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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9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8번의 숙면을 취했으니…….

         

       ‘이제 2주일 정도 됐나?’

         

       이 침실로 위장한 감옥에 갇힌 지도 꽤 지난 셈이다. 이제는 정말 할 게 없다.

         

       천장과 벽지의 패턴 분석도 한참 전에 끝났고 샹들리에도 보지 않고 똑같이 그릴 수준이 되었다.

         

       ‘대화 상대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이젠 프란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헬레나가 식사를 배달해주는데, 음식만 놓고 갈 뿐이었다.

         

       “실시간으로 힘이 계속 빠져서 그런가…? 정신이 계속 어질어질하네.”

         

       프란체는 내 존재가 불안정해서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몸에서 힘이 계속 새어나가는 느낌이라, 그 전에 내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생각을 멈추자.’

         

       언젠가 괜찮아져서 나갈 수 있을 거다. 프란체도 다 생각이 있겠지…….

         

       또각. 또각. 별안간 문 바깥에서 구두 소리가 울렸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철창살을 바라봤다.

         

       “진?”

         

       늘 찾아오던 프란체였다. 보통 이쯤에는 안 오고 늦은 밤에나 오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오늘은 소식도 전해줄 겸 같이 식사하려고 왔단다. 음식도 내가 가져왔고.”

         

       그리 말하곤 싱긋 웃는 프란체. 이어 철컥, 소리가 들려오더니 철문이 열렸다.

         

       드르륵. 서빙용 웨건을 직접 끌고 침실로 들어오는 프란체. 테이블에 음식을 올렸다.

         

       “앉으렴.”

       “예.”

         

       그나저나 오늘은 요리가 좀 특별하다. 평소보다 호화롭다고 해야 하나.

         

       “오늘 무슨 날입니까?”

         

       프란체는 입꼬리를 올리며 품속에서 한 유리병을 꺼냈다.

         

       “약이 완성됐거든. 곧 나갈 수 있단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바로 나가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곧 햇빛을 볼 수 있을 텐데.

         

       “음식이 평소보다 많고 호화로운 건 곧 쾌차하는 너를 축하하는 기념이란다.”

         

       그리 말하곤 눈썹을 들썩이며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주는 프란체.

         

       “어서 먹으렴. 식겠다.”

       “…예.”

         

       음식을 먹으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곧 여기서 나갈 수 있다니…….

         

       “아, 그리고 약은 하루에 세 번씩 식사 후 먹으면 된단다. 절대 잊으면 안 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유리병에는 분홍색 물약이 들어있었다.

         

       “카자르가 직접 만든 거야. 이걸 규칙적으로 사흘만 섭취하면 나갈 수 있을 거고.”

         

       프란체는 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까진 내가 항상 같이 있을 거란다. 카자르가 말하기론, 주체가 되는 내가 너와 같이 있는 편이 좋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더 이상 외롭게 있지 않아도 되는 건가…….

         

       “다행이네요. 혼자 있는 게 너무 외로웠습니다.”

         

       몸에서 힘은 계속 빠지고 있지, 햇빛도 보지 못해 답답하고, 혼자 있어야 하는 외로움이 고통스러웠다.

         

       할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냥 멍 때리면서 가만히 있어야 했으니…….

         

       “이제 바깥 소식을 알려줄게. 먹으면서 들으렴.”

         

       나는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프란체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흘 뒤 약 복용이 끝나면 여기서 나가 황도로 향할 거야. 거기서 바렌베르크의 해방이 공식적으로 선포될 거고, 동시에 네게 작위가 내려질 거란다.”

         

       그럼 진 바렌베르크 후작이 되는 건가. 자유의 몸이 되겠군. 그래도 프란체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너와 내 혼인 소식을 밝힐 거란다. 그 황녀가 널 노리고 있거든. 괜찮겠지?”

         

       혼인이라, 어찌보면 당연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당연히 이의는 없습니다. 저는 프란체가 전부니까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해맑게 웃는 프란체.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 나도 네가 전부란다.”

         

       이어 식사를 마치고. 나는 유리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다.

         

       ‘이게 약인가?’

         

       지금은 힘도, 감각도 너무 약해져 있어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냥 먹자.’

         

       프란체가 내게 이상한 짓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나는 의심없이 약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목 넘김이 생길 때마다 프란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잘했어. 이제 날 보렴.”

