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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프란체가 오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얼빠진 표정이었다.

         

       “…약속? 무슨 약속.”

       “무엇이든지 이뤄드리겠다고. 계속 주인님의 편일 거라는 약속입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프란체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이유로 천금의 기회를 발로 차버린다고? 너는 참… 다시 생각해도 웃기는 사람이야. 아무리 노예가 되었다곤 하지만, 왕국을 멸망시킨 제국의 공녀를 적대시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충성까지 하고 있잖니?”

         

       나는 프란체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래서, 제게 더 원하시는 건 없으십니까? 무엇이든지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원하는 게 있다면, 그 원하는 게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너가 들어줄 수 있을까?”

         

       그래. 나는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단다.

         

       나는 이 세계에서 모르는 게 없다. 숨겨진 비밀, 정보, 미래. 거기에 모자라서 진 바렌베르크라는 소드 마스터의 몸까지 있다.

         

       많은 시간과 움직임의 자유를 얻어야 풀 수 있는 초월 마법사의 노예 각인을 해제하는 것만 제외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걸 찾는 게 더 편할 거다.

       

       “말했지 않습니까? 불가능이란 건 없다고.”

       “허,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읊어봐. 거기서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걸로 고르지.”

         

       프란체가 권태로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제국의 황제가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데카르트 공작가의 가주가 되길 바라십니까? 이것도 아니라면 제국 제일의 권력가가 되고 싶으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지 이뤄드리겠습니다.”

         

       터무니없는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니?”

       “예.”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저는 명령을 받는 입장이니까요.”

       “정말로 그런 이유니?”

         

       사실 나를 위해서기도 해. 노비도 양반집 노비가 좋다고, 주인의 위상이 하늘을 찌르면 노비도 같이 올라가는 거 아니겠냐.

         

       그리고 무엇보다 프란체. 당신의 삶이 너무 불쌍한 것도 있지만, 이 병신 같은 게임의 이야기가 만들어낸 피해자.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나 내가 생각한 대로 대답할 수는 없겠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래서, 원하시는 건 없습니까?”

       “그 선택지에서는 없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을 위해 아껴둘게.”

         

       프란체는 다시 권태로운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시간이 좀 늦은 거 같은데.

         

       “이제 슬슬 공작저로 돌아가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래. 데카르트로 돌아가야겠지.”

         

       후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지간히도 돌아가기 싫은가 보다.

         

       “있잖아. 지금 이 테라스에서 떨어지면 죽을까?”

       “죽진 않을 겁니다.”

       “꽤 높은 위치인데? 네가 구해주기라도 하려고?”

       “예.”

       “어째서? 내가 죽으면 너는 노예 각인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될 텐데?”

         

       그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잖니.

         

       “주인님이 돌아가시면 저는 다시 노예로 잡힐 겁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사방이 적인 제국의 내부에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당장의 자유를 되찾겠다고 주인의 죽음을 방관하는 건 멍청한 짓입니다.”

         

       호오, 프란체가 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생각이 있긴 하구나.”

         

       그러고는 피식 웃는다. 누구나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거긴 한데. 나를 너무 바보로 아는 거 아니야?

         

       “그래. 너와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기분이 풀렸구나.”

       “기분이 많이 상하셨었습니까?”

       “그래. 그 소미레라는 여자가 나를 제대로 모욕했거든.”

       “무슨 말을 했는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쩝. 괜히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나중에 이야기해 준다니, 사람을 가장 화나게 만드는 것은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인데.

         

       프란체는 걸터앉아 있던 테라스의 난간에서 일어났다.

         

       “…슬슬 돌아가야겠구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도 봤듯이 페르시아 공작에게 일방적으로 파혼당했잖니? 이걸 가지고 가문에서 뭐라고 할지 생각만 해도 지치는구나.”

         

       하긴, 그렇긴 해. 그 미친 데카르트 형제들이 뭐라고 구박하려나.

         

       ‘쌍욕을 날릴 거 같긴 해.’

         

       내가 말했다.

         

       “원래 걱정이 클수록 별일 아닌 법입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부딪혀보시지요. 이제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후우, 프란체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래야겠지. 결국,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일이니까.”

       “부딪히고, 부딪히다가 정 버티지 못하시겠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지요. 도망을 치든, 모든 것을 박살 내든. 원하는 걸 이뤄드리겠습니다.”

         

       피식. 그녀가 웃었다.

         

       “말하는 거 한 번 살벌하구나. 두려움이 없어 보여.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그 집안에서, 그런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왔는데 뭔들 못하리.

         

       문득, 그녀의 미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찌릿거렸다. 저렇게 버티고, 버텨온 삶의 끝에 희망은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

       

       게임을 하면서 프란체를 수없이 죽였다.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게 미움받아, 악역이라는 운명을 가지고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 명확한 답이 있는 수학처럼 바꿀 수 없는 운명.

         

       ……목구멍이 무언가에 막힌 듯한 기분.

         

       나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시지요. 파티도 끝나갑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그렇게 우리는 파티장을 나왔다. 마차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귀족들이 수군거리고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

       “…….”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그들을 무시하고 마차에 도착했다.

         

       “돌아가지.”

         

       프란체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 기사들. 명백하게 그녀를 존중하고 있지 않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그저 공작의 명으로 따라온 놈들. 프란체에겐 일절 관심도 없는 새끼들. 괘씸해서 나도 모르게 쯧, 혀를 차버렸다.

         

       “무슨 일 있니?”

       “아닙니다.”

