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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69

     회귀 전.

     합스베르크 황제가 워낙 강성하고 건강하여 면전에서 딱히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다음 황제는 누가 될 것인가?

     테르시안 제국에서 합스베르크 제국으로 이름이 바뀐 뒤, 합스베르크 황제는 딱히 황위 계승권자를 아스타시아에서 다른 이로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정녕 아스타시아의 반려, 매국노 그레이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인가?

     라는 이야기가 제국 사교계에서 종종 오가고는 했다.

     뭐, 이제와서 무엇을 더 숨기랴.

     20살, 노스트럼의 멸망과 동시에 나는 아스타시아와 결혼했다.

     

     테르시안 제국이 노스트럼 전체를 향해 보내는 화해와 협상의 메시지로서, 결혼동맹을 통해 우리는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노스트럼 왕가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세인트 지오의 핏줄만 아니라면 한때 왕비와 외척 가문이었던 모르가니아 공작가마저도 품을 수 있는 담대함.

     다른 사람도 아닌 지브롤터 가문의 백작을 황녀의 짝으로 만들었기에, 합스베르크 황제를 향해 감히 누구 하나 후계에 대해 대놓고 물어보거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합스베르크 황제는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냐고.

     그때가 아마 지브롤터 협곡의 제 1관문, 제국을 향해 대륙횡단열차가 지나가는 협곡 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황제가 냈던 대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이 순간, 다시금 상기되었다.

     “합스베르크 폐하.”

     “그래, 그레이! 아스타시아와는 잘 만나고 왔나?”

     황제의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나를 반긴다.

     두 팔로 직접 안는 건 내가 꺼린다는 걸 이제는 인식했는지, 한 팔로 내 자리를 가리키며 나를 본인이 직접 안내했다.

     “앉지. 술은 좀 하나?”

     “저는 미성년자입니다, 폐하.”

     “어른이 권하는 술은 빼지 않는 게 노스트럼의 전통이라고 하던데.”

     “미성년자를 상대로 음주를 제안하는 게 불법인 거, 테르시안 제국에서만 그랬던 겁니까?”

     원래라면, 뒷말을 숨겼겠지.

     “아니면 합스베르크 제국에서는 합법입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직설적으로, 강하게 나가보기로 했다.

     “…으하하하!”

     합스베르크 황제가 껄껄 웃으며 의자에 앉는다.

     너무나도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쓰러지듯 앉는 바람에, 나는 그 모습이 회귀 전 지브롤터 백작가에 설치된 별궁에서 종종 보이던 모습이 겹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래. 거기까지 보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합스베르크 황제가 빈 와인잔에 자신이 직접 잔을 채우며 웃었다.

     “합스베르크 제국이라고 하는 건 말이야, 노스트럼 왕국까지 완전히 지배한 통일제국, 대륙 유일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일세.”

     “예.”

     “그 말인즉슨, 노스트럼이 멸망한다는 거 아니겠는가?”

     철컥.

     내가 앉아있는 소파 뒤로, 날카로운 칼날의 감촉이 느껴졌다.

     직접 피부에 닿은 건 아니지만,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살기가 내 피부를 찌르고 있었다.

     “노스트럼의, 지브롤터의 도련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

     “목이라도 보내시렵니까? 기껏 왕국을 대표하여 보낸 사절이 나라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고 있었으니, 그 목을 잘라 돌려보낸다고? 우리는 이렇게 왕국과의 동맹을 신경 쓰고 있다고?”

     “말이 길어지는군.”

     “길어질 수밖에 없지요.”

     나는 내 앞,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를 가리켰다.

     “손님으로 맞이한 것도 아닌데.”

     “…….”

     “다 알고 계시면서 떠보려고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스타시아에게도 말을 해뒀지만.”

     나는 지팡이를 든 뒤, 내 목에 겨눠진 무기를 향해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저는 두 나라 사이의 무궁한 안녕과 평화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스타시아 보러 왔습니다.”

     “…….”

     기분이 나빠진 걸까.

     칼날에 점차 오러가 짙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지팡이를 거두었다.

     “빼.”

     “…….”

     황제의 말에도 칼날은 멈춰있었다. 

     아니, 오히려 내 목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의 손님이다. 두말하게 만들지 마.”

     스르륵.

     오러가 사라지며, 칼날이 뒤로 물러났다.

     나를 향한 살기는 여전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안하네. 황제가 되면 아무래도 주변에서 하도 성화를 일으켜서 말이야.”

     “그래도 지브롤터인데, 라고 하면서 저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당장 연회장에 있는 장군들 중 몇 명이 성토하더군. 지브롤터의 핏줄을 그렇게 맞이해도 되는 거냐고.”

     “어차피 신경도 안 쓰시잖습니까. 아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개가 짖어도 열차는 철로를 달리지.”