       “…?”

         

       유리병을 내려두고 프란체와 눈을 마주쳤다.

         

       “어…….”

         

       쿵! 뭔가 이상하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두근거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뭔가, 뭔가 이상해.’

         

       그간 쌓여있던 모든 욕구가 한 번에 폭발하는 거 같다.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고 전신의 혈류가 세차게 돌았다.

         

       “허억, 헉…….”

         

       머리를 싸메고 숨을 헐떡이고 있자 프란체는 내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괜찮니?”

       “예, 괜찮… 습니다…….”

       “조금만 참으렴. 약 효과가 돌고 있으니까.”

       “…….”

         

       본능적으로 프란체의 몸으로 시선이 갔다. 원래도 뇌쇄적인 몸매였지만, 오늘따라 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성욕이 들끓는다.

         

       “후우, 후우…….”

         

       심호흡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랑하는 프란체와의 처음인데 짐승처럼 덮칠 순 없다. 무엇보다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참아야 해.’

         

       그럴 것이, 단 한 번뿐인 순간이다. 이게 그녀에 대한 예의고 나를 위한 길이다.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아직 처음이라 효과가 크진 않네….”

         

       프란체의 중얼거림에 살며시 시선을 올렸다. 그녀는 무언가 아쉬운 듯 눈길을 돌린 채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프란체…?”

       “응?”

       “약이… 뭔가 이상한데요…….”

       “아니야. 치료하는 과정이란다.”

         

       그리 말하곤 나를 살며시 안아주는 프란체. 흥분으로 인해 손끝이 떨려오고 심장이 터질 거 같다. 당장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 끌고 가고 싶다. 취하고 싶다.

         

       “진? 왜 그러니? 호흡이 거칠어.”

       “…아닙니다.”

       “…그래?”

         

       왠지 모르게 혀를 낼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프란체. 이내 고개를 내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

       “가시는 겁니까…?”

       “일이 남아 있어서.”

         

       프란체는 싱긋 웃곤 내게 다가와 뺨에 키스했다.

         

       “내일 봐.”

         

       또각. 또각. 웨건에 접시를 담고 감옥을 나서는 프란체. 나는 그대로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후우, 후욱…….”

         

       이거 괜찮은 약 맞나? 아무리 봐도 흥분제 같은데…….

         

       ‘이상한 걸 꾸미고 있구나.’

         

       프란체가 뭔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이상한 계획을 쓸 리가 없으니.

         

       ‘생각을 바로잡아줘야지.’

         

         

       * * *

         

         

       “아쉽게 됐네.”

         

       프란체는 지하 계단을 올라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뭐, 효과는 확실했어.’

         

       혓바닥으로 핥는 듯한 끈적한 시선. 거친 호흡.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 이는 분명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해 나온 것이다.

         

       이대로 진에게 프란체의 몸을 각인시킨다면…….

         

       ‘내가 아니면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지.’

         

       첫 경험을 초야 때 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늦기 전에 기정사실을 만들어야 했다. 프란체는 자신과 진의 사이에 어떠한 스캔들도 엮고 싶지 않았다.

         

       ‘망할 황녀.’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진을 노리는 레일리아를 곱씹고 있자니, 어느덧 계단을 다 올라왔다.

         

       “오셨군요, 공작님!”

       “그래. 아, 헬레나.”

       “네?”

       “남자에 빠삭한 사용인이 있으면 불러주렴.”

       “…네?”

         

       헬레나는 연신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남자…?

         

       “물어볼 게 있어서.”

       “네, 네!”

         

       다소 의문이 들었지만… 주인의 뜻을 함부로 묻는 건 아니기에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헬레나가 데려온 건 레냐. 프란체의 전속 시종 중 한 명이다.

         

       “레냐?”

       “네!”

       “남자를 많이 만나봤니?”

       “넵!”

         

       의외였다. 나이가 그리 많진 않을 텐데? 평민들은 연애에 있어서 자유로운 편인가?

         

       “크흠, 아무튼. 지금부터 몇 가지 물을 게 있단다.”

         

       레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엇인가요?”하고 물었다.

         

       “지금껏 남자를 몇 명이나 만나봤니?”

         

       질문에 레냐는 음, 하면서 잠시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네 명이네요.”

       “네 명?!”

         

       프란체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을 꺼냈다.

