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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7

    쾅, 하는 큰 소리가 중앙 연구소 내부를 울렸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사무용 책상을 그대로 관통해 벽에 처박혔다. 

    보통의 콘크리트였다면 그대로 뚫고 지나갈 만한 충격이었지만 오브젝트로 구성된 연구소의 외벽은 실금 하나 가지 않고 멀쩡했다.

    나를 촉수로 후려쳐 날려 버린 아귀는 커다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다른 먹잇감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커다란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끈적끈적한 점액이 잔뜩 흐르는 몸통, 그리고 그 몸통에 수없이 돋아난 촉수. 좋아하기 힘든 생김새의 오브젝트였지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귀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체급 차이가 100배는 나는 레슬링 시합.

    그래도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꺼낸 괴물이니까, 내가 막아야지. 

    무책임하게 도망가 버리면 연구소에 갇힌 직원들만 억울하게 죽는 셈이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귀의 파괴 조건은 이해할 수가 없다.

    별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죽이지는 못해도 다른 방식으로 무력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저 촉수가 다 잘려 나가면 죽은 거랑 비슷한 상태 아니겠어?

    ***

    평소에도 생명의 위협이 공존하는 지옥 같은 직장이었지만, 지금 상황에 비한다면 천국 같다고 해야 했다.

    아귀는 사람들을 먹으려고 뛰어다니고 회색 사신은 아귀를 악착같이 노리고 달려들었다.

    폐쇄된 중앙 연구소는 전쟁터처럼 바뀌어 버렸다.

    지시를 내려야 하는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30년 전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던 아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사람을 쫓는 아귀를 피해 도망치던 나를 구해준 건 아귀만큼이나 유명한 회색 사신이었다.

    30년 전 가장 유명하고 위험한 오브젝트와 현재 가장 유명하고 위험한 오브젝트의 충돌이었다.

    회색 사신은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맥없이 날아가 버렸다.

    회색 사신도 아귀에겐 안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할 때 회색 사신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귀에게 달려들었다.

    그것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반복해서 말이다.

    그 모습은 마치 연구소 구석에 몰려 죽을 위기인 우리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회색 사신은 달려들고, 달려들고, 달려들고, 계속 달려들었다.

    그렇게 회색 사신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이변은 갑자기 일어났다.

    회색 사신이 일방적으로 당하던 상황은 갑자기 반전되었다.

    언제나처럼 회색 사신이 달려드는 것은 동일했지만, 빠악하는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아귀의 고통에 찬 비명이 연구소 내부에 울려 퍼진 것이다.

    아귀의 커다란 눈은 폭탄에 맞은 것처럼 터져 있었고, 그 자리에선 초록색 핏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회색 사신은 왼쪽 팔이 팔꿈치부터 사라졌었다. 팔이 잘린 단면은 노랗게 타오르며 천천히 재생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서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발. 제발 덜 위험해 보이는 회색 사신이 이기기를.

    ***

    지금 내가 사용한 방법은 능력의 조합을 이용한 것이었다.

    유령화, 물리 면역, 재생력. 이 3가지 오브젝트 능력의 콤비네이션.

    유령화를 가진 오브젝트는 자신과 상대방의 신체를 중첩시키는 위험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하다. 

    유령 상태에서 신체를 겹치게 만든 다음, 유령화를 풀면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서로의 신체가 뒤섞여 버려 둘 다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령화를 가진 오브젝트 중에 그런 식으로 신체를 뒤섞어 버리는 짓을 반복하는 흉악한 녀석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거기서 물리 면역이 추가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물리 면역을 가진 쪽은 전혀 손상 없이 상대방에게만 피해를 강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쇠창살을 자르거나 할 때, 자주 써먹던 방법.

    하지만 오브젝트를 대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고? 상대방도 물리적으로 파괴되지 않으면 둘 다 박살나니까!

    거기서 필요한 게 재생력이다. 

    박살 난 뒤에 재생시키면 좀 아프긴 해도 이득이다.

    아니 좀 많이 아프니까 이런 거 쓸 상황은 안 왔으면 좋겠다.

    가슴속에서 맥동하는 불길이 맹렬하게 타들어 가며 소실된 신체를 재생시켰다.

    다행인 점은 나와 아귀와의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공포와 기대감등의 감정이 내 불길을 크게 키웠고, 그것은 내 상처를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빠르게 재생시켰다.

    거기다가 저 아귀라는 놈은 상처를 입는 게 처음인지, 명백하게 위축된 것이 눈에 띄었다.

