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69

       *

         

         

        -콰직!

         

         

         두꺼운 철문이 도끼질 두어 번에 박살났다. 찢어진 철판을 단단히 붙잡고 으스러트려 구멍을 넓혔다.

         

         이반은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더 이상 기세를 숨기지도, 마력을 억누르지도 않았다.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경보가 시끄럽게 울렸다. 마력 감지 기관들이 발작하듯 붉은 빛을 터트렸다. 철컥, 철컥 하며, 연구동에 이어지는 수많은 격문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길은 알고 가시는 거 맞죠…?”

         “상관없다.”

         

         

         엔리케가 가르쳐준 것은 대부분 훈련 상황의 일이었을 것이다. 실전은 설명으로 교육할 수 없는 법이니.

         

         그러니 이반은 루시아에게 실제 상황에서의 수칙들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다.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최단거리를 최단시간 안에 돌파하는 것이 옳다.”

         “…그, 적진 상태나 위협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요?”

         “고려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해야지.”

         “지금 같은 경우는요?”

         “최단거리와 최단시간의 뜻을 생각해봐라.”

         

         

         루시아는 잠시 생각에 빠지는가 하더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야지.

         

         이반은 굳이 부연하지 않았다. 도끼를 들고 앞으로 걸었다. 감지하기 난해한 엘프들의 마법이 함정으로 깔리고, 사전에 내부 구조에 대한 정보가 조금도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러나, 그 조건 아래에서라면.

         

         최단거리를 최단시간으로 돌파하는 것은 곧, 적들과의 접촉면이 가장 짧음을 의미한다.

         

         용사 파티의 역할 분담으로 볼 때,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에이나르와 베올그린은 군대를 상대하는 무력이었다.

         

         질 베르와 막시밀리앙은 개인을 상대하는 무력이었다.

         

         그리고 엔리케와 이반은, 적진을 파고들어 그 상태를 점검하고, 적들의 수준을 시험하고, 생환해 그 정보를 파티에 전달하는 역할이라 하겠다.

         

         그런즉, 시금석이다.

         

         우리 파티의 힘으로 도전할 만 한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도전하는 것이 가장 적은 손실로 가장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반은 군대를 대적하지도, 압도적인 소수의 강자를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구조’를 상대해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것뿐이다. 파고들 것, 파악할 것, 그리고 살아나올 것.

         

         

         “네 일행이 갈 길을 미리 파악하는 일이다. 그 길이 험지일수록 더 정확히 파악할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교수님, 시험 범위가 너무 넓은데요….”

         “세상이 넓으니까.”

         

         

         실전 속에서 학생들은 시험지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출제자는 세상이고, 시험지는 생존이다.

         

         루시아는 투덜거리다가, 이반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곧 표정을 고쳤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차례 한 뒤에 무기를 뽑아 들었다.

         

         제법 단단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반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

         

         

         오스왈드는 선수부에 서서 심야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엘프 사회에 익숙하지 않다. 이 육체가 엘프인 것과는 별개로, 그의 정신은 지구인의 것이었으니.

         

         그러니 이들의 문화나 정치체제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2년, 엘프로 보낸 시간이 고작 그 정도가 아닌가.

         

         

         “무슨 생각을 해요?”

         “네? 아, 그냥. 이런저런… 이런저런 생각이요.”

         “알려주기 싫어요?”

         “그렇다기보단, 실없는 생각들이라서요. 러스트피츠 양.”

         

         

         시선을 돌리자 ‘전’ 약혼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블린 러스트피츠, 추밀의장의 딸.

         

         솔직히 과분하다. 저 미모와, 엘프 특유의 긴 수명, 그리고 압도적인 가문의 위광까지.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겠지. 그가 빙의한 컨텐츠의 제목은 <악역영애가 집착하는 천재마법사>였다. 그 쓰레기 같은 활자조합물을 10화도 읽지 않고 하차했건만.

         

         그러니, 그는 자신이 빙의한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눈을 떠보니 저 여자가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

         

         

         “오스왈드.”

         “예, 예.”

         

         

         꼬박꼬박 경칭을 붙이는 것과는 달리, 에블린은 언제나 살갑게 말을 걸어온다. 서로의 거리감은 서로가 품은 생각만큼이나 달랐다.

         

         

         “후후, 정치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에요.”

         “정치요?”

         “이스트벨펜 가문이라면 중앙정계와 무관하지 않은데도 참 신기하죠.”

         

         

         그녀의 눈망울이 탐욕으로 빛났다. 보석을 바라보는 까마귀의 눈처럼 농염하게.