         

       나는 마차의 계단 옆으로 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도 마차에 탑승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말이 울려 퍼지고 약간의 덜컹거림이 생겼다. 마차가 출발한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물었다.

         

       “이제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을?”

       “성녀가 했던 말입니다.”

       “…….”

         

       프란체가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화살에 뚫려 깨졌던 창문은 금세 수리되어 있었다.

         

       “꼭 들어야겠니?”

       “너무 궁금해서요.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녀의 표정이 잠시 구겨졌다가, 입을 열었다.

         

       “집안에서도 존재를 부정당하시는 주제에 제 호의를 거부하지 마시지요. 어차피 갈 곳도 없지 않습니까.”

         

       프란체의 말을 듣자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예?”

       “내가 들었던 말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소미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완전 미친년이었잖아.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장면은 프란체가 소미레에게 다가와 뺨을 때리는 장면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프란체가 미친년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다. 소미레가 그런 미친년이었다니…….

         

       나는 다시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왜,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

       “그건 아닙니다만, 정말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실존하는지가 의문이라서요.”

       “나도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어.”

         

       그래. 잘했다. 그런 말을 했는데 시원하게 뺨이라도 갈겨주지 않으면 고구마 한 트럭이지.

         

       “그런데 성녀가 주인님의 비밀을 어찌 알았을까요?”

       “그게 나도 의문이야. 아무리 성녀라고 불려도 평민. 데카르트 공작가의 뒷조사를 할 만큼의 힘은 없을 텐데.”

       “황태자의 소행이 아닐까요?”

       “그가 알았으면 파티장에서 대화를 나눌 때 똑같이 나왔겠지. 적어도 태자 전하는 모르는 눈치였어.”

         

       혹시 소미레도 플레이어인가? 아니지, 그렇게 단정 지을 순 없다. 게임에서 프란체의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으니까.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아직은 추측하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그때 해도 늦지 않으니.

         

       ‘그나저나, 플레이어는 그런 소미레를 주인공이라고 키웠던 건가?’

         

       프란체의 과거를 알고 진실을 맞이한 결과일까. 일순 구역질이 치솟았다. 이 게임의 진정한 악역은 소미레가 아닐까? 가만히 있는 프란체에게 다가가 저딴 소리나 하고 있다니.

         

       개씹똥좆망겜 수준. 당장이라도 제작사로 찾아가 다 때려 부수고 싶다.

         

       “…….”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프란체를 그 어떤 누구보다 영향력이 있는 강자로 만들자고.

         

       다시는 누군가가 그녀를 건들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나를 위해서, 프란체를 위해서.

         

         

       * * *

         

         

       마부의 말이 울려 퍼졌다.

         

       “도착했습니다!”

         

       공작저에 도착했다. 나는 마차의 문을 열고 먼저 내린 다음, 프란체의 손을 잡아주었다.

         

       집사장이 다가와 말했다.

         

       “공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눈을 얕게 뜨고 집사장을 응시하는 프란체. 그녀는 말없이 공작저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봤다. 시종들 그 누구도 프란체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

         

       이건 좀 기분이 나쁜데. 그녀가 공작가의 모두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곤 하지만, 시종과 기사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이 광경을 마주하니 표정 관리가 힘들어진다.

         

       이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프란체는 덤덤하게 말했다.

         

       “익숙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렴.”

         

       그녀가 항상 무시당할 때마다 하는 말.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이 공작저에서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 존중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는다.

         

       프란체가 집안에서 사고를 쳐서도 아니고, 시종을 괴롭히는 미친년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에덴과 라인의 괴롭힘이 시종들에게까지 이어졌을 뿐. 그 탓일까.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프란체가 말했다.

         

       “공작님을 뵐 거란다. 정신 똑바로 차리렴.”

       “저도 들어가는 겁니까?”

       “그럼 들어가야지, 안 들어가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프란체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프란체 데카르트입니다.”

       ―들어와라.

         

       벌컥. 문이 열렸다. 좌우로 나누어진 소파에는 라인과 에덴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사나운 눈빛. 프란체를 비난하기 위해 모인 건가.

         

       또각. 또각.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프란체. 나는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라인이 말했다.

         

       “집무실에 노예 새끼를 데려와? 대체 무슨 생각이냐?”

       “…….”

       “대답 안 해? 이게…!”

       “그만.”

         

       공작이 라인을 제지했다.

         

       “그래, 프란체. 네가 파티에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공작가에서 파혼 요청서가 날아왔다. 이 일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프란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 나는 고개를 들이밀어 조용히 속삭였다.

         

       “저희가 퍼트린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하십시오.”

         

       내 말에 눈이 번뜩 뜨인 프란체. 다행히 이 망할 데카르트 공작가의 일원들은 내가 무언갈 속삭였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나와 같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감각은 훨씬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분야. 진의 몸이 특별한 거다.

         

       프란체는 망설였다. 아마 이게 진짜 통할까 겁이 나는 거겠지. 그녀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나 박을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잠시 후.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것이…….”

       “그것이?”

       “페르시아 소 공작님께선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가지고 계십니다…….”

         

       데카르트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하지 못할 비밀?”

         

       프란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인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비밀은 무슨 비밀. 그냥 네가 노예한테 5억을 태웠다는 걸 들킨 거겠지. 내 말이 틀리냐?”

         

       데카르트 공작은 그런 라인을 째려봤다. 그러자 고개를 돌리며 조용해진 라인.

         

       “비밀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꼴깍. 프란체의 목울대가 무겁게 넘어갔다.

         

       “페르시아 소 공작님께서는 동성애자이십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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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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