    하긴 물리 면역인 오브젝트가 다칠만한 일이 얼마나 되겠어?

    저 녀석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고통일 것이다.

    나도 그렇지 않냐고? 처음 서울숲에서 눈을 떴을 땐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다. 

    태생부터 물리 면역을 가진 나약한 녀석들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다치고 굴러다닌 오브젝트란 말이다.

    문제는 저놈도 미약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 재생 능력에 한계가 있지 않다면 완전한 무력화는 불가능했다.

    이제 아귀와 신나게 싸우는 와중에 저 녀석을 쫓아내거나, 가두는 수단을 빨리 생각해 내야 했다.

    안타깝게도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저 녀석도 수동적으로 계속 맞고만 있으면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는지,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촉수를 휘둘러서 나를 밀어내거나 신체가 겹쳐지는 순간에 몸을 빼서 피하거나 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힘든 상황이 지지부진하게 계속 이어지던 상황은 뜻밖의 변혁을 맞이했다.

    왼팔 하나랑 아귀의 촉수 하나를 바꿔먹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귀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나를 나머지 촉수로 후려쳐서 연구소 벽에 날려 보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수상할 정도로 튼튼한 연구소 벽에 처박힌 내가 다시 일어서서 아귀에게 달려드는 것으로 지지부진한 전투를 다시 시작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

    내 몸은 콘크리트 벽을 손쉽게 관통해서 연구소 주차장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구른 것이다.

    연구소가 부서졌다! 어째서? 

    황급히 시선을 연구소 쪽으로 향하자, 연구소는 이제 더 이상 오브젝트가 아니었다. 

    연구소 한편에서 아귀가 연구소 벽을 부수면서 뛰쳐나왔다.

    키에에에엑하고 길게 내뱉는 아귀의 울음은 30년 만에 바깥공기를 쐰 아귀의 통쾌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밖이면 넓으니까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그대로 소장의 손에 쥐여줬다.

    “선배! 그래도 돼요?”

    “여기선 선택지가 없는 거나 다름이 없어. 부소장이 허겁지겁 탈출한걸 보면 회색 사신이 모습을 드러낸 게 확실하겠지. 지금쯤 아귀를 연구소 안에 풀어놓지 않았을까?”

    “네? 그럼, 우리 위험한 거 아녜요?” 

    “그러니까 선택지가 없단 거야. 여기선 지팡이를 넘겨주는 수밖에 없어.”

    아귀에게 잡아먹히기 vs 수상쩍은 오브젝트와 거래하기.

    불합리한 양자택일에서 거래하는 쪽을 골랐다.

    소장은 자기 손에 지팡이가 쥐어지자 그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내리찍었다. 마치 내가 지팡이의 능력을 사용할 때처럼 말이다. 그러곤 소장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후배는 마치 솜사탕을 물에 씻어서 잃어버린 라쿤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보다가 소리쳤다.

    “앗, 선배. 저거 지팡이 가지고 도망간 거 아녜요? 오브젝트랑 거래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사기당한 거죠?”

    나는 그대로 창문가로 다가가서 창문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청명하게 울리는 유리의 소리가 들렸다. 이전과 달리 확실히 평범한 유리창이었다. 

    더 이상 연구소는 오브젝트가 아니게 되었다.

    “아니 거래는 제대로 됐어. 빨리 나가자. 여기는 곧 지옥이 될 거야.”

    마침 적당한 도구를 들고 있는 후배의 손에서 망치를 뺏어 들고는 그대로 창문을 향해서 휘둘렀다.

    아마 평소의 연구소였다면, 이 유리창은 망치를 튕겨 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외눈 안경이 알려 준 힌트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다.

    [소장으로 있는 한, 연구소는 파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소장이 지팡이로 어디론가 떠나버렸으니까, 이 연구소는 파괴가 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아앗! 망치로 부술 땐 저보고 시키지, 그랬어요! 저 망치질 잘하는데!”

    갑자기 헛소리하는 후배에게 망치를 돌려준 뒤 길을 서둘렀다.

    “빨리 따라와. 중앙 연구소에 격리된 오브젝트들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해.”

    시간이 촉박했다. 

    이제 연구소의 오브젝트들이 탈출을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그것도 중앙 연구소로 보내져야만 했던 격리 곤란의 흉악한 오브젝트들이 말이다.

    오브젝트들의 난동에 휘말려 죽기 싫으면 이를 악물고 도망가야 한다.

    신나게 달리는 와중 뒤편의 연구소가 신나게 박살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기 싫으면 뛰어!”

    지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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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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