         

       “레냐가 몇 살이지?”

       “스물 다섯입니다.”

       “그런데 네 명이나…?”

       “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아니, 거기까지.”

         

       지금껏 가져왔던 프란체의 정조 관념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그럼 질문을 시작할게.”

       “네. 무엇이든지 말씀해주세요.”

         

       시선을 돌린 채 머리를 꼬으며 조용히 말을 꺼내는 프란체.

         

       “남자는 어떤 식으로 하룻밤을 보내길 선호하니? 다른 건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인상적으로 남기고 싶은데.”

         

       이런 성적인 질문이 예상외였을까? 레냐는 입을 벌린 채 눈만 끔뻑거렸다.

         

       “레냐?”

       “네, 네?”

       “대답은?”

       “아… 잠시만요…….”

         

       레냐는 뭔가 주인과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간지럽지만… 얘기 못해줄 건 없었다.

         

       “그런 포괄적인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어요. 우선 그 사람의 성적 취향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성적 취향. 프란체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걸 알아볼 방법은?”

       “음… 사실 이거는요…….”

         

       레냐는 프란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얘기를 전해들은 프란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무, 무슨…….”

       “남녀 관계는 이런 식이에요.”

       “…….”

         

       꽤 곤란하다.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거나, 많은 관계를 가지면서 자신이 눈치채는 수밖에 없다니. 아직 경험도 없는 프란체로선 어려운 숙제였다.

         

       “흠…….”

         

       진이 무엇을 좋아할까? 어떤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을까? 이는 매우 중요하다. 잊을 수 없는 쾌락을 선사해야 프란체가 진에게 각인되어 의존으로 이어질 테니…….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뭘 좋아하니?”

       “음, 두 가지로 나뉘어요.”

       “두 가지?”

         

       레냐는 네, 하고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주도하는 쪽과 주도를 당하는 쪽이죠. 또 여기서도 많이 나뉘는데……”

         

       갑자기 성교육 시간이 되어버렸다. 레냐가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새빨간 말들이라 프란체는 머리에 열기가 올랐다.

         

       ‘아니야, 집중해야 해.’

         

       사랑하는 이를 만족시켜주기 위함이니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란체는 혼미했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그러면 있잖아. 만약 상대가 내게 품은 욕망을 참을 수 없는 상태라면 어떤 게 좋을까?”

         

       레냐는 검지로 입가를 톡톡 건드리더니 고민을 끝낸 듯 대답했다.

         

       “그거라면 끈적하면서 진득하고 질척하게 품어주는 게 최고겠네요. 얌전히 다 받아주는 거죠. 반응도 확실하게 해주고요. 남자는 그쪽을 좋아할 거예요.”

         

       끄, 끈적하면서 진득하고 질척하게 품으라니? 이게 대체 무슨 표현인가. 프란체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그, 그럼 무엇을 하든 간에 얌전히 받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니? 끄, 끈적하면서 질척하고 진득하게?”

       “네. 성관계는 서로의 교감이지만…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건 남자를 기뻐하게 만드는 방법이니까요.”

         

       아… 하며 고개를 주억이는 프란체.

         

       “그, 그래. 도움이 됐단다. 이만 가보렴.”

       “네!”

         

       제 임무를 완수한 레냐는 반듯하게 허리를 숙이곤 집무실을 떠났다.

         

       “…….”

         

       사실 성관계에 대한 건 프란체도 알고 있었다. 그야 성인이기도 하고 기본적인 건 다 배우니까.

         

       하지만…….

         

       ‘…내가 알던 건 겉핥기였구나.’

         

       만약 오늘 진이 그대로 자신을 덮쳤으면 어찌 됐을까? 잊을 수 없는 쾌락을 안겨주긴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범해졌겠지.

       

       그럼 계획대로 진에게 죄책감과 채무감을 심을 수 있었겠지만, 이는 프란체가 계획한 내용 중 절반만 성공인지라 아쉬웠을 거다.

       

       “나도 착실한 준비가 필요하겠네.”

         

       부부의 첫 경험인 만큼 좋은 분위기에서 조심스럽게 서로가 천천히 교감하는 것도 좋지만…….

         

       프란체는 일반적이지 않게, 진과의 강렬한 쾌락을 원했다.

         

       그편이 진도, 자신도 더욱 잊지 못할 테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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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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