         

         

         “우리들을, 엘프를 인간들이 무어라 부르는 지 아세요?”

         “많이 압니다만 러스트피츠 양께 말씀드리기엔 너무 저속한 표현들이더군요.”

         “저속한 군상들이 하는 말이니 표현이 저속할 밖에요. 대부분 간추리자면 ‘속을 알 수 없다’, ‘이기적이다’, ‘오만하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 그럴 겁니다.”

         “그 셋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정치적이란 뜻이랍니다.”

         

         

         에블린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일 년이나 같은 교실을 사용해왔으나, 그녀와 이렇게 오래 대화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엘프는 정치적인 생물이에요. 그 어떤 족속보다 더. 그러니 엘프가 무언가를 저지른다면, 그건 반드시 정치적인 사건이나 목적이 있다는 의미라고 보아도 무방하답니다.”

         

         

         당신을 제외한다면.

         

         에블린은 가까스로 마지막 말을 삼켰다. 저 순박한 시골 귀족만이, 그녀를 추밀의장의 딸이 아니라 에블린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러스트피츠라고 부르기야 한다지만, 그것도 이번 겨울 방학 안에는 끝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정치가 생기고, 사람들이 흐르면 경제가 생긴다고 하는 말을 아시나요?”

         “음, 아뇨. 처음 들어봅니다.”

         “낡은 격언입니다. 하지만 진리죠. 그리고 칼리온은, 이 땅은 네 바다의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모인 물자들이 고이는 땅입니다. 경제와 정치가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발달했죠.”

         “그 말씀은….”

         “이 나라에서 경제는 정치와 같은 의미입니다. 연금 학회, 흑마법 학회, 뭐, 검각이나 파괴학파, 정신학파, 소환학파. 말이 좋아 ‘학회’지 사실상 기업체들, 그리고 그 수반은 대부분 추밀의원들이죠.”

         

         

         오스왈드의 머릿속에 오래된 지구의 언어가 떠올랐다. 정경유착.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정경유착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경제인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인 자체가 곧 정치인이란 뜻과 같았으니.

         

         이 나라의 정치체계는 그러니까, 사실 한국보다 미국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여간 코쟁이 놈들. 세상에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면 일단 앵글로색슨을 찍으면 맞는 법이다. 이 세상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거나, 근심하지 마세요. 일상적인 일입니다. 저런 것쯤은.”

         “저런 것이라시면.”

         “특정 학회가 다른 학회를 공격한다. 경제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무력 충돌이든간에. 아주아주 흔한 일입니다. 그것이 물 위로 드러나지만 않는다면요.”

         

         

         에블린은 밤바다를 가리키며 웃었다.

         

         

         “바다 밑에서 어떤 거신이 웅거하고, 고래와 상어가 뒤엉켜 전쟁을 벌이든. 수면 위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칼리온 추밀원은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걸 알고 있으니 점점 더 과감해지고, 음험해지지요.”

         

         

         그제야 오스왈드는 에블린이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때마침 도착한 항구에서, 때마침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그럴 수가 있나? 싶은 이 순간에.

         

         그게 사실, 이 나라 전체에선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기본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이 정도의 암투는 별 문제 삼을 거리도 없을 정도로 흔한 사건들이니 신경쓰지 말란 뜻이다.

         

         추밀의장의 딸을 박대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추밀의장 본인도 아니고 고작 딸이다.

         

         추밀의장과 그의 딸 사이에 나이 차이는 곧 한 국가의 역사와 맞먹는다. 수백 년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그 정도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일국의 군왕과 다를 바 없으며,

         

         이들의 대화는 곧 외교이고, 이들의 거래는 곧 무역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낯설어지는 긴 시간이다.

         

         즉, 이들의 암투는 평범한 국가들 간의 경쟁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뜻이 되겠다.

         

         오스왈드는 밤바다를 보며 깊게 한탄했다.

         

         

         “이따위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요.”

         

         

         저도 모르게.

         

         그 말에 에블린은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엘프가 위대한 이유가 아니겠어요.”

         

         

        *

         

         

         파직, 전격계 공격 마법이 휘몰아친다. 이반은 마력을 두른 도끼를 내려 찍었다.

         

         마법의 구성과 구조까지는 몰라도 아무 문제없었다. 파괴 마법은 부수기 쉬우니까. 모든 종류의 마법이란 결국 신비를 현실로 직조하는 과정이다. 현실이 된 순간,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

         

         가해지는 공격 주문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대응하면 그만이다. 즉, 검술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라는 설명을 듣고, 루시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척후 안 할래요.”