     

     졸지에 개 취급당한 제국의 여러 장군들에게 잠시 묵념을.

     “한잔하게. 언젠가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

     합스베르크 황제는 직접 다기를 가져와, 내 앞에 솜누스 차를 따라줬다.

     

     “감사합니다. 다만….”

     “다만?”

     “솜누스 차는 94도가 아니라 85도에서 천천히 우려내야 합니다.”

     “…황제를 향해 그런 소리를 하는 인간은 아마 자네가 처음일 것이야.”

     “참을 수 없는 건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잔을 그대로 들고, 크게 한 입 차를 홀짝였다.

     “그냥 마시나?”

     “예.”

     “왜?”

     “제가 여기에 독이 들어있을까 봐 걱정해야 하는 겁니까?”

     “…….”

     합스베르크 황제가 다리를 꼬며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자네, 아스타시아와 시간을 빼앗긴 것 때문에 지금 빈정거리는 건가?”

     “알고 계신다면, 슬슬 일어나봐도 되겠습니까?”

     “그거라면 이해는 하겠지만, 좀 섭섭한걸. 자네를 위해 솜누스 차를 우려내는 법까지 일부러 배운 건데.”

     “누구한테서요?”

     “아스타시아한테서. 분명 그 아이가 이렇게 우려내면 잘 마신다고 하던 것 같던데.”

     “…….”

     역시, 황제는 잘 모른다.

     설령 이성적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스타시아가 94도 끓는 물에 우려내주는 솜누스 차에 담겨있는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차가 뜨겁다면, 식을 때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필요한 법.

     그 시간은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한 시간.

     적어도 합스베르크 황제와 차가 식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다.

     아스타시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축하하러 온 줄 알았는데, 이거 뼈 있는 경고를 하러 왔군 그래. 이건 노스트럼의 의지인가?”

     “그레이 지브롤터 개인의 의지입니다.”

     “왜?”

     “설레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설레발이라고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니 말씀드려야겠군요.”

     나는 다시 한번, 솜누스 차를 크게 홀짝였다.

     “양보할 수 있는 건 국서까지.”

     “…….”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신다면, ‘저희’가 졸업하고 난 뒤로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아주 그냥 날로 먹으려고 하는군.”

     합스베르크 황제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2년 반 동안 그 어떤 정치적 우군도 없이 홀로 늙은이들을 상대하라?”

     “지금까지 잘 해오셨을 것이며, 주변에 이미 여러 힘이 될 사람들을 수배해 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인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야.”

     “그 인재가 미성년자라고 한다면, 그건 노동력 착취입니다.”

     “제국에서는 만 17세 이상인 경우에는 법적 보호자의 동의 하에 주 20시간 이하로 노동을 할 수 있다네. 제국어로 ‘아르바이트’라고 하지.”

     “학생은 학업에 집중하라고 한 게 황제께서 지난 3월 30일에 인터뷰하신 내용 아닙니까?”

     순간, 합스베르크 황제가 움찔거렸다.

     “…….”

     “연설, 인터뷰, 대담. 언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건 전부 파악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문구는 최대한 기억하려고 하는 편이죠.”

     “나머지도 혹시 기억하고 있나?”

     “뭐든지 기억하는 건 아닙니다. 기억나는 것만 기억할 뿐이죠.”

     “하하….”

     

     합스베르크 황제가 입맛을 다시며 웃는다.

     “그래도 아쉬운데. 자네가 지금부터 돕기 시작한다면, 이 대륙은 더더욱 평화로워질 것인데 말이야.”

     “성인과 미성년자의 경계가 괜히 있는 게 아니죠.”

     나는 단숨에 차를 들이켰다.

     “성인이 되는 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해. 아스타시아와 정식으로 혼인한 뒤. 일이라면 그때부터 하도록 하죠.”

     “음…!”

     합스베르크 황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 말은…!”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흐름에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

     황제라는 거대한 비공정에 올라, 선두에서 앞을 가리키고 있는 황제를 향해 천천히 거리를 좁힌다.

     “대신.”

     다른 이들의 견제는 받아낼 수 있는 것만 받아내고.

     황제를 향해 등 뒤로 다가갈 때는 의심을 최대한 덜어내고.

     “아스타시아의 즐거운 학창 생활을 벌써 빼앗으려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오늘은 그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

     황제를 향해 다가갈 때, 황제를 지키는 그림자마저도 무의식중에 나의 접근을 비켜설 때.

     “오로솔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 아스타시아 황녀를 받아 가겠습니다.”

     그때, 나는 황제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폐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황제를 지키는 그림자들마저도 방심한 상태에서.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렇다.”

     이 응접실 안에 황제의 그림자가 있고, 메이드가 있고, 황궁을 지키는 기사가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 아닙니까.”

