서 발목도 삔 것 같아.”

     

    “그래요?”

     

     

    ―――――――――――

    · 이름 :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 체력 : 21 / 22

    · 상태 : 건강

    · 부상 : 없음

    · 기분 : 기대감

    ―――――――――――

     

     

    진단으로 봤을 땐 멀쩡한데.

     

    “큰일이야. 못 걸어가겠네. 라스, 이리 와서 업어주련.”

     

    아셀라가 나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런 의도시구만.

     

    명령에는 복종해야지. 나는 순순히 쪼그려 앉아 아셀라에게 등을 내밀었다.

     

    내게 슬그머니 몸을 기대어 붙이고는 목에 양팔을 감아오는 아셀라.

    그녀를 업은 채로 일어나니 살짝 머리가 핑 돌았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얘, 똑바로 걸어. 옥체를 업고 있잖니.”

     

    꾀병 부리는 주제에 요구사항도 많기는.

     

    나는 자세를 고치는 척, 양손으로 받친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때려주었다.

     

    “힉.”

     

    아셀라는 뜨거운 불판을 만진 고양이처럼 짧게 소리를 내고는 더욱 강하게 내 목을 조여왔다.

     

    “라스!”

     

    “죄송합니다. 제가 근력이 약해서.”

     

    “…조심해, 진짜.”

     

    나는 피식 웃고는 아셀라를 업은 채 큰 길까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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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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