         “그럼 쓸모가 없어지는데.”

         “와 방금 감점이에요? 이런 걸로?”

         “채점을 포기할 정도로.”

         

         

         이반의 말에 루시아는 툴툴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뒤엔 파괴흔이 깊게 남은 복도와, 육편조각이 된 기괴한 살덩이들이 가득했다.

         

         이 실험동은 엘프를 경비로 세우지 않을 정도로 보안에 진심이었다. 연금술로 제작된 생체 골렘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시점에 튀어나와 공격을 해왔다.

         

         그리고 예상하기 어려운 도끼날에 사라졌다. 이반은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은 호흡을 유지하며 묵묵히 길을 뚫고 있었다.

         

         

         “이쯤이면 본성에 도착한 것 맞겠죠?”

         “본성 지하로 이어졌으니, 그래.”

         “옛날 생각 나는데요? 그 왜, 드워프 토끼굴 뒤지고 다닐 때요! 기억 나죠. 사형이 하루에 세 시간만 잔다면서 눈 붙이고, 제가 또 철통같이 불침번을 서고.”

         “그래.”

         “제가 쓸모 있을 때는 또 쓸모 있다니까요. 이건 가산점 안 되나요?”

         “적게 먹고 적게 자는 것은 척후의 소양이지. 5점 주마.”

         

         

         급할땐 흡혈을 하는 것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하고, 오랜 시간 잠들지 않아도 어둠 속에선 활동할 수 있다. 굉장히 유용한 자질이다.

         

         거기에 대부분 흡혈귀들이 나이트워커인 것과 달리, 루시아는 대낮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긴 수명이나 트롤을 능가하는 회복력, 강인한 힘과 마력 적응력 같은 흡혈귀의 특성 대부분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그 대가로 데이워킹을 손에 넣은 셈이다.

         

         나쁘지 않다. 선천적 능력에 기대면 성장이 더디나, 부족함을 알고 있는 이들은 빠르게 크기 마련이니까.

         

         

         ‘직감이었나, 통찰이었나. 엔리케.’

         

         

         훗날 용사 파티에 척후가 필요하리란 통찰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오랜 세월이 쌓아올린 직감이, 하나뿐인 직계 제자를 이토록 ‘적합하게’ 키워낸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루시아는 지금의 용사 파티에서 가장 유용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성되어 있었다.

         

         실전만을 제외한다면.

         

         

        -퍼억!!

         

         

         복도를 밝히던 마력등이 일제히 꺼졌다. 연구동이 끝난 지점에서, 본성 전체가 어둠에 물들었다.

         

         곧,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살덩이가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소란스러운 소리와, 무언가를 웅얼거리는 끔찍한 소음들이.

         

         이반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충분히 위협적이었구나.”

         “예?”

         “함정이 험난해질수록 상대가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면 좋으니까. 이제부터 해가 뜨기 전까진 쉴 시간이 없을 게다.”

         

         

         철퍽, 하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루시아의 시야에서도 거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어둠이었다.

         

         암흑 시야조차도 최소한의 빛이 있어야 기능하는 법이다. 시각으로 공간을 인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나 그랬다. 극미량의 광량조차 없는 공간에선 암흑 시야도 무의미해진다.

         

         

        -츳.

         

         

         그러나 이 세상엔 시각을 제외한 감각으로 공간을 인지하는 기술도 있는 법이다.

         

         

        -츳, 츳.

         

         

         몇몇 박쥐, 몇몇 고래, 그리고 극소수의 지하 마물, 또는.

         

         잘 훈련된 요원 같이.

         

         

         도끼날이 움직이는 소리와, 살덩이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또각, 또각. 이반의 강철 부츠가 바닥을 차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정확한 보폭으로, 자로 잰 듯 일정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츳, 츳. 1/4초에 한 번씩 혀를 차는, 메트로놈처럼 정교한 작은 소음.

         

         

        -콰직!

         

         

         이따금 울리는 파열음은 수확철의 이삭을 줍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딱 그 정도의 노력으로 다가오는 골렘을 박살내며.

         

         

        -츳, 츳.

         

         

         어둠 속에 도사린 뱀이 우는 듯한 소리가, 빛 한 점 없는 복도 속에 한동안 울려 퍼졌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떻게 때마침 들어간 항구에서 때마침 이런 일이? X
    아, 어느 항구, 어느 기업과 접촉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구나 O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초반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아서 주말에도 연재를 했어요! 제 부족함 때문입니다. 최대한 성실하게 내용을 밀어서 이해에 어려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월요일, 즐거운 한주의 시작 되세요 여러분!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