     “황위가 혈연으로만 이어져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전통…보수적인 관점이지. 지도자의 혈통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가 다른 이들의 위에 올라설 자격…그래, 능력이 있는가.”

     그런 이들의 앞에서, 합스베르크 황제는 나를 향해 잔을 들었다.

     “그레이 지브롤터. 나는 그대가 나의 뒤를 이어받았으면 좋겠다.”

     

     무슨 여인이 프러포즈하는 것처럼, 합스베르크 황제는 기대감과 걱정이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닦아놓은 이 나라를 넘겨받는 이들에게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저는 다리에 하자가 있습니다만.”

     “다리 아프다고 국가를 운영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가 바라보는 건 오직 내 뒤를 이어받을 자가 얼마나 내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가.”

     순간적으로, 합스베르크 황제가 좌우를 훑었다.

     그의 눈에 슬쩍 스친 그림자나 메이드, 기사는 전부 머리칼 어딘가에 ‘흰색’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관점에서 보면 다른 이들은 전부 먹칠을 할 것 같았지만….”

     “제가 뒤를 이으면 뭐 금칠이라도 해드릴 것 같습니까?”

     “그러하다.”

     흰색조차 없는, 회색인 내게 합스베르크 황제는 상체를 숙이며 앞으로 잔을 뻗었다.

     “내가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있다.

     “죽음은 인간의 완성이지.”

     비슷한 뉘앙스로 말하기도 했고.

     “나는 말이야, 내가 아무리 치적을 많이 쌓아도 그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회귀 전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하기도 했다.

     “그레이. 너는 나의 ‘완성’이다.”

     그때는 마침표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직설적인 단어.

     “합스베르크 황제라는 인간의 위인전 끝에, ‘그레이 지브롤터를 다음 황제로 선정했다’라는 문구로 마무리 짓고 싶구나.”

     이러니.

     주변에서 그레이 지브롤터를 향해 견제를 안 할 수가 있나.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무엇이요?”

     “네가 아스타시아의 곁을 지키기 위해 제국까지 달려와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 키스를 한 것처럼 말이지.”

     “…….”

     결은, 같다.

     “알겠습니다. 다만.”

     결은 같지만, 결국 그 끝은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에.

     “만일 제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저는 그때 폐하의 뒤를 잇는 게 아니라 뒤를 찌르러 올 겁니다.”

     나는 이 남자를 죽여야 한다.

     “용납할 수 없다. 그래, 어떤 건가?”

     “글쎄요. 예를 들어….”

     나는 솜누스 차를 전부 들이킨 다음, 빈 잔을 앞으로 뻗어 와인잔과 건배했다.

     “아스타시아를 다른 남자와 동침시키려고 한다거나.”

     “…으하하하!!”

     합스베르크 황제가 뒤로 넘어질 것처럼 폭소하며, 다시 한번 잔을 부딪쳤다.

     “자네가 있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럴 리가?”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죠.”

     나는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묻지 않았다.

     나를 황제로 세운다면.

     아스타시아를 황제로 세운다면.

     ‘그 뒤’는 어떻게 할 건지.

     “아직 저희는 성인도 아니고, 아직 제가 아스타시아와 결혼한 사이도 아니니.”

     “자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법을….”

     “그래 주시면 감사하기야 하겠습니다만, 노스트럼과 지브롤터에는 관습법과도 같은 저주가 있어서.”

     “아, 그.”

     “괜찮습니다. 2년 반을 못 기다리겠습니까?”

     미래의 황제는 내가 아스타시아와 결혼을 하고 난 뒤.

     7년을 더 기다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졸업까지 2년 반.

     그리고 내가 처형대에 올랐던 나이, 27세까지 앞으로 9년 반.

     “시간은, 아직 많으니.”

     * * *

     다음 날.

     

     제국 전체에 ‘그레이 지브롤터가 다음 황제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아스타시아의 짝으로 소문이 퍼졌어야 했는데.”

     “도련님. 정정보도 요청할까요?”

     “됐네. 로버트 경.”

     아스타시아의 반려가 되는 자, 다음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도련님.”

     “또 왜.”

     “…새벽부터 도련님 죽이려고 온 이 암살자들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

     나는 루틴대로, 솜누스 차를 홀짝였다.

     “왕관을 짊어지는 무게는 아니지만, 아스타시아의 반려가 되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해야지.”

     

     별 건 아니다. 

     그저, 암살이 늘었을 뿐.

     “내가 황위를 빼앗기면 그와 함께 아스타시아도 함께 빼앗긴다면, 결코 빼앗길 수 없지.”

     나는 황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스타시아를 지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서 아스타시아를 빼앗아갈 수 없다.”

     설령, 나의 핏줄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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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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